소설리스트

금동-299화 (299/463)

299화: 각자의 타산

“이건 큰일도 아니다. 황후마마께서 또 뭐라고 하셨는지 아니? 양빈 마마를 위해 연회를 크게 여신다는구나. 제대로 축하한다고, 각 가문의 규수를 데리고 입궁하라 하시더라.”

원 부인은 아들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아들이 뭔가 깨달은 듯 눈썹을 높이 까딱하는 걸 보고 웃음 지었다.

“이럴 줄 알았다. 너는 영리한 아이지. 어미가 무슨 일인지 다 이야기하기 전에 깨닫는구나. 영 황후 말씀이, 후궁이 썰렁하다고, 황후마마와 양빈 마마는 괜찮아도 황상께서 익숙하지 않을 거라고 하시더라. 들어보렴. 나는 아무리 들어도 좋은 소리로 들리지 않더구나.”

“후궁에 사람을 들이신답니까?”

여염이 확인하듯 묻자, 원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두 가지 큰일을 어서 할아버님께 고해라. 그리고!”

원 부인이 여염을 붙들었다.

“이 말도 전해라. 너도 나이가 찼는데, 규수를 고르니 마니 하다가 좋은 혼처가 다 날아가면…… 내 생각에 네 혼사도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여염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어머니, 황상의 여인을 가로채실 생각입니까? 규수 선발입니다. 궁에서 시녀를 뽑는 게 아니에요. 궁에 들어갈 정도라면 당연히 자기도 원하겠지요. 입궁할 뜻이 있는 사람이 어머니 며느리가 되겠습니까?”

원 부인은 조금 머쓱해졌다.

“그것도 그렇지. 어미가 어리석었다. 설사 그 일이 아니더라도 너도 나이가 찼지 않으냐. 슬슬 혼인해야지.”

“할아버님께 말씀드리고 할아버님 생각이 어쩐지 여쭙겠습니다.”

여염은 조부 여 승상을 만나러 서재로 직행했다.

여 승상은 흔들의자에 앉아서 여염의 이야기를 다 듣고도 눈을 반쯤 감은 채 양손을 배 위에 올리고 가만히 있었다. 조금도 놀라지 않은 듯했다.

“영 황후는 열몇 살부터 병사를 거느리고 전장에 나간 분이다. 원 대장군에게 들었었다. 정북후는 영가에 쭉정이가 나지 않는다고들 한다만, 그 뒤에 한마디가 더 있다. 영가 여식도 다 아들처럼 키운다고 했다. 영 황후가 그 당시 남으로 내려와 입궁할 때 고작 시녀 여남은 명을 데리고 왔다. 그 사람들만으로 자기를 지키고 오황자를 지켰다. 그게 능력 없이 될 일이냐? 그 두 가지 일은 계략도 아니다. 인지상정이야. 황후께서 거론하지 않았더라도 조정에 누군가가 거론했을 것이다. 기선을 빼앗았을 뿐이다. 잘 빼앗았고.”

“오황자의 글선생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염은 오늘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서생들은 모두 황상의 유일한 적자인 오황자의 글선생이 누가 될지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유혹이 큰 만큼 난처한 일거리였다.

“영원이 막 경성에 들어왔을 때 황상이 온 한림원 학사를 선생으로 내주지 않았더냐. 오가아는 영 황후 밑에서 몇 글자 배웠을 뿐이라 제대로 글공부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한림학사들이 돌아가면서 가르치게 되겠지.”

여염은 멈칫하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할아버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이건 정말이지…… 너무 공교롭군요. 그야말로 하늘의 뜻이라고밖에요.”

“음, 그러고 보니 요 며칠 계속 밖을 나돌더구나. 춘시가 코앞이다. 마음 다스리고 슬슬 과거 준비해야지. 이번 춘시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해 상서가 시험관으로 낙점될 것이다. 그렇게 알고 있어라. 춘시 방이 붙으면 서길사(庶吉士: 한림원의 관직명. 진사進士 가운데 문학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임명한다.) 시험을 보고 한림원에 몇 년 있거라. 그리고 이신, 오황자, 두 사람과 가깝게 지내라.”

“예.”

여염이 두 눈을 빛내며 재빨리 대답했다.

“참. 어머니가 이것도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제 혼사를 서둘러 정하고 싶답니다.”

“음, 일단 골라 보라고 해라. 궁에서 규수를 고른다고 하니 각 가문의 생각도 알아볼 수 있겠지. 서두를 것 없다. 네 처는 좋은 사람으로 들여야 한다.”

여 승상의 담담한 모습에 여염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몇 년 더 있다가 혼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미루면 안 된다. 집을 이뤄야 일도 세우지. 할아비는 4대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살고 싶구나.”

여염은 멈칫하다가 불현듯 조부가 연세가 많음을 깨달았다. 사람이 일흔까지 사는 건 드문 일이라 고희(古稀)라고 하지 않나. 여염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서글퍼졌다.

고서강 고 사사부.

유 부인이 중문에서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며느리들이 우르르 나와 맞이했다. 마중 나온 큰며느리가 웃음을 지으며 고했다.

“어머님, 탕가 대내내가 탕가 오낭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어머님이 궁에서 언제 돌아오실지 몰라서 제가 탕가 대내내와 오낭자를 셋째 동서 거처로 먼저 보냈습니다.”

탕가 대내내와 오낭자는 유 부인 셋째 며느리인 탕 삼내내의 모친과 여동생이었다. 지아비 고 사사가 탕가 사람에게 큰일을 맡긴 걸 아는 유 부인은 그들이 왔다는 말에 서둘러 분부했다.

“내 거처로 모셔라.”

대내내가 서둘러 사람을 삼내내 거처로 보냈다.

유 부인이 거처로 돌아가서 소세하고 옷을 갈아입었을 때, 탕 삼내내의 모친, 탕가 장방 적장손 며느리 상 대내내가 딸 탕 오낭자를 데리고 와 있었다.

유 부인이 다정하고 예의 바르게 오는 길에 고생했느니 하는 안부를 건네며 차 한잔하는데, 상 대내내가 금방 일어서서 인사했다.

산서에서 달려와 어제 겨우 경성에 도착해서 매우 피곤한 때였다. 유 부인 역시 밤새 바쁘게 지내다가 이제 막 돌아와서 매우 피곤했다. 두 사람 모두 똑똑한 사람이라 상대가 피로한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얼굴 보고 인사하려는 것이라 차 두어 잔 나눈 뒤에 상 대내내가 곧바로 인사하자 유 부인은 인사치레로 한두 마디 만류하고는 탕 삼내내에게 배웅하라고 분부했다.

탕가 모녀를 배웅한 뒤, 유 부인은 고 사사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는 서재에서 참모와 바둑을 둔다는 말에 곧바로 일어서서 서재로 향했다.

고 사사는 모두를 물리고 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양빈이 비로 올라가고 후궁에 사람을 늘린다는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부터 쉬었다.

양빈이 비가 되는 건 사소한 일이었다. 규수를 뽑아 후궁에 사람을 늘리는 일은 안 그래도 조금 전에 참모와 논의하고 있었다. 주 귀비가 죽고 후궁이 텅 빈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황상이 나이가 많지 않은 건 물론이고 설령 나이가 많다고 해도 후궁을 비우는 법은 없었다. 반드시 사람은 골라야 했다. 문제는 어떻게 고르느냐였고.

태자에게 불리한 상황이 바로 지금처럼 규수 중에 후궁을 뽑는 것이었고, 고 사사가 가장 바라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중에 또 주 귀비가 나오면 어쩌나. 황상은 올해 겨우 마흔 몇이다. 선황이 누렸던 천수를 누린다면, 새 후궁이 총애를 얻고 황자를 낳는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었다.

“노야, 탕가 장방이 경성에 왔습니다.”

유 부인이 안색이 어두운 고 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 사사는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탕가 대야가 이미 다녀갔다.

“아까 상 대내내가 막내를 데리고 다녀갔습니다. 다섯째요. 오낭자가 제 언니보다 예쁘장하던걸요. 딱 보니까 눈매며 분위기며, 주 귀비를 닮은 듯했습니다.”

유 부인의 말에 고 사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유 부인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말을 걸어 봤는데, 영특한 처자더군요. 귀염받을 상이고요. 상 대내내에게 물어봤는데 아직 정혼하지 않았답니다.”

“당신, 그 말은?”

고 사사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돌아오는 길에 궁리를 좀 해봤지요. 우리 가문엔 적당한 낭자가 없어요. 경성 쪽 방계엔 없고 산서 고향엔 있긴 한데, 너무 멀어서 사람을 보내 불러오고 어쩌고, 반년은 걸릴 겁니다. 적당하리란 법도 없고요. 그래서 그냥 넘기려고 했는데 탕가 오저아가 훌륭하지 뭡니까. 또 마침 이렇게 나타났고요. 다만 당신이 탕가를 적절하다고 생각하실지 몰라서.”

유 부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탕가 낭자를 궁으로 보냈다가 정말 총애받으면 탕가 좋은 일만 되어서는 안 된다. 남 좋은 일만 할 순 없지 않은가.

“탕가는 온 집안이 상인 가문이지. 하지만 안 될 것 없소. 이건 기회요.”

잠시 생각하던 고 사사가 대답했다.

탕가 오저아가 정말로 입궁해서 총애를 얻고 거기에 황자를 낳는다면 고가는 양손에 떡을 쥐는 셈이다. 다 이루는 것이다.

탕가엔 은자만 많고 조상 묘를 잘못 썼는지 벼슬 운이 없었다. 적어도 앞으로 몇십 년은 고가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다들 영리한 사람이고…….

“당신, 셋째 며느리를 친정에 보내서 탕가의 의중을 알아보시오. 황후마마의 연회가 며칠 남지 않아서 탕가 오저아는 궁중 법도부터 배워야 할 것이오. 명심하시오. 절대로 소문나면 안 된다고 며느리에게 당부하고.”

고 사사는 재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유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재에서 나와 며느리를 불러 친정으로 보냈다.

탕가 삼내내는 시모 유 부인의 분부를 듣자마자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출타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가슴이 꽉 막혔다.

고가 저택에서 돌아가는 길, 처음으로 경성에 온 탕가 오낭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경성의 거리 풍경을 구경했다. 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상 대내내는 아예 마차를 천천히 몰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탕 삼내내가 친정에 도착했을 때 상 대내내가 오낭자를 데리고 막 중문에서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탕 삼내내가 뒤이어 마차에서 내리는 걸 본 상 대내내가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무슨 일이야?”

탕 삼내내가 조금 억지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별일 아니에요. 어머니, 걱정하지 말아요.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탕 삼내내는 모친을 부축해서 상방으로 들어가다가 따라 들어오려는 오낭자를 돌아봤다.

“너는 돌아가서 쉬고 있으렴. 어머니와 이야기 끝나면 부르마.”

“응.”

탕 오낭자는 무슨 일이 났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지금은 자기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닌 듯해서 고분고분 대답하고 거처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냐?”

상 대내내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경성은 정말 바람 잘 날 없구나. 도착하자마자 일이 터지다니.

“일이 생기긴 했어요.”

방 안에 모녀 두 사람만 남자, 탕 삼내내가 어두운 얼굴로 유 부인이 한 말을 전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어머니 생각은 어떠세요?”

상 대내내의 안색이 변했다.

“네 아버지가 굳이 너를 고가에 보내려고 할 때도 나는…….”

탕 삼내내는 모친의 말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럼 어머니 말씀은……. 어머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섯째를 궁에 보낼 수 없어요. 궁이 뭐가 좋은 곳이라고. 게다가 황상은 거의 쉰이에요. 얼마나 오래 살지도 모르는데. 멀쩡한 아이를…….”

“네 시어머니는 너를 보냈다만, 네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더냐?”

상 대내내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그녀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닐 듯했다.

“아직은 모르시더라도 곧 알게 되겠지요.”

아버지를 떠올린 탕 삼내내는 씁쓸해졌다. 부친과 조부의 가장 큰 바람은 탕가를 한층 더 끌어올리는 일이었다. 사내의 벼슬길이 글렀으니 여식을 관리 집안과 혼인시키려 했다.

“진정해라. 궁이 어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더냐.”

상 대내내는 혼란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을 애써 누르며 딸의 손을 토닥였다. 딸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말이기도 했다.

탕 삼내내도 그런 건 잘 모른다.

“그걸 어찌 알겠어요. 십여 년 동안 궁에 그런 일이 있었어야지요. 사람을 어떻게 고르는지 어떻게 알아요. 시어머니는 그저 궁에서 사람을 고른다고, 어머니 의중을 물어보라고 하시고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진정하자. 기다려봐라. 생각 좀 하자. 어미 생각엔 궁에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가는 곳이 아닐 듯하다. 이러자. 넌 일단 돌아가라. 가서 네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다고 해라. 네 아버지가 돌아와서 결정할 일이라고 해. 나도 사람을 보내서 말을 전하마. 지금 바로 수소문해 봐야겠다.”

상 대내내는 지나치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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