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새로운 주 귀비
조 노부인은 피로한 표정으로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화항에 누워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예를 갖춘 화 부인은 조 노부인의 안색을 살피며 몸을 틀고 화항 자락에 앉았다. 그녀는 꼼지락꼼지락 다가가서 조 노부인의 다리를 주무르며 웃음 지으며 말을 꺼냈다.
“어머님, 마마께서 규수 이야기를 꺼내서 생각난 건데요. 돌아오는 내내 고민했답니다. 소육과 팔저아 모두 나이가 찼어요. 전에 점 찍은 집안들은 이제 조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연말연시에 매파가 또 여러 좋은 혼처를 들고 왔지 뭐예요. 괜찮은 집안이 있어서 어머님과 상의하려고요.”
화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시녀의 기별이 들리더니 오 부인이 발걸음도 가볍게 들어왔다. 오 부인은 화 부인을 힐끔 보고는 모호하게 운을 뗐다.
“어머님, 황후마마가 하신 말씀으로 어머님과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느냐?”
조 노부인이 눈을 번쩍 뜨고 바라보며 묻자, 오 부인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상의하려고 왔습니다.”
“어머님…….”
화 부인은 다급해졌다. 자기가 먼저 왔는데.
“사소한 일 아니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돌아가라.”
조 노부인이 분부하자 화 부인은 화가 나더라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오 부인은 아까 화 부인이 앉은 자리에 앉고는 하가 십일낭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님, 하가에 변변한 사람이라곤 하 대야뿐이랍니다. 십일낭이 정말 총애를 얻으려면 수국공부 없이는 안 됩니다. 게다가 태자 전하도 있잖습니까. 십일낭을 입궁시키는 건 태자 전하를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음.”
조 노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참 생각하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하씨다. 우리 주씨 가문에서도 골라 봐라. 주씨냐 하씨냐는 천지 차이다.”
“어머님 말씀이 옳으세요. 바로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오 부인은 재빨리 대답했다. 그녀는 시어머니인 조 노부인을 노련하게 상대했다. 대답은 반드시 깔끔하고 재빠르게, 그 후로 어떻게 하는지는 모두 그녀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화 부인은 울분이 가득해서 돌아갔다. 영 황후가 사람을 고르는 건 큰일이고, 육가아와 팔저아의 혼사는 큰일이 아니란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육가아와 팔저아의 혼사보다 큰일이 없었다.
화 부인은 가다 말고 돌아서서 바깥 서재로 향했다. 주 추밀부사가 저택에 있었다. 어머님이 관여할 겨를이 없다고 하니 남편을 만나 상의해야 했다. 남편과 상의를 마치면 어머님 쪽엔 통보만 하면 그만이었다.
막료들과 함께 황상이 후궁을 채우는 일을 논의하던 주 추밀부사에게 화 부인이 급한 볼일로 찾는다는 기별이 들어갔다. 화 부인이 막 궁에서 돌아온 걸 생각하고는 후다닥 나가서 화 부인이 주절주절하는 말을 듣는데, 육가아와 팔저아의 혼사 이야기인 걸 알고는 순간 얼굴이 차가워졌다.
“중요한 일이 가득하오! 이런 잔소리를 들을 겨를이 어디 있어! 이런 일은 어머님과 상의하시오!”
“어머……!”
화 부인이 뭐라고 더 설명하기도 전에 주 추밀부사가 벌써 돌아섰다.
화 부인은 결국 분통을 터트리며 거처로 돌아갔다. 화항에 앉아 있으니 속이 답답해서 한숨만 나왔다. 심복인 배가 어멈 홍씨가 모든 시녀를 물리고 차를 내려주면서 나지막이 타일렀다.
“부인, 제가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진작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저택은 다들 큰일만 생각하느라 진짜 중요한 일은 안중에도 없어요. 가아와 저아의 혼사는 부인이 알아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부인에겐 아들 하나 딸 하나뿐인걸요.”
“휴. 내가 식견이 없어서 그러지. 몇십 년 살면서 안살림도 맡은 적 없는걸. 자네도 알지 않나. 얼마 전에 날 찾아와서 가법을 묻는데도 대답할 말이 없었네. 식견 없이 사람을 잘못 골라 육가아와 팔저아를 다치게 할까 봐 그러지.”
화 부인이 기운 없이 말했다.
“부인, 스스로 하찮게 여기면 안 됩니다. 부인, 제가 한 말씀 드리는데, 제가 어릴 때부터 부인을 모셔서 부인을 끼고도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며느리, 사위 고르는 덴 부인이 다른 사람보다 낫습니다. 며느리, 사위 고르는 게 조정에서 하는 큰일도 아니고, 어느 집에 누가 좋은 사람인지 고르는 것 아닙니까. 그쪽으론 부인의 안목이 정확합니다.”
홍 어멈은 정말로 자기네 부인의 안목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안목이 있고 식견 있다고 해도 신경 써서 잘 보고 골라야 합니다. 부인, 보세요. 우리 집안은 노부인부터……. 제가 노부인이 어떻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노부인은 큰일을 고려하시니까요. 노부인부터 하나같이 큰일만 고려하시지요. 부인처럼 이렇게 세세히 고르고 생각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안목, 식견이 좋아도 자세히 고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그건 그렇지.”
화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육가아의 나이가 어리지 않습니다. 우리 같은 집안은 선부터 시작해서 영친까지, 아무리 그래도 반년, 1년은 걸립니다. 육가아가 처를 들여야 팔낭자도 혼인하지요. 부인, 보세요. 1년, 2년 걸리는 일을 신경 쓸 사람이 우리 저택에 어디 있습니까? 그냥 부인이 알아서 하고 알아서 결정하세요.”
홍 어멈은 이 저택 위아래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큰일을 떠올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화 부인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됐다. 육가아와 팔저아의 혼사는 내가 내 안목을 믿고 알아서 정하자.
계부로 돌아온 백 노부인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부했다.
“노야가 있는지 가 보고 오너라. 있으면 모시고 오고.”
계 천관이 금세 도착하자 백 노부인은 화항에 누워서 시녀와 어멈을 물리고 영 황후가 한 말을 전했다.
“영가에 쭉정이는 나지 않는다. 네 아버지가 자주 하신 말씀이다.”
백 노부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예전에 바로 그 말 때문에 영씨 가문이 부러웠다. 계가엔 쭉정이는 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계 노승상이 종종 말했었다. 계 노승상을 떠올린 백 노부인은 마음이 씁쓸해졌다. 그래도 눈물이 고이진 않았다.
“그 이야기는 됐다. 예전엔 영가 아들 중에 쭉정이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영가의 여식도 쭉정이가 아닌 것 같구나. 주 귀비가 있었을 때 황상이 어땠느냐. 영씨도 기회가 없는 걸 알고 있었겠지. 영씨는 네 누이보다 영리하고 네 누이보다 운이 좋다. 보렴. 돌아오자마자, 휴, 양빈부터 비로 올렸다. 태자 같은 성격에, 진왕을 앞으로 가만히 두겠느냐. 앞으로 진왕이 고달파질 것이다. 그럼 너도 고달파지겠지. 미인을 골라 후궁을 채우면 앞으로 궁에 바람 잘 날이 있겠느냐? 궁과 조정은 한 몸이다. 영 황후가 미인을 후궁에 넣는 수를 던졌다. 그 수, 너는 받겠느냐 말겠느냐.”
계 천관의 눈빛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양빈이 사양하지 않았습니까?”
“사양? 좋아서 넋이 나갔더라. 출신이 있지 않으냐. 조금 영리하긴 해도 거기까지다. 안중에 장공주도 없는걸.”
백 노부인은 양빈이 장공주를 안중에 두지 않는 걸 떠올리면 한숨도 나지 않았다. 장공주가 이런 사소한 일을 거들떠보지 않고 양빈 같은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아서 다행이지, 장공주가 조금이라도 쩨쩨한 사람이었으면 양빈은 진작 죽은 목숨이었다. 목숨 줄을 틀어 쥐이고도 전혀 눈치도 채지 못했다.
“궁에서 나오면서 내내 생각했다. 네가 너무 빨리 결정했다. 하지만 결정한 이상 앞으로 나가야지, 생각이 많으면 안 된다. 단 하나, 영가아 일에 관여하지 말아라. 내 보기에 그 아이는 네 생각과 다르다. 내버려 두어라. 그리고 영가아의 혼처를 잘 골라서 정해야겠다. 어릴 때부터 어미가 없었으니, 그 일에 넌 관여하지 말아라. 손자며느리는 내가 고르마. 넌 네가 할 일이나 해라. 앞으로 나는 네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너도 영가아의 일에 관여하지 말아라. 우리 조손 세 사람, 각자의 길을 걷자.”
“예.”
계 천관은 목이 꽉 멨다. 누이가 당시 황자였던 황상과 혼인한 이래 계가는 갈수록 벼랑 끝으로 몰렸다.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그가 진왕 편에 선 이유도 바로 하루하루 벼랑 끝에 선 듯한 이 느낌 때문 아닌가. 차라리 한 발짝 내디디고 싶었다. 죽든 살든, 매일매일 조마조마 걱정하고 밤낮없이 불안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대사가 끝나고 새 조정이 세워진 후 자기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그저 어머니와 제 아들이 그 후로 편안하게 살기만 바랐다. 마음 놓고 봄엔 꽃구경, 가을엔 달구경 하는 나날이 오기만 바랐다.
묵 승상부가 한가한 시기는 1년에 연말연시 며칠뿐이었다.
전 노부인의 마차가 중문 앞에 서자, 묵 승상이 묵록색 비단 장포를 입고 문간방에서 나와 전 노부인을 부축했다.
“당신이 왜 여기 계십니까.”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렸지. 피곤하지 않소?”
묵 승상은 전 노부인을 부축하고는 뒷짐 진 채 그녀와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다.
“황후마마께서 배려해 주셔서 피곤하진 않아요. 소칠과 여섯째의 혼사를 서둘러야겠습니다.”
전 노부인은 묵 승상과 이야기 나누며 느긋하게 정원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소?”
묵 승상이 다정하게 물었다. 전 노부인은 양빈이 비로 봉작이 오른 일과 영 황후가 후궁에 사람을 들이는 일을 말했다.
“이렇게 규수를 고르면 또 얼마나 많은 이가 망상을 품을까요. 4, 5년 동안 바람 잘 날이 없을 것 같습니다.”
“황상이 마흔대여섯, 아직 정정하니 아무리 그래도 후궁을 비워둘 수는 없지. 나도 생각한 일이오. 황후마마께서 거론하지 않았더라도 조만간……. 어쩌면 내일 바로 누가 상주 올렸을지도 모르지.”
묵 승상의 차분한 목소리가 은근히 작아졌다. 수상이지만 그 나이가 된 이상 아무리 현명하고 사리에 밝아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변고와 혼란엔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다.
전 노부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요. 소칠과 여섯째의 혼사를 어서 정해야겠어요. 소칠은 어리석긴 해도 심하진 않고 말을 잘 들어서 괜찮지만, 소칠의 혼사를 정해야 여섯째의 혼사를 정하지요. 여섯째부터 정할 순 없어요.”
“영 황후도 영리한 사람이라 여섯째에게 손을 쓰진 않을 거요.”
전 노부인의 말에 묵 승상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규수를 고른다면 여섯째의 나이가 지금 딱 적당했다.
전 노부인이 나직이 말했다.
“장공주도 있는걸요. 계 천관, 고 사사. 또 누가 있을지 어찌합니다. 온 조정 사람이 노야를 그 국면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할 겁니다.”
한참 만에 묵 승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자식들에까지 화가 미치는구려.”
“복을 누리는 만큼 화가 미치는 것도 당연하지요.”
전 노부인은 묵 승상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원으로 들어갔다.
저택으로 돌아간 원 부인은 마음이 붕 뜬 채 차를 마시다가 아들이 돌아왔다는 기별에 얼른 불러들였다.
여염이 들어가서 예를 올리고 허리를 세우기도 전에 원 부인이 방 안 가득한 시녀, 어멈을 물리고 곁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지금 내가 하는 말, 어서 할아버님께 전해야 한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걱정스러운 가운데 은근히 들떠 보이는 모친을 여염은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오칠례에 참석했다가 돌아오셔서 이게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나?
“오늘 궁에서 영 황후께서 양빈 마마를 비로 올린다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이미 정해진 일인 듯싶더구나. 성지만 남았다.”
원 부인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황후마마시다. 기세 좀 보렴. 양빈 마마도 드디어 고생이 끝났구나.”
여염은 눈살을 찌푸렸다. 고생이 끝난 게 아니라 불 위에 올라 구워지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