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큰 구경거리
양빈은 소심에게 차를 건네받아 영 황후에게 바쳤다. 영 황후는 차를 받고 살짝 허리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
“양빈도 앉게.”
“아닙니다. 소인이 어찌.”
양빈은 줄곧 허리를 숙인 채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반걸음 물러나서 태자비 정씨에게 차를 올리려 했다.
“자네는 삼가아의 생모일세. 고귀한 신분이야. 그렇게 자세를 낮추면 안 되네.”
양빈이 차를 올리기 전에 영 황후가 말했다. 태자비도 영 황후의 말에 따라 허리를 숙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양빈 마마는 윗전이세요. 고생하셨는데 얼른 앉으세요, 마마.”
영 황후는 고개를 돌려 웃으며 조 노부인을 바라봤다.
“노부인도 아시겠지만, 주 귀비 생전에도 양빈의 진봉(進封)을 논의했답니다. 삼가아의 생모니까요.”
그러면서 모두를 둘러보며 웃어 보였다.
“며칠 전에 황상께서 양빈을 비로 올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전교가 내려올 겁니다.”
태자비는 얼떨떨해졌다. 비로 올린다고? 하긴, 올려줄 때가 되긴 했지.
조 노부인은 우느라 어질해서 머리가 그다지 맑지 않았지만 양빈을 비로 올린다는 말에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렸다. 양빈이 비가 돼? 황상의 생각인가, 아니면 영 황후의 생각인가.
조 노부인 뒤에 서 있던 수국공 부인 오씨는 허리를 숙여 차 시중을 들다가 영 황후의 말에 손을 떨었다. 찻물이 그녀와 조 노부인의 손에 쏟아지자 주육의 모친 화 부인이 얼른 잔을 받고는 손수건을 오 부인에게 건넸다. 화 부인은 영 황후의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주가에 들어온 지 몇십 년 동안 사방의 땅에나 관심 가졌지, 저택 일에도 관심 없었으니 조정 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양빈은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마음으로 소심에게 이끌려 영 황후 아랫자리에 앉았다. 상반신을 꼿꼿이 세우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서서히 힘을 풀었다. 눈물이 고였다.
막 차를 머금던 백 노부인은 티 나지 않게 멈칫하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서 추태를 보이기 직전인 양빈을 힐끔 보다가 영 황후가 아니라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복안 장공주는 속세를 떠난 고수처럼 만사에 신경 쓰지 않는 모습으로 눈을 내리깔고 열심히 차만 마셨다.
전 노부인은 양빈을 훑어보고는 미소와 눈빛 모두 흠잡을 수 없이 단정한 영 황후를 잠시 바라본 후에야 복안 장공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분 모두 이렇게 담담하다니. 손발이 척척 맞는군.
묵 부인은 얼떨떨해하다가 금세 모친 전 노부인을 바라봤다. 열심히 바라봐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려고 눈동자를 굴리려다가 얼른 거두고 조용히 차를 마셨다.
여염 모친 원 부인은 줄곧 영 황후를 살피고 있다가 영 황후의 말에 가장 먼저 일어서서 양빈을 향해 무릎을 구부리며 축하했다.
“정말 큰 경사로군요! 양빈 마마, 경하드립니다. 황후마마의 몸이 좋아지니 모두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네요.”
원 부인의 말에 깨달은 양빈은 벌떡 일어나서 고꾸라지듯 절을 올렸다.
“모두 마마의 은덕입니다.”
“어서 일으켜라. 모두 황상의 은덕이네. 그리고 삼가아도. 삼가아가 갈수록 훌륭해지더군. 어미는 자식 덕을 본다고, 마땅히 누려야 할 복일세.”
영 황후가 목소리를 내자마자 소심이 성큼 다가가 양빈을 일으켰다. 소심이 손을 내밀자 양빈은 더는 무릎을 꿇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예부상서 해유덕 부인 손씨가 활짝 웃었다.
“그렇지요. 진왕야가 갈수록 출중해집니다. 양빈 마마, 앞으로 큰 복을 누리시겠습니다.”
묵 부인은 모친 전 노부인을 힐끔 보고는 일어서서 축하했다.
복안 장공주는 차를 들어 머금고 모두를 훑어보았다.
큰 구경거리가 시작되었군.
줄줄이 이어진 떠들썩한 축하 인사가 끝난 후, 영 황후가 계속해서 웃으며 말했다.
“양빈은 성품이 소박하지요. 떠들썩한 걸 싫어하는 사람을 뽑으라면 양빈이 최고일 겁니다. 하지만 이건 큰 경사이니 떠들썩하게 축하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아니면 황상께서도 나무라실 겁니다. 이 경사를 내가 맡았어요. 내일 성지가 내려오면 내가 양빈 대신 모두를 궁으로 초대하겠어요. 다 같이 떠들썩하게 보냅시다.”
“다 참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축하해야 할 일이지요!”
원 부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묵 부인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요. 큰 경사니까요.”
“다들 알다시피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십여 년 동안 정양했어요. 몸은 좀 좋아졌지만 역시 기력이 없습니다. 양빈의 큰 경사를 소홀할 수 없으니 장공주께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영 황후가 복안 장공주를 향해 살짝 몸을 수그렸다.
복안 장공주가 양빈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큰일은 무슨요. 이런 사소한 일을 마마께서 못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는 일개 출가인입니다. 떠들썩한 구경하러 왔을 뿐이지, 사람이 필요하면 며느리가 있지 않습니까.”
복안 장공주가 며느리라고 말하면서 눈길은 주지 않자 태자비가 주저하다가 일어서서 예를 갖췄다.
“마마께서 타박하지만 않으신다면요.”
백 노부인은 복안 장공주를 빤히 바라봤고 전 노부인은 웃으며 차를 마셨다. 원 부인은 놀란 듯이 장공주와 영 황후를 번갈아 봤다.
영 황후가 살며시 숨을 내쉬었다.
“정씨도 있고 장공주도 봐준다면 분명 완벽하게 할 수 있겠지요.”
묵 부인은 머리가 어질거렸다. 모친을 보고 또 보고, 보다가 웃어 보이고. 행여 실수라도 할까 봐 잠시도 모친에게 눈을 떼지 않고 따라 했다.
“그때 다들 집안의 낭자들도 데리고 오세요. 주 귀비가 떠나고 나니 궁에 나와 양빈뿐이어서 실로 쓸쓸합니다. 나와 양빈은 괜찮아요. 외롭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황상은 안쓰러울 정도로 외로우십니다.”
영 황후의 말은 모호하면서도 매우 명확했다.
조 노부인은 멈칫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이 흘렀다. 마마가 떠나자마자 황상이 새 사람을 고르려 하다니, 앞으로는 새 사람의 웃음소리만 듣겠지.
휴. 마마, 잘 떠나셨습니다. 오칠일도 지났으니 이제 멀리 가셨겠지요. 안 보이니 됐습니다.
조 노부인 뒤에 서 있던 오 부인은 잔을 꼭 움켜쥔 채 잠깐 사이에 갖가지 생각을 했다. 집안에 나이가 적당한 아이가……. 친척 가문엔…….
화 부인은 이번엔 느낌이 좀 왔다. 궁에 새 사람을 들인다고?
백 노부인은 이번엔 아무도 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못 들은 듯이 담담하게 차를 마셨다.
전 노부인은 눈을 내리깔고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십여 년 동안 조용하던 후궁과 조정이 더는 조용하지 못하겠구나.
묵 부인은 얼이 빠졌다. 아무리 그래도 영 황후의 말 뒤의 속뜻, 그리고 이런 때에 후궁에 새 사람을 들인다는 의미 정도는 확실히 알아들었다.
태자비 정씨는 넋이 나갔다. 황상이 새 사람을 들이신다?
마차에서 내린 수국공 부인 오씨는 조 노부인을 정원으로 모시고 다급하게 거처로 돌아가서 문 안으로 걸음을 내디디려다가 다시 거뒀다.
“대내내는 어떠냐? 좋아졌느냐?”
“좋아졌다고는 합니다.”
마중 나온 어멈과 시녀가 얼른 대답했다. 오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하 부인 거처로 직행했다.
대황자가 모친을 시해하고 위리안치됐다는 소문이 퍼진 후, 하 부인은 쓰러졌다. 그녀가 쓰러졌을 뿐만 아니라 하 부인의 오라비 하종수도 몸져누웠다. 하종수는 누이보다 더 심했고 섣달그믐과 초하루엔 곧 숨이 넘어갈 거 같아서 후사까지 준비했었다.
주 귀비의 관을 성 밖 사찰에 의탁하고 황상이 줄줄이 상을 내리는 가운데, 수국공부 장방과 세자 주유해와 세자 부인 하씨를 벌한다는 소식이 떨어지지 않자 하 부인의 병은 재빠르게 회복했다. 하종수도 하루하루 회복했고 온 하가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총총 수화문에 도착한 오 부인은 시녀의 부축을 받고 마중 나온 하씨를 보자마자 멀리서 손짓했다.
“바람 쐬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 이 아이도 참. 이런 게 효가 아니다.”
하 부인은 대황자가 위리안치되기 전과 비슷하게 다정한 시어머니의 말투에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크게 안도했다.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한 발은 문턱 안에, 다른 발은 문턱 밖에 걸치고 오 부인이 안으로 들어온 후에야 발을 거두고 공손히 그녀를 맞이했다.
“몸은 좀 좋아졌고?”
오 부인이 조금 다급하고도 진심이 느껴지는 말투로 물었다.
“좋아졌어요.”
하 부인은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오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분명 그녀에게 맡길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어려운 일을 맡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일을 맡기지 않을까 봐 더 두려웠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큰일이지!”
오 부인은 두 눈을 빛내며 바짝 다가가서 목소리를 낮추고 영 황후가 후궁에 사람을 들인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오면서 내내 생각했다. 우리 가문엔 나이가 적당한 규수는 사방 여덟째밖에 없다. 오는 내내 궁리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덟째가 입궁한들 우리에겐 좋을 게 하나 없다. 좋은 일은 모두 사방 차지지. 사방은 이미 충분하다!”
“어머님 말씀이 옳아요.”
하 부인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뜻과 딱 맞았다.
“하지만 사방 팔낭자 말고 적당한 사람이 없잖아요. 대저아는 어리고.”
“우리 가문엔 없지만, 너희 집 십일이 있지 않으냐. 마마와 닮기도 했고, 성격도 좋고 영리하고!”
오는 내내 궁리한 오 부인은 진작 셈을 해두었다.
“어머님, 기억하세요? 전에 십일이 저와 한 번 입궁했다가 등불 아래 황상께서 착각하셨지요. 젊을 때 마마를 본 줄 알았다고 하셨잖아요.”
하 부인의 두 눈이 빛났다. 친정에 주 귀비 같은 사람이 나온다면 자신은 앞으로도 수국공부에서 활개 치고 살 수 있다.
“나도 그 생각을 한 것이다.”
오 부인도 당연히 아는 일이었다. 황상의 그 한마디 때문에 하가 낭자는 다시 입궁하지 못했다.
“몸이 좀 나으면 친정에 다녀오너라. 오라비, 그리고 모친과 상의해서 얼른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입 단속해라. 아무도 몰라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바로 다녀올게요.”
하 부인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직 아픈 몸이라는 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서둘러 시녀를 불러 소세 단장하고 옷을 갈아입고 마차를 불러 친정으로 향했다.
오 부인은 잠시 주저하다가 조 노부인의 정원으로 달려갔다.
주 추밀부사 부인, 주육의 모친 화씨는 거처 밖의 일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고 영 황후가 황제를 위해 미인을 골라 후궁에 들인다는 말은 귓등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듣긴 들었다. 듣긴 했지만, 주가에서 귀비가 하나 더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나쁜 일이 아니라서 자신은 아들과 딸의 혼사 문제를 먼저 생각했다.
사방에 작위가 곧 봉해질 것이고 육가아가 세자가 된다. 작위가 있으니 전에 넘볼 수 없던 혼처도 지금은 내려다보게 되었다. 점찍어 두었던 혼처도 이젠 눈에 차지 않게 되어서 다시 골라야 했다. 어렵게 고르고 고른 혼처지만…….
그리고 팔저아, 여식의 혼인은 며느리를 구하는 것보다 더 마음 쓰였다. 점찍어 두었던 혼처 역시 눈에 차지 않게 되어 다시 골라야 했다. 요 며칠 매파가 거론한 집안 중에 괜찮은 집이 몇 군데 있었다. 다 괜찮은 집안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새해가 됐는데, 얼른 어머님과 상의해야 할 것 같았다.
화 부인은 아들과 딸을 위해 점찍은 몇 가문을 이리 재고 또 저리 재고, 몇 번이나 재다가 거처로 돌아가서 또다시 잰 후에 조 노부인을 찾아갔다. 질질 끌 일이 아니었다. 아들 나이가 있고, 딸도 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