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훼방 전문가
계소영의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향했다. 은백색 두봉에 수 놓인 은실 편복(蝙蝠: 박쥐)에서 올라가 두봉 끈 위의 선이 고운 턱까지 보고는 더는 올려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시 조금씩 내리깔았다.
거리 끝까지 걸어가자, 들어올 때마다 해도 꽤 비어있던 공터에는 벌써 잡기를 부리는 사람, 갖가지 작은 물건을 파는 사람들로 매우 떠들썩했다.
“가서 볼까?”
이신이 묻자 이동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떠들썩한 구경을 하는 게 몇 년 만이더라.
양쪽에 등불이 달린 환한 거리에서 벗어나 그늘 속으로 들어서자, 계소영은 묘하게 안도하면서 이신을 사이에 두고 이동의 미소와 반짝이는 두 눈을 대담하게 바라봤다. 하늘 가득 불꽃이 터지는 듯이 밝은 눈빛이었다.
“이 형, 계 형!”
영원이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양손으로 이신과 계소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참 우연이군. 자네들도 구경하러 왔는가? 문회하지 않고?”
이신은 괜찮은데 계소영은 영원의 손길에 어깨가 훅 내려갔다.
“긴장할 때가 있으면 풀어줄 때도 있어야지. 문회만 할 수 있나.”
계소영이 불퉁스럽게 대답했다.
“맞는 말이지!”
영원은 두 사람을 밀치며 중간을 비집고 들어가서는 이동을 향해 공수했다.
“이 낭자도 왔군요. 혼자 구경하느라 따분했는데, 마침 잘 됐습니다. 함께 합시다!”
그러면서 한 발짝 옮겨 이동의 옆으로 가서 앞을 가리켰다.
“저 앞이 떠들썩하던데. 떠들썩한 쪽을 찾아다닙시다!”
“칠야, 정말 흥취가 고아하군.”
계소영이 더 불퉁스럽게 말했다. 어쩌다가 이놈을 만났을까. 연지 냄새나는 홍루에나 갈 것이지. 여기엔 왜? 왔으면 온 거지, 또 하필 우리를 마주치다니. 정말 운도 없지!
“흥취는 무슨. 계 공자와 비교할 수 있나.”
영원이 곧바로 한마디 받았다.
이신이 계소영을 슬쩍 꼬집었다. 계소영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영원 같은 무뢰배는 멀리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느긋하고 조용하게 거닐던 세 사람은 영원 하나 늘었다고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이 낭자, 뭘 좋아합니까? 투호? 활쏘기? 솔교(摔跤: 중국식 레슬링)? 저쪽에 맨손으로 벽돌을 깨는 사람도 있더군!”
영원은 시력이 상당히 좋았다.
계소영은 어이없이 영원을 삐딱하게 바라봤고, 이동은 얼굴색은 변하지 않고 못 들은 체했다. 이신은 풉 웃음을 터트렸다.
“누이가 영 칠야의 기대를 저버려야 할 것 같군요.”
“이 낭자, 마음에 들면 내가 대신 상을 얻어오지. 이 집 것 어떻습니까?”
영원이 저 앞에 활쏘기로 상을 내건 점포를 가리켰다.
“이 낭자, 어느 게 마음에 듭니까? 말만 해요. 이 형, 계 형도 체면 차리지 말고 말만 하고.”
영원은 손이 근질근질한 듯 성큼성큼 점포 앞으로 걸어갔다.
“영 칠야의 솜씨로 이 상을 노린다니, 주먹으로 세 살 아이를 때리고 발로 팔십 노인을 걷어차는 거랑 뭐가 다른가요?”
이동이 거침없이 묻자 계소영은 웃음을 터트렸고 이신은 재빨리 영원을 바라봤다. 영원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머쓱한 얼굴로 멈칫하다가 이동을 돌아봤다.
“그럼 대영에게 화살 몇 발 쏘라고 하죠.”
“그건 주먹으로 네 살 아이를 때리고 발로 칠십 노인을 걷어차는 거예요.”
이동의 말에 이신은 헛웃음을 짓고 있는 영원을 바라보다가 다시 이동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시선을 서서히 돌리고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저 옆에 뭐가 재미있는지 모를 곳을 바라보다가 발을 슬쩍 옮겨서 이동 앞을 가리고 섰다.
계소영은 웃느라 목소리가 다 변했다. 이 낭자, 정말 날카롭군. 영 칠야, 성격은 그런 대로 괜찮은 것 같군.
주변이 갈수록 떠들썩해지자 이신은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이동을 보호했다. 영원은 인파에 이리저리 밀리다가 아예 이동 앞으로 성큼 나가서 걸었다. 계소영은 밀려서 이신과 이동의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일행은 걸으면서 이곳저곳을 구경했고 영원은 상 이야기는 더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뭘 보든 신기해하며 이신과 이동과 함께 고개를 내밀고 구경했다.
큰 나무 아래 이르자, 사람들이 보통 바둑판보다 훨씬 큰 바둑판을 에워싸고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긴 게 보였다. 바둑판 뒤로는 백발노인이 다리를 틀고 방석 위에 앉아서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 거의 고수가 틀림없었다.
영원이 먼저 다가가 힐끔 봤고 이신도 머리를 내밀었다. 이동과 계소영도 다가갔다.
이동은 바둑을 둘 줄 몰랐고, 이신은 조금 나은 정도라서 둘 줄 알지만 풋내기였다. 영원의 수준이 어떤지 몰라도 눈살을 찌푸리고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판은 풀지 못하는 듯했다.
계소영이 슬쩍 지켜보다가 빙긋이 웃고는 허리를 숙이고 손을 내미는데, 영원이 손을 덥석 잡았다.
“계 형, 계 형 솜씨로 이 판을 푸는 건 주먹으로 세 살 아이를 때리고 다리로 팔십 노인을 걷어차는 것 아닌가. 저 노익장을 좀 보게. 팔십은 아니더라도 칠십은 되었겠어. 그래도 하려고?”
계소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뜬금없이 그 소리는 또 왜!
이신은 웃으며 두 사람을 밖으로 밀었고 이동은 이마를 짚었다.
이동이 한 말이 있으니, 무술 실력이 뛰어나서 나설 수 없게 된 영원은 자기가 상을 얻지 못하니 계소영도 상을 얻지 못하게 방해했다. 이동은 문무 모두 소질이 없었고 이신은 나서지 않았다. 네 사람은 한 바퀴 구경하고도 상은 하나도 얻지 못했다.
“저 앞 다관에 가서 좀 쉬세.”
이신은 이동이 지쳤을 거란 생각에 저 앞의 다관을 가리키며 제안했다. 영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계소영도 반대하지 않았다. 다관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칠 형님! 영칠 형님!”
영원을 제외한 세 사람은 화들짝 놀랐지만, 영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부터 날아갔다.
“고함은 왜 질러! 사람들 놀란 것 안 보이냐!”
“형님이 못 들을까 봐 그랬지.”
묵칠이 재빨리 손을 들고 머리를 감쌌다.
계소영, 이신과 이동은 후다닥 달려오는 묵칠과 그 뒤를 대범하게 따라오는 여인을 돌아봤다.
“내 누이, 여섯째다. 누이, 이분이 바로 영 칠야다!”
안중에 영원밖에 없는 묵칠은 영원을 누이에게 소개하고 반사적으로 가슴을 활짝 폈다. 영원과 친형제고 누이와는 친 오누이가 아니란 듯이.
그런 제 오라비의 품행을 잘 아는 묵 육낭자는 영원을 향해 예를 갖췄다. 영원은 위아래로 묵 육낭자를 살폈다. 얼굴은 묵칠과 꽤 닮았고 진중하고 대범했다. 눈빛도 맑고 영리하게 빛났다. 묵 승상가에 멍청이는 묵칠 하나뿐이라더니, 정말 그런 듯했다.
“계 공자.”
영원과 인사를 나눈 묵 육낭자는 계소영을 향해서도 예를 갖췄다. 계가와 묵가, 집안끼리 교류해서 묵 육낭자는 어릴 때부터 계소영과 알고 지냈다. 계소영은 답례한 다음 묵 육낭자의 시선이 향한 이신과 이동을 소개했다.
이신은 조금 신중히 예를 갖췄다. 묵 육낭자의 대범한 시선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눈치 빠른 영원은 이신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얼굴을 돌려 눈썹을 까딱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들뜬 얼굴로 나불대는 묵칠을 보고 묵 육낭자를 보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동을 바라봤다.
묵칠과 누이 묵 육낭자도 구경하다 지쳐서 쉴 곳을 찾아온 것이었고 일행은 함께 다관으로 들어갔다. 이동과 함께 앉은 묵 육낭자는 수시로 이동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다가 주저하며 물었다.
“할머니가 종종 이 낭자라는 분 이야기를 하셨어요. 장공주와 수행하시는 분이라고. 언니인가요?”
“맞아요.”
이동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소문 속 수녕백부 이씨인지 알고 싶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묻는 건 당돌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높이 사주는 기분이었다.
“할머니가 자주 칭찬하세요. 오늘 만나보니 역시 명불허전이네요.”
묵 육낭자의 체면치레는 매우 진솔했다. 묵칠은 어느 부분을 들었는지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 누굴 칭찬해? 나는 왜 모르지?”
“네가 뭘 알겠냐.”
영원이 그를 잡아끌었다. 묵칠이 고개를 돌려 영원을 바라봤다.
“아는 게 많지. 어제 우리 연향루에서 나왔을 때, 형님도 취했지? 아라가 그러는데 같이 적잖게 마셨다던데…….”
“여기 네 누이도 있다. 무슨 헛소리냐!”
영원이 서둘러 묵칠의 말을 잘랐다. 콱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취하긴 뭘 취해. 됐다. 헛소리하지 말아라. 그런 일 없다. 흠, 차 맛이 이상한걸. 거기! 이리 와봐라. 소칠, 네 차도 보여 봐라. 이 차가 이상하다!”
묵 육낭자는 어리둥절해하는 묵칠을 노려보고는 차박사를 불러서 뭐가 어떻게 됐든 차가 이상하다고 진지하게 질타하는 영원을 바라봤다.
오라버니도 참. 나만 있으면 몰라도 이 낭자도 있는데. 어떻게 이 낭자 앞에서 연향루, 아라 타령이야!
이신은 담담한 얼굴로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차를 마시는 이동과, 틈을 타서 묵칠을 철썩 때린 영원을 번갈아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됐다. 물러가라.”
영원이 딴소리하는 틈을 타 계소영이 차박사에게 분부하자, 차박사는 큰 사면이라도 받은 듯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영 칠야는 연향루, 비연루의 차가 익숙할 텐데 이런 청차를 마시니 맛이 덜하겠지. 차가 안 좋아서가 아니라 앞에 미인이 없어서 그런 걸세.”
차박사를 풀어준 계소영이 분석하듯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지! 계 대랑, 말 한번 잘했네. 그리고 술은 아라의 손을 잡고 마셔야…….”
묵칠은 계소영의 말이 너무 옳다고 생각해서는 바로 입을 열다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영원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누이 앞에서도 이런 헛소리나 하고!”
“칠 형, 괜찮아. 내 누이는 보기만 해도 심란하게 쭈뼛쭈뼛하는 낭자가 아니야. 내 누이는……. 하! 이 낭자도 있었지. 정말 미안합니다. 실언했습니다.”
묵칠은 드디어 이 자리에 누이뿐만 아니라 이 낭자도 있음을 떠올렸다. 다만 영원은 이미 얼굴이 시퍼레졌다.
계소영은 다급하게 이동을 바라봤다가 웃느라 눈이 다 휜 그녀의 모습에 안도했다. 그래, 쭈뼛거리며 따지는 낭자가 아닌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
“오라버니!”
묵 육낭자의 얼굴은 영원보다 더 안 좋았다. 오라버니, 어쩜 이렇게 마음을 놓을 틈도 안 주냐고!
이동이 뭐라고 하려는데 이신이 더 빨리 입을 열었다.
“칠소야가 아무 뜻 없이 한 말 아닌가. 내 누이는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이 아니네.”
“칠소야가 솔직하고 꾸밈없는 사람이라는 말씀 진작 들었는데 과연 그렇네요.”
이동도 이신의 말에 이어 말하다가, ‘왜들 이러는 거냐’는 표정인 묵칠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과찬입니다, 과찬이야.”
묵칠은 이동에게 예의를 갖추고는 계속해서 제 칠 형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칠 형님, 이따 어디에 가서 놀 거지? 우리 와자에 가서 절자희(折子戱: 여러 막으로 구성된 전통극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부분만 따로 연기하는 극) 보러 가는 게 어때? 지난번에 내가 말한 그 배우, 정말 괜찮단 말이지. 그리고 거기는 인객(引客: 손님 끄는 사람, 바람잡이)까지 다들 끝내 줘. 무대에 올라오면 여기까지 벗어. 정말 대담하지. 내 누이도 보고 싶어서…….”
“보긴 뭘 봐!”
영원은 묵칠이 다시 환생하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누이를 데리고 나와서, 좋은 것을 보여주지 못할망정 절자희가 뭐냐. 다 늦게, 놀긴 뭘 놀아! 차 마시고 얼른 돌아가라!”
영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묵칠을 떼놓을 생각이었다.
“늦긴 했군. 우리도 돌아가자. 어머니 걱정하시겠다.”
이신이 이어서 말하자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소영은 멈칫했고 영원은 묵칠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군자의 복수는 내일도 늦지 않지!
차 한 잔 마시고 이신과 이동이 먼저 일어나서 인사했다. 영해가 벌써 대교를 불러 다관 입구에 마차를 불러두었다. 이동은 마차에 오르고 이신은 계소영들과 인사하고 걸어서 마차 곁을 따르며 이가 저택으로 돌아갔다.
영원은 하품 몇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늦었다. 나도 돌아가서 쉬어야겠다.”
“이렇게 이른데? 칠 형…….”
묵칠이 붙들고 늘어지자 영원이 손을 뿌리쳤다.
“모레가 귀비 마마 오칠일(五七日: 사람이 죽은 지 35일 동안, 35일째 되는 날)이다. 내일 또 분명 종일 바쁠 거다. 저녁엔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몰라. 난 너처럼 그럴 기운 없다. 간다. 계 공자, 또 보세.”
영원은 계소영에게 공수하고 돌아섰다. 묵 육낭자가 툴툴거리는 묵칠을 잡아당겼다.
“우리도 가요. 우리가 늦으면 할머니가 푹 쉬지 못해. 내일 귀비 마마 오칠일 준비로 할머니도 일찍 일어나셔야 해.”
묵칠도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계소영과 공수하고 자리를 떴다. 계소영은 느릿느릿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조금 망연한 듯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주변을 바라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좋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계소영은 한참 멍하니 있다가 느릿느릿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