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94화 (294/463)

294화: 우연

“응?”

배불리 먹고 찻잔을 들어 올리던 영원이 갑자기 놀라 소리쳤다.

“아까, 반년 만에 만났더니 소오가 자랐다고 했나? 낭자가 언제 소오를 만났지?”

이동은 하마터면 사레들 뻔했다. 반응 참 빠르십니다!

이동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었는지, 영원이 얼른 덧붙였다.

“밖에서는 안 그럽니다. 낭자와 이야기할 땐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아서 그래요. 낭자도 알다시피 한 달 동안 너무 지쳤잖아요. 언제 소오를 만났습니까? 그럼 누님은요?”

“오늘이요. 보록궁에 장공주를 만나러 갔다가 마침 오가아를 데리고 오신 마마를 뵀어요.”

이동은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두 사람…… 별일 없지요?”

“무슨 일이 있겠어요?”

영원이 조금 긴장한 듯 묻는 말에 이동이 영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스라…… 크흠, 장공주의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누님도 녹록하진 않고……. 장공주는 언제 보림암에 돌아가십니까?”

영원은 복안 장공주가 얼른 보림암 별원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듯 보였다. 이동은 영원의 기대하는 얼굴을 빤히 봤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으실 거예요. 내가 보기에 마마는 온화하고 유순하신 것이 성격이 나쁜 것 같지 않았어요. 게다가 경성에 들어왔는데, 성격이 안 좋아도 참으셔야 하지 않겠어요?”

“누님은 성격이 나쁜 게 아니라…….”

영원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큰형님 말이, 누님이 집 떠나 경성으로 내려왔을 때는 영가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을 품고 입궁한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몇 년 전에야 누님이 어쩔 수 없이 혼인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고, 형님의 그 말을 듣고 나서 반년 넘게 밤에 자주 악몽에서 깼다. 누님이 버티지 못하고 죽겠다고 결심할까 봐 두려웠다.

“나중엔 아마 오가아 때문에 변했을 겁니다. 어머니는 강하니까.”

영원은 하던 말을 계속하고는 다시 물었다.

“누님이 낭자를 난처하게 하진 않았습니까?”

“마마가 절 왜요?”

“하긴, 그럴 이유가 없지요.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습니까?”

영원은 떠오르는 대로 물었다.

“줄곧 오가아랑 이야기하느라고 마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못 들었어요.”

영 황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들은 건 맞다. 나중에 들었지만, 장공주가 전해 준 것이니 그녀가 들은 건 아니었다.

“누님을 궁으로 데리고 온 날 이후로 거의 누님과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없던 건 아니고, 두꺼운 휘장 하나 사이였을 뿐이라서 몇 번이나 몇 발짝 거리에 있었어요. 누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누님도 날 봤는데, 이야기할 생각 없는 얼굴이라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영원의 말에서 불평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누님이 무슨 생각인지……. 낭자는 알잖습니까. 내가 경성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황상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사람이 내가 누님과 소오 때문에 왔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게 맞지만. 누님을 만나러 가지 않냐고 황상께서 물으시는데, 어찌 갑니까? 지금은 어렵사리 누님과 소오를 데리고 나왔으니 더더욱 경거망동할 수 없어요. 그러다가 모든 게 수포가 되면? 휴!”

이동은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영원의 말을 차를 마시며 들었다.

“하지만 누님 쪽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정보가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나 걱정됩니까! 낭자, 우리 누님도 참 그렇지. 눈치 좀 주고 말 몇 마디 전해 주면 안 됩니까?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 언제 장공주를 뵈러 갑니까?”

“몰라요.”

갑작스럽게 방향을 틀어 묻는 영원의 말에, 이동은 얼떨떨해졌다.

“다음에 또 우리 누님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군. 혹시 다음에 누님을 만나면 나 대신 누님이 어떻게 지내는지 좀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안 돼요!”

이동이 단칼에 거절했다.

“안 된다고 할 줄 내 알았습니다. 그냥 물어본 거니까 마음에 담지 말아요.”

영원은 조금 김샌듯했다.

“저기, 내일 기회 보고 누님을 만나러 가 볼까요? 조만간 갑자기 누님과 소오를 별궁으로 보내라는 성지가 내려올까 봐 걱정입니다.”

이동은 아무런 말 없이 그를 흘겨봤다.

이런 말을 내게 해서 뭘 해. 이런 사람을 경성으로 보내 이렇게 큰일을 맡기다니. 정북후부, 간이 얼마나 큰 거야? 음, 이런 성격이라서 보냈을지도 모르겠네. 어리석은 척하는 건지 정말 어리석은 건지 잘 분간되지 않아. 이것도 일종의 경지겠지.

“다음에 장공주를 뵈러 갈 때, 한마디 해주면 안 됩니까? 마음이 안 놓여서 나도 가볼까 하는데.”

영원이 다시 묻자 이동이 다시 단호하게 안 된단다고 거절했다.

“그럴 줄 알았지! 알았습니다. 내가 알아서 방법을 생각하지요.”

“늦었어요. 이만 돌아가세요. 그리고, 여긴 경성이에요.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니면 자꾸 오지 마세요.”

영원이 툴툴거리든 말든 이동은 구석에 있는 모래시계를 힐끔 보고 일어났다.

“아직 이른데……. 예, 낭자가 늦었다면 늦은 거지요. 오늘이 바로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어서 쉬세요. 휴. 한 달 동안 어떻게 버틴 건지 모르겠네.”

영원은 양손으로 팔걸이를 지탱하고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고 아프다고 투덜거리다가 발을 구르며 겨우 일어났다.

“내일 방생하러 어디로 갑니까? 대상국사?”

영원이 일어서서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영상지요.”

이동이 대답했다.

수련이 벌써 말려둔 두봉을 건네자 영원이 걸치면서 연신 칭찬했다.

“당신 시녀들은 역시 최고라니까. 나 대신 닷 냥씩 상을 주어요.”

이동은 못 들은 체했고 수련은 휘장을 들어 올렸다. 이동은 영원이 나가는 걸 보고 곁채를 통해 돌아갔다.

밖으로 나간 영원은 느릿느릿 각문 앞으로 가서 등롱 불빛 아래 촘촘히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봤다. 두봉을 여미고 심호흡하고는 대뜸 빗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은 날이 개고 하늘이 맑게 빛났다. 점심 식사 후, 이동은 마차에 오르고 이신은 말을 타고 앞장서서 함께 영상지로 향했다.

예년에 이동과 장 태태가 영상지에 갈 땐 올해보다 적어도 한 시진은 늦게 출발했다. 하지만 올해는 주 귀비의 죽음으로 연등회가 열리지 않아서 영상지의 방생 의식도 예년보다 훨씬 앞당겨졌다.

올해 방생 법회가 일찍 시작했는데도 영상지 주변은 예년에 비해 조금도 썰렁하지 않았다.

영상지 주변에 가득 선 선남선녀가 경건하게 경을 외고 있었다.

이신은 이동 뒤를 막고 서서 청공 큰스님이 미리 골라둔 거북이와 붉은 잉어를 영상지에 방생하는 걸 지켜봤다. 붉은 잉어는 꼬리를 맹렬하게 흔들면서 물보라를 높이 일으키며 두려운 듯 헤엄쳐 갔고 거북이는 대뜸 깊이 곤두박질쳐 가라앉았다.

이신은 어이없는 듯 실소했다.

“이런 게 공덕이라고?”

“공덕은 저기 있어요.”

이동이 그들 맞은편의 주마등을 가리켰다. 주마등 아래 있는 승려들 주변에 사람이 잔뜩 몰려 있었다.

“이 방생 법회, 청공 큰스님이 일으킨 거래요. 무지 법사가 그러는데, 청공 큰스님이 흉년 때 배를 곯는 가난한 농사꾼을 가련히 여기고 매해 상원절에 여기서 방생하면서 성금을 모집해서 식량을 사서 농촌에 나눠 준대요.”

“그건 진정한 방생이로군. 무량 공덕이야.”

이신은 감탄하다가 영해가 주마등 쪽에서 쪼르르 달려오는 걸 보고는 웃으며 이동을 바라봤다.

“조금 더 돌아보다가 돌아갈까?”

“좋아요.”

이동은 마침 조금 들뜬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몇 년 만에 이 영상지에 오는 것이었다. 전생에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 해마다 어머니와 함께 방생 법회를 보고 시주했다. 나중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그녀도 다시는 찾지 않았다. 영상지 이 일대도 거의 오지 않았다.

영상지의 떠들썩하고 번화한 모습을 거의 잊었었다.

“올해도 이렇게 떠들썩한데, 예년에는 얼마나 떠들썩했을까.”

이신은 광채가 번쩍이고 인파가 바글바글한 주변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이신의 감탄을 들은 영해가 웃으며 말했다.

“대야, 예년에도 오늘보다 더 떠들썩하진 않았습니다. 비슷했어요.”

이신은 얼떨떨하다가 이내 웃었다. 이런 게 친척은 아직 비통함에 있는데 타인은 진작 노래하고 즐긴다는 것이겠지. 남 일 아닌가.

이동은 영상지 일대의 기억이 이미 흐릿해졌고 이신은 상원절의 영상지를 처음 보는 것이라, 오누이 두 사람은 뭘 봐도 신기해했다. 가다 서다 하고 물건 구경할 때가 걸을 때보다 많았다.

크고 작은 점포 입구에 각양각색 공들여 준비한 등롱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 등롱 아래 수수께끼 문제가 걸려 있고 맞추면 상이 있었다. 상련(上聯)이 걸린 등롱도 있었고 하련(下聯)을 맞춰도 상이 있었다. 보통은 등롱 하나에 하련이 여러 개 걸려 있어서 사람들이 수시로 몰려와 어느 하련이 가장 어울리는지 평가하곤 했다.

(※대련對聯의 앞 구절이 상련上聯, 뒤 구절이 하련下聯이다.)

춘시가 두어 달밖에 남지 않은 시기라 과거 응시하러 온 각지 서생이 경성에 도착했을 때이고 서생들도 삼삼오오 무리 지어 영상지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구경하고 있었다.

이동과 이신은 구경하면서 걷다가 신기하고 예쁜 등롱이 있으면 이동은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살폈고 이신은 뒷짐 진 채 뒤에 서서 빽빽이 오가는 행인을 막아 주었다. 이동이 구경을 마치고 나면, 하련이 많이 달린 등롱 혹은 하련이 하나도 없는 등롱이 보이면 이신이 걸음을 멈추고 세세히 품평했다. 이동도 곁에 서서 하련을 따라 읽어봤다.

한참 구경하다가, 두 사람은 다른 점포보다 훨씬 크고 하련이 족히 열에서 스무 개는 달린 등롱 앞에 섰다. 이신은 상련을 받아서 읽은 다음 이어서 하련을 읽었다.

계소영은 은백색 얇은 비단 장포를 입고 밖에 은백색 소주 여우털 두봉을 걸치고 두 사환을 거느린 채 빼곡한 인파 사이를 흐르듯 걸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계소영의 시선이 저 멀리 똑같이 은백색 옷을 입었는데 인파 속에 유난히 눈에 띄는 높고 낮은 두봉 둘을 발견하고 눈빛을 빛내며 허둥지둥 인파를 뚫고 빠르게 다가갔다.

두 사환은 멈칫하다가 후다닥 달려갔다. 하나는 앞에서 인파를 헤치고 하나는 뒤를 따랐다.

계소영은 움직일 때마다 은빛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두봉에만 시선을 두고는 다급히 달리느라 마음이 조급해 죽을 지경이었다. 두 두봉 옆에 달려갔을 때 어느새 땀이 촘촘히 흐르고 있었다.

“대랑?”

계소영이 조금 헐떡이며 부르자 이신이 황급히 뒤를 돌아봤고, 이동도 고개를 돌렸다. 이신을 바라보는 계소영의 곁눈에 이동의 미소가 똑똑히 보였다.

“멀리서 보니 눈에 익어서. 역시 대랑이었군. 자네 누이인가?”

계소영은 그렇게 묻고는 이신이 대답하기 전에 이동을 향해 공수하며 장읍했다. 고개를 들고는 다시 이동을 훑어보고는 또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이동이 웃으며 답례했다.

“자네 혼자인가? 여 대랑은 같이 오지 않았고?”

이신은 계소영을 힐끔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계소영은 이동이 바라보는 가운데 매우 부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냥 발길 가는 대로 걷던 중이라서. 영상지가 오늘도 이렇게 떠들썩할 줄 몰랐지.”

“그러게 말일세. 누이와 그 이야기를 하던 참일세. 태후께서 서거했을 땐 방생 법회가 끝난 후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던데.”

이신은 계소영에게 앞장서라고 손짓하고는 이야기하며 걸었다. 쉴 새 없이 이동 쪽을 살펴보면서 수시로 이동 앞으로 손을 내밀어 인파를 막았다. 사실 영해를 비롯한 종복들이 이미 막을 인파는 죄다 막았지만.

“황후마마가 황상께 전교를 받았다더군. 오늘 방생 법회에서 귀비 마마의 내세의 복을 빌도록 말이야. 올 가문은 거의 다 왔고 방생 법회가 끝나고 돌아간 집안도 있고.”

계소영은 이야기하면서 무심결에 이동을 힐끔거렸다. 마치 그저 이신의 시선을 따라서 보는 듯이.

“어쩐지.”

이신이 깨달은 듯 웃었다. 이동은 계소영의 말에 즉시 장공주를 떠올렸다. 장공주가 상원절을 맞은 영상지를 구경한 적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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