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93화 (293/463)

293화: 조금 감상적으로 되다

영원은 손을 휘두르며 실내를 칭찬했다.

“이 서재, 꽤 괜찮군요. 책이 꽤 많아.”

“음. 겉치레로 가져다 둔 거예요. 여긴 장방이에요. 앉으세요.”

이동은 대충 대답하고 앉으라고 손짓했다. 영원은 싱긋 웃으면서 앉았다.

“연말 그 일, 고맙습니다.”

“무슨 일이요? 마차요? 고맙긴요. 간단한 일이었어요.”

“그 마차 덕분에 살았어요. 칼이 안 들어갈 정도로 튼튼해서 다행이었어요. 아니었으면 골탕 먹었을걸. 하늘도 어둡고, 폭우도 내린 밤이어서.”

영원은 그날 상황을 떠올리고 뒤늦게 두려워졌다. 상대가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사전에 반마삭(絆馬索: 말이 넘어지도록 쳐둔 밧줄)을 쳐두고 화살을 쏘아댔다면 손실이 더 컸을 것이다.

어쩌면 소오, 혹은 누님이 다쳤을 수도 있고.

“위험했나요?”

이동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날 대영이 차를 돌려줬을 때 마차 안에 핏자국이 가득했다. 그리고 마차 주변에 깊고 옅은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와 어머니, 오라버니와 문 이야가 마차를 한참 둘러보다가, 어머니가 마차를 태워 버리라고 분부했다.

“그럭저럭.”

팔걸이의자에 앉은 영원의 몸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아주 편안해 보이지만 보기엔 그리 좋지 않은 모습으로 의자에 널브러졌다.

“너무 어두웠고, 비가 너무 많이 왔어요. 방심도 좀 했고. 처음엔 조금 골탕 먹었죠. 상대편엔 사사가 서른 넘게 있었거든요. 어쩌면 더 있었을지도 모르고. 훈련이 잘된 사사였죠. 내 사람이 열한 명 죽고, 나도 조금 다치고.”

영원은 자세를 고쳐 앉고는 소매를 걷어 올려 어깨 가까운 쪽 팔에 난 흉터를 보여주었다. 이동이 고개를 내밀고 유심히 바라봤다.

“칼에 베인 흉터인가요?”

그녀는 칼에 베인 흉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럴 경우 상처는 평탄했다. 지금 이 상처는 분명 무언가에 찔린 흉터로, 칼에 베인 흔적이 아니었다.

“날이 너무 어두워서.”

영원이 얼버무렸다. 날이 너무 어두운 탓이 맞긴 했다. 두봉을 휘두르며 말에서 내리면서 칼을 뽑다가 어쩐 일인지 나뭇가지에 찔린 거니까…….

영원은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나은 지 며칠 안 됐습니다. 누님이 소문내지 말라고 해서 참을 수밖에 없었죠. 상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니까요. 아무런 일 없는 척 다른 사람들처럼 궁에 들어가서 영구를 지켰어요. 칼에 베인 상처가 아니라고 무시하지 말아요. 깊은 상처라고요. 이렇게 깊은 구멍이 났는걸! 처음 며칠은 한 열흘까지 움직이기만 해도 피가 났어요. 옷에 스밀 정도였다고.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궁 안엔 시중들 사람도 없으니까. 봐봐요, 이 위치. 얼마나 불편하겠어. 이렇게 비틀고 약을 바를 수밖에 없었다니까. 그리고 한 손으로 붕대를 감았고. 정말로 어찌 버텼는지!”

영원이 팔을 들어 올렸다.

“며칠 전에 막 나았습니다. 지금도 움직이면 아픈걸.”

이동이 손을 내밀자 영원은 곧바로 괴로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동의 손가락은 상처에서 반 자나 떨어져 있었다.

“건들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아픕니다!”

이동이 천천히 하는 말에 영원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안 그래도 말입니다, 한 달 경야하는 건 쉽지 않아요. 잘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춥고 배고프고 더럽고. 그런데 이렇게 심하게 다치기까지 했으니, 원. 정말로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이동은 가장자리가 살짝 하얗게 변해서 이제 곧 떨어질 듯이 말 듯이 진 딱지 가장자리를 손으로 살살 눌렀다. 손톱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딱지가 떨어질 것 같았다.

“참 안 됐네요.”

이동이 천천히 하는 말에 영원은 용맹하고 씩씩한 표정이었다.

“그럭저럭 참고 견뎌냈지요. 먹을 것 좀 있나요? 종일 바쁘게 움직이느라 지금껏 밥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아마 이 방 때문이리라. 갑자기 배가 등가죽에 붙은 것처럼 배가 고팠다. 아침에 잘 먹지 못하고 점심때부터 술만 마셨더니 저녁엔 입맛이 없다가 이제야 배가 고팠다.

“간식 좀 내오렴.”

이동이 녹매에게 분부했다.

“간식은 됐습니다. 너무 번거롭잖아. 간단한 요리 몇 가지 내오너라. 지난번처럼 말이다. 탕 좀 가지고 오고, 쌀밥, 만두(饅頭: 찐빵) 다 괜찮다. 난 가리지 않는다. 아, 그리고 지난번에 먹었던 그 화과(火鍋)가 있으면 더 좋고.”

이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원이 얼른 받았다.

녹매는 눈을 까뒤집어 보이고 싶어졌다. 도대체 어느 쪽이 더 번거로운데요?

이동은 울지도 웃지도 못해서, 어쩌면 좋을지 묻는 녹매의 시선에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녹매는 물러나서 청국을 불러들이고 문죽을 불러서 함께 작은 부엌으로 향했다. 이미 준비된 간식보다 ‘번거롭지 않은’ 탕, 요리, 화과를 준비하러!

“대례는 오늘 아침에 끝난 것 아닌가요? 식사도 못 할 정도로 바빴나요?”

이동은 이해할 수 없어서 영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 달 동안 영구를 지켰으니 적어도 오늘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깨끗이 씻고 배불리 먹고 잘 자야 하는 것 아닌가.

“누님은 소문내지 말라고 했지만, 자객이 누구 짓인지 조사해야죠. 짐작은 해야 하니까, 주육을 불러서 술 마시며 떠봤습니다.”

영원이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

이동은 더 묻지 않았다. 아는 게 적을수록 좋은 일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수국공부입니다.”

영원은 다시 아래로 미끄러졌다. 매우 편해 보이지만 보기엔 그다지 좋지 않은 자세로.

“내 추측대로라면, 주 추밀부사의 생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자객은 수국공의 사람일 것이고.”

영원이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제가 암투를 벌였는데, 첫째가 위리안치됐으니 수국공은 태자에게 충심을 보이기 급급하겠지요. 주 추밀부사는 형님 수하가 필요했을 것이고. 손에 넣지 못하면 목숨을 가져가도 되고.”

이동은 영원을 바라보며 영 황후를 떠올렸다. 내심 한숨이 나왔다. 주가는 너무 오래 득세하고 너무 오래 태평해서 권력 다툼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일인지 잊었다. 주씨 가문이 얼마나 버틸까. 예전대로라면 황상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변수가 너무 많았다. 어찌 될지 누가 알까.

“무슨 생각합니까?”

이동이 멍하니 넋이 나간 걸 본 영원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아니에요. 주가에 몇십 년 동안 대운이 든 걸 생각했어요.”

이동은 예전의 주가를 생각했다. 주 태후와 주 귀비가 없어졌어도, 용상에 앉은 것이 대황자나 사황자가 아니었어도, 양 태후와 황상은 주가에 지금과 변함없는 은총을 베풀었다. 그야말로 길운이었다.

영원이 싸늘하게 웃었다.

“흥! 처음 몇십 년은 몰라도 이제는 됐습니다. 나 영원이 경성에 온 이상, 주가의 대운도 여기까지입니다.”

말을 잠시 멈춘 영원이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내 사람이 열한 명이나 죽었어요. 내가 경성에 데리고 온 사람은 모두 전투 경험이 노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사일생의 위기를 얼마나 많이 같이 넘겼는지 모를 형제들입니다.”

영원이 등받이에 기댔다.

“학씨라고 있는데, 해가 지나면 딱 마흔입니다. 작년부터 마흔 정수엔 제대로 축하해야 한다고 준비했죠. 이렇게 칼에 피를 묻히고 사는 사람은 마흔까지 사는 게 쉽지 않다고 말하면서.”

이동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조씨, 내가 북삼로에서 도적을 소탕하던 시절에 하마터면 크게 골탕 먹을 뻔한 적이 있어요. 함정에 빠졌거든요. 형님이 뒤에서 진두 제압하지 않았다면 그때 죽었을지도 몰라요. 그때부터 조씨는 내 밑에 있었습니다. 거의 십 년 가까이 됐는데.”

영원이 고개를 떨궜다.

“심대는 내가 여섯 살이 되어 사람을 골랐을 때부터 내 곁에 있었습니다. 정안성 밖에 작은 장원을 사들였어요. 요즘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땅을 사서 몇백 묘를 모았어요. 마흔이 되면 은퇴해서 장원에 가서 살 거라고 했는데. 밭을 잘 가꾸고 농한기엔 술이나 마시면서 놀이패 구경이나 하겠다고.”

영원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다. 이동이 차를 내려 그에게 건넸다.

“죽은 사람은 이미 떠났어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요.”

“음, 괴로워서 그러지.”

영원의 눈꼬리에 눈물이 어렸다.

“어릴 때, 아버지와 출전해서 큰 승리를 거두고 축하할 때,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혼자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난 그때 아버지가 왜 우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야 깨달았어요.”

“그런 생각 그만 해요. 영 황후가 경성으로 돌아오셨잖아요. 그리고 오가아도. 반년 만에 보니까 오가아가 키가 큰 것 같더라고요.”

이동은 처량해져서 얼른 화제를 바꿨다. 그 화제를 계속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드디어 누님을 모시고 나왔지.”

영원은 깊이 한숨을 내쉬고 이동의 화제를 따라 이야기했다.

“소오가 키가 컸다고요? 잘 모르겠던걸. 올해 정월 보름 꽃등절을 못 보다니, 안타깝죠.”

영원은 아쉬운 표정이었다.

“경성의 상원절(上元節: 정월 보름)이 얼마나 떠들썩한지 소문이 자자하던데. 경성에서 처음 맞이하는 상원절인데! 나와 소오 모두 꽃등절을 못 보겠군요. 상원절엔 경성 안팎에 은하가 내려온 것처럼 아름답다고 하던데, 정말로 그렇습니까?”

“난 하늘의 은하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이번 상사가 아니었다면 지금이 가장 떠들썩할 때일 거예요. 특히 내일은요. 황상께서 선덕루에서 백성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 날이에요.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나와서 등 구경하고 등을 들고 다니죠. 경성 곳곳에 각양각색의 등이 가득하죠. 성안, 성 밖 모든 강에 등이 둥둥 떠다니고, 다리에 서서 멀리 내다보면 정말로 은하가 떨어진 것 같아요. 경성 안팎의 크고 작은 상점, 주루 모두 떠들썩해서 구경할 거리가 있죠. 날이 밝으면 곧바로 성 밖으로 나가서 거닐죠. 하늘의 은하가 이처럼 떠들썩하겠어요?”

이동의 눈에 그리움을 담은 광채가 빛났다. 지금 그녀가 말한 떠들썩한 광경은 낭자 시절의 기억과 그 후 몇십 년 동안의 기억이 뒤섞인 것이었다. 혼란스러우면서도 또렷한 기억이었다.

영원은 눈빛을 밝게 빛내며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이동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줄곧 묵묵히 서 있던 푸르른 나무가 별안간 나무 가득 다채로운 꽃을 가득 피운 느낌이었다. 발랄하고 생기가 도는 것이 눈이 부셨다.

이동이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는 못 보겠네요.”

“그럼 내일 보러 갑시다. 그 등.”

영원이 돌연 초대했다.

“올해는 등이 없다지만, 등이 없어도 돌아볼 수는 있잖습니까? 내일 둘러보면서, 어디에 무슨 구경거리가 있는지 알려줘요. 해마다 떠들썩했다고 하니, 일단 미리 길을 깔아둬야 내년에 제대로 보지 않겠습니까?”

“미리 길을 깔아둬요? 도적질하러 가게요?”

이동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내 전문이죠. 내일 오후에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영원은 즐거운 듯이 팔걸이를 탁 내리쳤다.

“내일 오라버니와 방생하러 가요. 시간 없어요.”

이동은 단칼에 거절했다. 영원이 더 조르려고 하는데 휘장이 젖히더니 녹매와 문죽이 솥과 찬합을 들고 들어왔다. 청국이 작은 탁상을 옮기자 영원은 다급히 의자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내밀어 바라봤다.

찬이 많지 않았다. 연지아포(胭脂鵝脯: 오리고기 포), 마랄토육정(麻辣兔肉丁: 마라 토끼고기), 산랄채심(酸辣菜心: 새콤 매콤 채소), 양반육피동(凉拌肉皮凍: 고기 껍질 무침), 네 가지 냉채와 죽순, 배추, 분사(粉絲: 국수의 일종) 등을 넣은 계탕 화과와 쌀밥이었다.

영원은 말할 겨를 없이 쌀밥을 받아 게 눈 감추듯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밥 두 그릇과 냉채를 휩쓸고 화과를 반 넘게 먹고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좋다! 한 달 만에 드디어 한 끼 든든하게 먹는구나.”

이동은 어이없이 그를 바라봤다. 정북후부는 위아래 백여 명이 윗전인 영원 하나를 모신다. 그런 정북부후에서 밥 한 끼 제대로 내놓지 않았을까. 설사 궁에서도 영원을 서럽게 할 리는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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