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고충을 털어놓다
한바탕 울고 겨우 숨을 돌린 주육은 묵칠이 혼인 어쩌고를 입에 올린 바람에 금세 또 먹구름이 끼었다. 영원조차 어깨가 축 처졌다. 세 사람 모두 풀이 죽어서 아무런 말 없이 연달아 술잔만 비웠다.
주육이 가장 먼저 쓰러졌고, 묵칠은 조금 더 버텼다. 영원이 혼자 재미없게 술을 마시자 아라가 얼른 잔을 들고 함께 마셨다. 아라는 금세 숨이 가쁘고 얼굴이 빨개져서 영원 쪽으로 자꾸 몸을 기울였다.
영원은 다다를 불러 아라를 저쪽으로 부축해 가라고 하고 자신은 혼자 조용히 여아홍 반 동이를 비웠다. 어질어질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아래로 내려갔다. 바람이 휙 불자, 그제야 주육과 묵칠이 아직 위에 있는 게 떠올랐다. 그는 딸꾹거리며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가 양손에 두 사람을 끌고 나왔다. 계단 춤에 서서 이리 돌고 저리 돌며 시도해봐도 계단 폭이 너무 좁아서 양손에 하나씩 끌고 자기까지 내려가기엔 턱도 없었다. 내키는 대로 한쪽 손에 들린 주육을 던지고 묵칠부터 짊어지고 아래로 내려가서 던져놓고 다시 돌아가서 주육을 짊어지고 내려왔다.
아래층에 있는 심부름꾼이든 두 행수까지, 영원의 얼굴이 평소와 다름없어서 그가 취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위로 올라가서 하나를 끌고 내려와 던지고, 또 올라가서 하나를 끌고 내려와 던지는 걸 보고 그제야 영원이 술에 취했음을 깨달았다. 아니면 사환을 부를 것이지, 멍청하게 왔다가 갔다가, 직접 움직일 리가 있나.
두 행수는 감히 긴말하지 못하고 얼른 사람을 보내 주육과 묵칠의 사환을 불러왔다. 말을 타고 가긴 글렀으니 얼른 마차를 준비했다.
영원은 두 사람을 챙겨 내려오긴 했으나, 두봉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영원까지 해서, 세 사람 모두 쓰개도 없이 얇은 비단 장포 하나만 입고 매서운 바람 아래 서 있었다. 영원이야 두봉을 입든 말든 괜찮았다. 두 행수가 다급하게 세 사람의 두봉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묵칠과 주육은 추워서 술이 조금 깼다.
두봉을 가지고 온 두 행수는 또 서둘러 손난로 세 개를 준비해 왔다. 영원은 받지 않았고 묵칠과 주육은 품에 안았다. 연달아 딸꾹거리던 주육이 이마를 탁 내리쳤다.
“형님, 하마터면 중요한 일을 잊을 뻔했네!”
주육은 비틀비틀 앞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후다닥 뛰어왔다. 영원과 묵칠 앞에 달려와서는 묵칠의 두봉을 붙들고 영원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형님, 나오기 전에 아버지가 당부했소. 형님을 떠보라던데? 형님! 대체 경성에 사람을 얼마나 많이 데리고 왔소? 우리 아버지 말이, 분명 많이 데리고 왔을 거라던데? 게다가 다들 대단할 거라고 했어! 대체 얼마나 데리고 온 거요! 솔직히 말해! 그래야 아버지께 보고하지!”
주육이 묵칠 가슴을 퍽퍽 치며 물었다. 찬 바람에 술기운이 거의 날아갔던 영원은 주육의 말에 힘껏 혀끝을 깨물며 정신을 차렸다. 영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육을 바라보더니 그의 어깨에 팔을 턱 걸치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람? 사람은 개뿔! 이 몸은 아버지, 그리고 형님에게 쫓겨난 건데, 사람은 무슨! 게다가 많이? 흥! 어림도 없지! 잘 들어라! 네 아버지…… 무슨 일인지 안다. 잘 들어라. 너는 알고만 있으면…… 된다! 알았느냐?”
주육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묵칠도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와 상관있는 이야기인지 아닌지 전혀 알지도 못했다.
“내가 누님을 모시러 갔지! 내 누님이 누군지 알지?”
“그걸 누가 몰라! 황후마마시지!”
“그렇지! 황후마마시지! 마중해서 돌아오는데, 오는 길에 폭우가 내렸다. 폭우가! 이만큼!”
영원은 주육과 묵칠의 머리를 각각 철썩 내리쳤다.
“아주 많이! 그 폭우 속에, 자객들이 있었다!”
주육과 묵칠은 여전히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행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심부름꾼들을 저 멀리 내쫓고 자기도 얼른 안 들리는 곳까지 물러났다.
세상에, 우리가 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자객들이, 많았다! 시커멓게 몰려왔다! 빗방울처럼 많이! 하지만 다 무지렁이였지! 무지렁이 아닌 놈은 하나도 없었지! 이 몸이!”
영원은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팔을 연신 휘둘러댔다.
“한칼에 하나, 한칼에 하나, 한칼에 하나. 이렇게, 싹 다 베어 죽였지! 대영 있느냐!”
영원이 버럭 고함치자 대영이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네가 말해라. 칠소야와 육소야에게 알려줘! 이 몸의 무술 실력, 사람 죽이는 실력, 어떻느냐?”
“훌륭합니다! 천하제일입니다!”
이런 문답을 자주 했는지, 대영은 매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잘 들어라. 그 자객들, 너무 어리석었다! 그러니까……. 그래, 너의 저택 사환처럼, 그래 맞다. 그거다. 이 몸에게 있는 열몇 명은 말할 것도 없고 내 개들도 그 자객들을 물어 죽일 수 있다. 하나도 남김없이!”
영원이 주육의 뒤통수가 아플 정도로 철썩철썩 내리쳤다.
“이 몸에게 사람이 몇 명 있기는! 형제니까 알려주는 거다. 네 아버지 수하는 다 무지렁이다. 너무 어리석어! 네 아버지가 쓸모없다고 타박해서 싹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이 몸이 능력이 아니라 쪽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허튼소리나 하고! 열 몇이 몇백 명을 죽였는데, 이건 뭐, 제기랄 망신스러운 일 아니냐! 몇백 명으로 몇천 명을 죽였으면 영웅이겠지! 그렇지? 네 아버지가 그 무지렁이들에게 속은 거다!”
주육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어질거려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원 형님이 하는 말이니 그게 뭐든 너무 일리 있었다.
묵칠은 사환의 부축을 받고 마차에 타고 흔들흔들 저택으로 돌아갔다. 마차에서 내려 비틀비틀 중문으로 들어갈 때까지 아까 소육과 칠 형님이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열심히 생각했다.
막 밖으로 나가려던 묵 이야는 마침 묵칠과 딱 마주쳤다. 팔자를 그리며 다리는 비틀비틀, 한 손은 허공에 휘적휘적 휘두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고집스럽고 고통스럽게 생각에 빠진 듯한 아들의 모습에 속이 터질 것 같아서 다가가서 대뜸 등짝을 두드렸다.
“무슨 술을 이리 마셨느냐!”
“아버지!”
비틀거리던 묵칠은 제 부친인 걸 알아보고 마음을 놓았다.
“아버지! 큰일입니다! 아들 생각엔, 예, 큰일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묵 이야는 ‘이놈은 그녀가 낳았다. 이놈은 내 아들이다. 이놈은 그녀가 낳았다.’를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겨우 분노를 억누르고 물었다. 술이 깨면 그때 혼내주마!
“큰일입니다!”
묵칠은 제 아비 몸으로 쓰러지며 아까 주육과 영원이 했던 말을 두서없이 횡설수설, 빠뜨려가며 몇 번이고 반복했다. 다행히 묵칠의 아비는 남다르게 총명했고, 놀랍게도 다 알아듣고 얼굴이 시퍼레졌다.
“주 육소야가 그렇게 영원을 떠봤다고? 똑똑히 들은 것이냐?”
“그럼요! 전 하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똑똑히 들었습니다! 소자, 그때 웃기까지 한걸요! 칠 형님을 떠볼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묵칠이 헤헤 웃으며 하는 말에 묵 이야가 아들을 휙 끌어당겼다.
“지금부터 네 그 입, 꾹 다물어라.”
묵 이야는 종복을 부르지도 않고 직접 묵칠을 끌고 전 노부인의 상방으로 달려가서 묵칠이 조금 전에 한 말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전 노부인은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저었다.
“알아들었다. 소칠이 술이 깨기 전까지 내가 직접 돌보마. 넌 어서 가서 네 부친에게 말씀드려라. 아이고. 주 추밀부사도 가련하구나. 어찌 그런 아들을 낳아서…….”
세 사람을 보내고 다다가 아라에게 해장탕을 건넸다. 본디 많이 취하지 않았던 아라는 술기운이 가시자 우울한 얼굴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소저, 왜 그러세요?”
다다는 방을 정리하고 차를 내왔는데 아라가 아직 한숨을 쉬는 걸 보고 물었다.
“칠야, 칠소야, 육소야, 모두 혼인하신단다.”
아라는 우울해 보였다.
“소저, 혼인하면 나리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봐 그러세요? 그게 뭐라고요. 행수 어른이 그러시는데, 손님은 부추 같댔어요. 베면 자라고 베면 자란다고요. 벨수록 많아진대요.”
“아니, 내가 다 슬퍼서 그래.”
“소저, 미쳤어요?”
다다가 위아래로 아라를 훑어봤다.
“얼마나 큰 경사인데요. 본인들이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소저가 왜 슬퍼해요? 다들 못난이와 혼인하신대요? 아니면 포악하대요?”
“그런 게 아냐. 넌 모를 줄 알았어.”
아라는 연신 한숨을 내쉬며 팔에 힘을 주며 일어나 앉았다.
“예를 들면, 누군가…… 그래, 손 한림이라고 치자. 손 한림이 날 저택으로 들이려고 한다고 쳐. 말해 봐. 그게 기쁜 일이니, 슬픈 일이니?”
다다는 자기네 소저를 빤히 보며 갈등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소저, 소저가 말해 보세요. 기쁠까요, 슬플까요?”
“당연히 슬프지!”
아라가 다다의 이마를 톡 때렸다.
“멍청이! 나는 슬픈데, 사람들은 다 경사라고 하겠지! 우리 같은 기녀가 한림부에 들어가서 자식이라도 낳으면 그게 얼마나 큰 복이냐고 하겠지! 하지만 내 생각엔, 새장에 들어간 것 같을 거야. 게다가 매일매일 그 못생기고 축 처진 거죽을 봐야 하잖아? 죽고 싶을 정도로 슬퍼!”
“칠야는 분명 선녀 같은 칠내내와 혼인할 거예요! 소저가 말한 대로는 안 된다고요!”
다다가 입을 비죽이며 아라를 흘겨봤다.
칠야, 육소야, 그리고 칠소야가 자신이나 자신의 소저처럼 천한 사람과 비교할 수 있나. 소저, 분명 질투해서 이러는 거지!
영원은 정신은 멀쩡한데 눈앞이 어른거리는 걸 보고 자신이 술이 과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대영에게 분부하고 돌아가서 바로 화항에 쓰러져서 잠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대영이 등을 들고 들어오자 영원이 일어나 앉았다. 아직도 조금 멍한 것이 머리가 맑지 않았다. 삼십 년 여아홍, 많이 마시면 안 될 술이었다.
영원은 일어서서 조금 흔들리는 걸음으로 정방에 들어가 목욕하고 나왔다. 대웅이 이미 저녁을 차려두었고 영원은 자리에 앉아 슬쩍 훑어보고는 묽은 죽 두 그릇 먹고 물리라고 명했다. 화항에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내려와서 두봉을 가지고 오라고 대영에게 분부해서 아무렇게 걸치고는 각문으로 나갔다. 말도 타지 않고 그냥 걷다가 조금 떨어진 이가로 직행했다.
노련하게 각문으로 들어간 영원은 당직 서거나 가끔 지나가는 어멈, 시녀를 요리조리 피하며 어둠을 타서 이동의 효풍원으로 달려갔다.
효풍원 후각문에 도착한 영원은 뜨락 안으로 나뭇가지를 드리운 석류나무 아래로 가서 훌쩍 뛰어 가지를 잡고는 그대로 담장을 넘었다.
어머니 거처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이동은 막 옷을 갈아입고 힐수방에서 잔뜩 보낸 자수 견본을 하나씩 보고 있었다.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차를 내리던 수련은 손을 떨었고 이동은 경계하며 창문을 바라봤다. 위봉낭이 창을 두드리는 기척이 아니었다. 위봉낭의 기척과 비교하면 거침없고 거리낌 없었다.
“누구냐?”
수련이 후다닥 창가로 다가가서 창문 너머로 나지막이 물었다.
“이 낭자, 납니다.”
영원의 목소리가 창밖에서 들리자 이동은 멈칫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밖에 비도 오는데!
“서쪽 곁채로 모셔.”
이동은 수련에게 분부하는 동시에 창밖에 있는 영원에게 알렸다.
수련은 상방 문 앞에 서서 잠시 기다리다가 쫄딱 젖은 영원을 서쪽 곁채로 안내했다.
녹매가 긴소매 옷을 갈아 입혀주자 이동은 서쪽 곁채 끝까지 걸어가서 모퉁이를 돌아 서쪽 곁방으로 들어갔다.
영원은 곁방에 서서 실내를 살폈다. 곁채 세 칸을 모두 터서 서재 겸 장방(帳房)으로 꾸민 방이었다. 이동이 들어가자 수련이 흠뻑 젖은 영원의 두봉을 끌어안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