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저마다 걱정거리가 생기다
복안 장공주가 다리를 치켜들어 창턱을 밟으며 웃었고, 잠시 놀라던 이동도 곧 따라 웃었다.
“은혜를 베푸는 건가요, 아니면 골치를 보태는 건가요.”
“황상은 이제야 마흔이 좀 넘었어. 젊다고. 후궁에 혼자 있으면 무슨 재미겠어. 수완이 아무리 많아도 부릴 곳이 없잖아. 양빈을 비로 올려주면 진왕도 주목받게 되겠지. 오황자에게 집중된 시선을 조금은 돌릴 수 있을 거야. 거기에 규수를 골라 후궁을 채우면…….”
복안 장공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고 보렴, 그 성지가 내려가면 조정과 경성은 난리가 날 거야. 얼마나 많은 가문이 헛된 꿈을 품을지. 자기네 규수가 두 번째 주씨가 되길 꿈꾸면서 말이야. 일이 년 안에 회임이라도 하면…….”
복안 장공주가 혀를 내둘렀다.
“태자는 발에 땀이 나게 바빠지겠지.”
“동의하셨어요?”
이동은 잠시 생각해 봤다.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되면 궁은 물론 조정까지 혼란스러워지리라.
복안 장공주가 이동을 흘겨봤다.
“내가 동의하고 말고 할 일이야? 마마가 황상을 위해 규수를 골라 후궁을 채우겠다는데, 내가 입을 열 주제가 되나? 나중에 네 올케가 네 오라비 첩을 들여주고 통방을 붙여주는 데 네 승낙이 필요해?”
“제 승낙은 필요 없지만, 제가 승낙하지 않으면 첩이나 통방을 들이지 못하는 건 맞죠.”
이동이 가차 없이 대답하자 복안 장공주가 무시하는 듯 바라봤다.
“내가 너일까 봐? 난 너보다 어질고 현명하단다.”
이동이 복안 장공주를 흘겨봤다.
저보다 어질고 현명하다고요? 하!
복안 장공주가 치켜든 다리로 쉴 새 없이 창턱을 찍어대자, 이동은 신발 위에서 이리저리 달랑거리는 묵록색 융 뭉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다른 것도 있어요?”
조금은 조바심 나 보이는 장공주의 모습에 이동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복안 장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음. 양빈이 비로 오르면 경성 5품 이상의 명부를 초대해서 집안 규수도 함께 불러 궁에서 양빈의 축하연을 열 거래. 겸사겸사 규수들을 미리 볼 생각이겠지. 나도 같이 가재.”
“승낙하셨어요?”
“아니! 속세를 떠나 수행하는 사람이 그런 구경은 왜 해. 나는 긴 세월 동안 수행해서 성과를 얻은 몸이야!”
복안 장공주의 당당한 모습에 이동은 그녀를 다시 흘깃 보고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복안 장공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이렇게 떠들썩한 일이 십여 년 동안 없었잖아. 구경하지 않으려니 정말 답답해!”
이동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콜록거렸다.
“그럼 가세요. 수행해서 성과를 거뒀다는 게 결국은 몰아일체,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거 아닌가요?”
복안 장공주가 얼굴을 가렸다.
“구경 좋아하는 이 버릇, 왜 못 고치는 거지!”
황실의 상사(喪事)를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닌 경성의 와자나 주루, 그리고 환락가는 분위기를 잘 파악했다. 주 귀비의 부고가 퍼지자마자 각 점포는 조용히 영업하거나 문을 닫았다. 상사가 생긴 한 달 동안엔 당연히 가무 연회가 불가했고, 한 달 후엔, 고작 귀비의 장례가 끝났으니 평소처럼 돌아와야 마땅하지만, 주 귀비는 첫째 황후로 추서됐고, 둘째 태자의 생모라서 평소처럼 돌아갈 수가 없었다. 다른 곳은 어떤지 몰라도 연향루 두 행수는 신중히 하기 위해 문을 열지 않았다.
한 달 쉰 아라는 매우 따분해하며 창문을 열고 다다와 함께 창턱에 기대서 해바라기 씨를 먹으며 떠들썩한 거리를 구경했다.
“소저, 소저! 저기 봐요, 저기!”
눈 좋은 다다가 저 멀리 영원 일행이 말을 타고 오는 걸 보고는 한 손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다른 손으로 아라를 찰싹찰싹 때렸다. 해바라기 씨가 바닥에 가득 떨어졌다.
“우리한테 오는 건가?”
아라는 양손으로 창턱을 짚은 채 목을 길게 빼고 그들을 바라봤다.
“당연하겠죠! 행수 어르신한테 가 봐야겠어요. 칠야가 오셨다!”
낙천적인 다다가 치맛자락을 들고 쿵쿵거리며 내려가니, 그 소리에, 그녀가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연향루의 사람 절반이 놀라서 밖으로 나왔다.
두 행수는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어서 직접 문을 열고 영원과 묵칠, 주육 세 사람을 맞이했다. 세 사람을 위로 모시고 가라고 다다에게 분부하고는 허둥지둥 옆집 비연루 심부름꾼을 시켜 휴가 보낸 모두를 불러오게 했다.
오늘로 장사를 시작해도 될 듯하군. 정월을 몽땅 공치진 않게 되었다!
아라는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기뻐하면서 영원과 두 사람을 맞이하고는 직접 옷시중을 들고 방석을 내놓고 차를 날랐다.
“한 달 못 본 사이에 아라가 철이 들었구나.”
묵칠은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주방에 말해서 간판 요리는 모두 올려라. 번루에 가서 몇 가지 더 사오고. 한 달 넘게 고생해서 다들 몸보신해야 한다.”
영원이 다다에게 분부했다.
“그리고 술도. 지난번에 마신 삼십 년 여아홍으로 몇 동이 내와라. 나와 형님, 그리고 소칠이 제대로 한잔해야 한다.”
주육이 언짢은 마음으로 분부했다. 다다는 재빠르게 위아래로 뛰어다니며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리고 술도 데워왔다.
다다가 데운 술을 작은 주전자에 옮기자마자 주육이 주전자를 가로채 자작하며 연달아 석 잔 마셨다. 영원이 주육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마시다간 금방 취한다. 일단 음식 좀 먹고 술은 천천히 마셔라.”
주육이 고분고분 잔을 내려놓았다. 묵칠이 답답한 듯 주육을 바라봤다.
“왜 그러는데? 너, 고모님 때문에? 그럴 것까지 없지 않으냐. 너는 깨인 사람 아니냐. 살고 죽는 건 인지상정이다. 윗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가는 건 당연하지.”
“그런 게 아니다. 고모님 때문만은 아니다. 고모님은……. 휴. 한 달 넘게 통곡했으면 더 큰 아픔도 덤덤해지지.”
주육이 먹먹하게 대답하자, 묵칠이 끌끌 혀를 찼다.
“그럼 무슨 일이냐? 고모님 일 말고 집안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다 경사 아니냐! 네 부친이 작위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아버지께 들었다. 예부에서 벌써 논의 중이라던데. 열엿새에 관아가 열리면 바로 성지가 내려올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국공이라던데? 한 가문에 국공 둘이라니, 경성을 통틀어도 너희 가문뿐이다!”
아라는 눈이 다 휘둥그레졌다.
“그럼 앞으로 육소야도 국공부 세자가 되는 건가요?”
“그야 물론이지!”
묵칠은 주육의 잔을 반쯤 채워두고 자기 잔을 가득 채웠다.
“자, 한잔하자!”
“할머님 몸은 좀 어떠시냐? 아직도 편찮으시냐?”
영원이 다정하게 물었다.
“조금 괜찮아지셨지. 황상께서 하루에 몇 번이고 사람을 보내주시는걸. 태의 말이 할머님이 많이 상심하셨지만, 다행히 울어서 울분을 푼 덕에 응어리로 남진 않았대. 한 달 정도 더 몸조리하면 나으신다더군.”
“그럼 됐다. 네 할머님만 건재하시면……. 이 일은 다 지난 일이다. 우리 다 잘 있지 않으냐. 자자, 한잔하자.”
영원은 말머리를 확 바꿔 두 사람을 향해 잔을 들었다. 주육은 연달아 두 잔 마시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빈 잔을 바라봤다.
“형님, 나 마음이 괴롭소. 왜 이렇게 괴로운지 나도 모르겠소. 생각해 봤는데, 고모님이 돌아가셔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오. 고모님이 떠나셔서 슬프지만, 슬픈 건 슬픈 거고 답답하진 않아.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이 너무 답답하오. 형님, 마음이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소.”
주육이 눈물을 글썽이자 영원이 그를 토닥였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라. 말하고 나면 답답함도 풀릴 것이다.”
영원이 아라에게 눈짓했다. 아라는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얼떨떨해했고, 오히려 묵칠이 이번엔 빨리 알아차리고 다다에게 분부했다.
“넌 아래층에 가 있어라. 시킬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르마.”
“할머님 건강 때문도 아니야. 할머님 연세에 여기저기 아픈 게 당연하지. 낫지 못하는 중병도 아니고.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계속 답답하다. 답답해서…… 잠도 오지 않고 잠을 자도 꿈을…….”
주육은 영원 형님 품에 쓰러져서 엉엉 울었다.
“형수도 병이 들었는데, 그 병이……. 나도 모르겠다. 형님은 상관도 하지 않고. 백모도 병이 나고. 병이 난 건 아니지……. 나도 모르겠다. 집안 식구들이…… 다들 어머니만 찾는다. 어머니가…… 백모가 어릴 때부터 날 예뻐했다고 하는데…….”
주육의 말이 이어졌다 끊어졌다, 횡설수설하는데 영원은 똑똑히 알아듣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황자가 위리안치됐으니 대황자 편에 섰던 주가의 장방이 지금 얼마나 겁에 질려 있을지. 하씨가 몸져누웠다는데 의원을 불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묵칠조차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기면 왕, 지면 도적이 되는 법이다. 세상사가 그래. 슬퍼하지 마라. 그래도 너희 사방은 왕이 된 쪽 아니냐.”
영원은 아무런 말도 없이, 품에서 우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주육을 토닥였다. 주육이 울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나서인지 마음이 서글펐다.
한바탕 시원하게 운 주육의 울음소리가 차츰 잦아지더니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나, 괜찮아졌다. 나도 안다. 됐다.”
묵칠이 주육의 어깨를 두드렸다.
“울어버리면 좀 나아진다. 너희 집안일…… 휴, 나라도 울고 싶겠지. 사실 나도 울고 싶다! 대체 무슨 일인지. 해가 갈수록 재미없다. 특히 근래엔 더. 예전엔 얼마나 재미있었냐. 언짢은 일이 뭐가 있었어. 요즘은……. 휴!”
주육이 괜찮아지자 이번엔 묵칠이 감상적으로 되었다.
“칠 형님, 이번 일이 소육네 사방에서 일어났다면, 장방이 가만히 뒀겠어? 가만히 두기만 해도 괜찮지. 혹시…… 과거의 가문들처럼 집을 몰수하고 멸족했다간 우린 다시는 소육을 만나지 못했겠지. 그러면 얼마나 괴로웠겠어.”
답답함이 좀 풀린 주육은 술도 좀 깨서 묵칠의 말에 금방 언짢아졌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너희 집이 몰수당하고 멸문당해서 나와 원 형님이 널 못 만나게 되면 내가 괴로웠겠지!”
“예를 든 거다! 아이고! 소육아, 잘 들어라. 몰수고 멸문이고 그런 일이 없어도 앞으로 나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묵칠이 울상을 짓자 영원이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냐?”
“할머님이 혼처를 알아보실 거래.”
묵칠은 눈물을 툭 떨구었고, 영원과 주육은 그를 노려봤다. 주육이 벌떡 일어나더니 묵칠의 머리통을 한 대 내리쳤다.
“난 네 목이 달아나는 줄 알았잖냐!”
“비슷하지, 뭘! 칠 형님, 내 말 좀 들어 봐. 할머님 말씀이, 날 단속할 여인으로 고르시겠대. 형님은 몰라. 난 요즘 그 생각만 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요즘 나날이…….”
묵칠은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아라는 웃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묵칠을 바라봤다. 저렇게 우는 걸 보니 웃기는데 웃을 수가 없었다. 웃지 않으려니 웃음을 참는 게 또 너무 괴로웠다.
주육은 눈물을 닦는 묵칠을 어깨를 으쓱하며 바라봤다.
“우리 어머니도 내 혼처를 알아보고 있는걸. 아까 나올 때도 매파들이 어머니 거처에 가는 걸 봤다.”
“매파들이 하도 드나들어서 육소야 댁 문턱이 닳은 거 아니에요?”
아라는 힘껏 목을 가다듬고 주육의 말을 받았다. 이야기라도 해야지, 웃음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칠야는요? 칠야는 정혼하셨나요?”
아라가 자연스럽게 영원에게 물었다. 세 사람 중에 영 칠내내가 누가 될지 제일 궁금했다.
“산이 높으면 황제가 멀다고,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내가 지금 무슨 혼담이 오가겠느냐.”
영원이 대충 대답하자 주육이 그를 툭툭 쳤다.
“예전엔 그랬는지 모르지. 형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형님을 어쩌지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 누님이 그 황제가 계신 궁에 있는걸? 형님이 나보다 몇 살 많더라? 형님도 슬슬 혼담이 오가고 아내를 구할 때가 됐지. 휴! 나도 혼인하기 싫다! 지금이 얼마나 좋아? 혼인은 무슨!”
“내 말이!”
묵칠은 주육의 말에 매우 동의했다. 안 그래도 혼인은 재미없는데, 단속할 여인을 고르시겠다니. 앞으로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나!
영원은 얼떨떨하게 생각에 잠겼다. 혼인 문제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혼인을 떠올리자, 어째서인지 이동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동이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