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90화 (290/463)

290화: 영 황후와 오황자

이동은 복안 장공주의 마차에 앉아 있었다. 출가한 사람이 타도록 만들어진 마차에 앉아 휘장 사이의 작은 틈으로 유심히 밖을 내다봤다.

이 동화문으로 얼마나 많이 출입했는지 모른다.

동화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연경궁이 있었다. 전생에 진 황후가 적장자를 낳은 해에 적장자를 곧바로 태자로 세웠고, 그 태자는 연경궁에서 거의 스무 해를 살았다. 진 황후 앞에서 죽기 전까지.

그때 연경궁을 모두 황태자궁이라고 불렀다.

이동은 손가락을 내밀어 휘장을 조금 더 젖혔다. 연경궁의 살짝 어두운 붉은 담장이 보였다. 마차는 연경궁 문을 지나쳐 모퉁이에서 북으로 향했다. 연경궁 북으로 가면 황성 외진 곳에 있는 보록궁이 나온다.

예전에 조 귀비가 입궁한 다음 해, 진 황후는 보록궁으로 옮겨왔다. 복안 장공주처럼 수행하며 지냈고, 보록궁으로 옮겨온 이래 진 황후는 은거하며 잘 나오지 않아서 이동도 그녀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마차가 보록궁 앞에서 멈추고 마차 앞에 앉아 있던 어멈이 휘장을 젖혔다. 이동은 마차에서 내려 보록궁을 올려다봤다. 예전과 비교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보록궁은 훨씬 낡아 보였다. 궁벽의 칠도 얼룩덜룩하고 겨울이라 메마른 자등 덩굴이 대문 옆 궁벽에서 대문까지 길게 뻗어 있어서 낡으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동은 어멈을 따라 보록궁 측문으로 들어가서 긴 벽돌길을 따라 삼청전 뒤편 고목이 우거진 적막한 정원 문 앞에 도착했다.

어멈은 이동을 정원 문 앞에 데려다주고 몸을 비켜 들어가라고 하고는 돌아서서 물러갔다.

이동이 뜰 안으로 들어가자 녹운이 서쪽 곁방에서 나와 문 앞에 서서 이동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이동은 서쪽 곁방으로 들어가서 주변을 살폈다.

보록궁의 전체 가옥이 모두 넓고 큰데, 이 서쪽 곁방은 안에 거의 아무것도 없어서 유난히 드넓고 텅 비어 보였다. 하지만 매우 따듯했다.

복안 장공주는 매우 자유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창가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 곁엔 찻상이, 찻상 옆엔 팔걸이의자가 하나 더 놓여 있었다. 보림암의 작은 뜨락과 똑같았다.

이동은 두봉을 벗고 찻상으로 다가가서 자리에 앉았다. 머리를 내밀고 찻상을 바라보다가 차병을 들고 향을 맡았다.

“질 떨어진다고 타박하려면 다음에 올 때 차를 가지고 와.”

복안 장공주가 고개를 슬쩍 돌려 이동을 바라봤고, 이동은 차침을 들어 올렸다.

“괜찮아요.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이제 여기 묵으시는 거예요?”

“음. 낡긴 해도 넓어서 좋아.”

복안 장공주가 느긋하게 다리를 쭉 뻗는데 편안해 보였다.

“오는 길에 연경궁 봤니?”

“봤어요.”

이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복안 장공주가 빙긋 웃었다.

“태자가 들어가라고 재촉해서 소오가 벌써 들어갔어. 정말 재미있어.”

그랬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동의 입가에 퍼지던 웃음이 이내 굳었다. 그 황태자궁에 묵으면서 황태자로 살았지만 목숨을 잃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태자가 오황자를 재촉해서 들여보낸 것도 아마도 명줄을 재촉한 것일 테다.

“복 받은 사람은 사는 곳에도 복이 온다지. 당당한 태자가 허구한 날 어디 내보이기 민망한 짓만 꾸미다니!”

복안 장공주는 말하다 말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동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차를 내려서 밀어주고는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한 달 내내 힘드셨을 텐데, 괜찮으시죠?”

“응. 그럭저럭 견딜 만해.”

복안 장공주는 찻잔을 들어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양빈을 7년 만에 만났네. 지난번에 만났을 때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였으니까.”

복안 장공주가 양빈을 거론하자 이동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고개를 틀고 집중해서 양빈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변하지 않았더라. 늙지도 않았어. 예전이랑 똑같았어. 고분고분, 순종하고.”

복안 장공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동을 바라봤다.

“영 황후 앞에서 시녀의 예를 갖추더라. 주 귀비에게 그랬던 것처럼. 주 귀비의 시녀였으니, 잘못된 건 아니지.”

이동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인자하고 자비롭기로 이름난 양 태후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진심으로 존경한 적이 없었다. 젊었을 때는 많은 걸 간파하지 못했지만 어렴풋이 어딘가 그녀가 불편했었다. 나중에 세월이 흐르고 많은 게 보이기 시작했을 땐 더 거북해졌다.

“윗사람에게 공손하고 아랫사람에게 오만하고. 오늘은 허리를 숙이고 시녀의 예를 갖췄는데 나중에 상황이 변하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시녀의 예를 갖추지 않으면 그 사람이 불손한 거라고 여기진 않을까요?”

“음. 윗사람에게 공손하고 아랫사람에게 오만하고, 강자에게 공손하고 약자에게 오만하고, 가진 자에게 공손하고, 가난한 자에게 오만하고. 이 모든 게 일맥상통하지. 예전에 주씨에게 그렇게 예를 갖출 때는 별생각 없었어. 주씨의 시녀였으니까. 주씨에게 시녀의 예를 갖추는 건 본분을 잊지 않는다고 칠 수 있으니까. 지금은…….”

차를 홀짝이며 말하던 복안 장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장공주께도 시녀의 예를 갖추나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복안 장공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날 안중에 두지 않은 것 같은데?”

복안 장공주는 웃음 지었지만 이동은 웃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안중에 둔 적 없으니 그런 억지 혼인을 맺어준 것이리라.

두 사람이 이야기 나누는데, 시녀 하나가 나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창 앞을 지나쳤다. 두 사람이 모두 입구를 바라보자, 잠시 후 녹운이 들어와서 아뢨다.

“황후 마마께서 오셨어요.”

“맞이하러 가자.”

복안 장공주가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성격도 참 급하지.”

이동이 복안 장공주의 뒤를 따라 상방에서 나오니, 영 황후가 오황자의 손을 잡고 마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영 황후는 느긋하게 들어왔고 복안 장공주는 느긋하게 맞이했다. 이동은 복안 장공주 뒤를 따르며 영 황후의 치맛자락과 복안 장공주의 치맛자락를 번갈아 봤다. 조마조마했다. 복안 장공주는 지금 손님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전투하며 맞서는 듯이 굴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복안 장공주가 걸음을 멈추자 영 황후도 멈춰 섰다. 거의 동시에, 두 사람 모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인 셈이었다.

“장공주, 평안하신가요?”

“마마도 평안하신가요?”

이동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살짝 고개를 숙이고 두 사람의 검은 두봉 자락만 바라봤다. 부드럽게 안부를 묻는 목소리에 칼이 챙챙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황자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이동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래도 애써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영 황후에게서 힘껏 손을 빼내고는 엄숙한 얼굴로 장공주에게 예를 올렸다.

“문안 올립니다, 고모님.”

하지만 장읍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복안 장공주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재빨리 이동 앞으로 달려와서는 들뜬 얼굴로 올려다봤다.

“누님, 잘 지냈어? 많이 보고 싶었어! 꿈에도 누님이 나왔어!”

“잘 지냈어요. 기억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동이 무릎을 구부리며 예를 갖추자 오황자가 한 걸음 더 다가가서 이동의 손을 잡았다.

“누님 집안의 간식도 그리웠지. 그리고 소유가 만든 음식도. 그 야채 교자, 소백이 하는 말이 야채도 여러 가지래. 소유에게 무슨 야채인지 묻는 걸 잊었지 뭐야. 소백은 무슨 야채인지 몰라서 못 만든대.”

오황자는 잔뜩 들떠서 쉴새 없이 조잘거렸다. 영 황후는 시선을 아들에게서 거두고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그땐 고마웠네.”

복안 장공주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오황자를 바라봤다. 1년에 한 번씩 만날 때마다 입을 꾹 다물고 뚱하게 혼자서 별원 정원을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였다. 돌아갈 때까지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반년도 안 되어서 어쩌면 떠버리가 되었을까?

네 사람이 서쪽 곁방으로 들어갔을 때, 녹운이 이미 사람을 불러 의자 두 개와 간식을 내놓았다. 영 황후는 아까 이동이 앉았던 자리에 앉고, 오황자는 의자를 옮겨서 이동과 딱 달라붙어서 종알종알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리고 수련도. 맞다, 맞다. 누님이 내 신발 천을 용무늬 각사로 만든 걸 한눈에 알아봤다고 어머니께 말했더니 믿지 않으셨어. 자자, 내 신발 좀 보고 무슨 천으로 만든 건지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봐.”

오황자가 다리를 의자 위로 올리자 이동은 난감한 얼굴로 다리를 내려주었다. 하지만 오황자가 다시 다리를 올렸다.

“누님, 어서 어머니께 말씀드려. 어머니가 믿지 않으신다니까.”

“소오!”

영 황후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은근히 경고하는 말투였다. 그녀는 미안한 듯 이동을 바라봤다.

“낭자, 이해해주게.”

“무슨 천인데?”

복안 장공주도 궁금한 듯 오황자가 내키지 않아 하며 내린 다리를 가리켰다. 오황자는 지금이라도 다시 올리고 싶은 표정이었다.

“경주(涇州: 현 감숙성)의 방승화 양모에 얇은 솜을 댄 것 같아요.”

이동은 솜이라고 얼버무렸다. 안에 아마도 사면(絲綿: 명주 솜)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 귀비가 막 세상을 떠나고 황후로 추서된 때였다. 민간의 예법으로는 오황자는 적어도 석 달 안엔 명주나 비단 같은 장식을 쓰지 않는 게 좋았다. 하지만 이건 민간의 예법이고 황가의 예법은 그녀는 잘 모른다.

영 황후가 놀란 듯이 고개를 내밀고 오황자의 신발천을 바라봤다. 분명 양모였다. 영 황후가 뒤에 시립한 소심을 돌아보자, 소심이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궁금한 듯 말했다.

“방승화가 맞습니다. 하지만 낭자, 경주 물건인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렇게 세밀한 양모 원단은 경주에서만 납니다.”

이동은 그 말로는 납득하지 못한 듯한 소심의 모습을 보고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경주에서는 상품 방승화 양모 원단을 생산하는데 한 필이 한 근도 안 돼요. 열넷 냥(兩: 16냥=한 근) 정도일 거예요. 다른 곳에선 옷감 한 필이 한 근 이하인 곳이 없어요. 처음에 양모 장사를 할 땐 안목이 부족하면 저울을 써서 무게를 재 봐야 해요.”

“이 낭자는 누구신가요?”

영 황후가 복안 장공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씨, 외자 동입니다. 나와 함께 혜녕 사태 밑에서 법화경을 배웠으니 내 사매라고 해도 되겠네요.”

“오동, 동?”

영 황후는 곧바로 손수건과 손수건 자락에 수 놓인 정교한 ‘동’자를 떠올렸다.

“맞아요.”

“아!”

영 황후는 이동을 위아래로 살피고 또 살폈다. 이동은 그녀의 시선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복안 장공주는 이동을 위아래로 살피는 영 황후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또 장공주께서 도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영 황후가 장공주를 향해 감사 인사를 했지만,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내 사매가 맞지만, 내가 이 아이를 단속하진 않아요.”

영 황후는 장공주, 그리고 오황자와 이야기 나누는 이동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황자가 이동을 붙잡고 하도 떠들어대서 이동은 복안 장공주와 영 황후가 나누는 말을 거의 듣지 못하고 혜녕 사태니 법화경 같은 말만 들었다.

영 황후가 이 각 남짓 앉아서 차를 두어 잔 마시고는 일어서자 오황자가 매우 아쉬워했다.

“누님, 밖에까지 배웅해 줘. 다음엔 언제 오지? 소유의 비법을 꼭 가지고 와야 해. 나갈 수 있게 되면 누님을 찾아갈게…….”

영 황후는 계속 고개를 돌리면서 이동을 향해 손을 흔드는 오황자의 손을 끌고 돌아갔고 복안 장공주는 다시 찻상 옆에 앉았다. 이동도 다시 앉아서 복안 장공주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아까 들었어?”

복안 장공주는 기분이 언짢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동은 고개를 저었다.

“오가아 이야기 듣느라고요.”

“두 가지 일로 찾아왔어. 첫째, 양빈을 귀숙덕현(貴淑德賢), 사비(四妃) 중 하나로 올려주라고 황상에 말씀드릴 생각이래. 둘째, 후궁이 비었다고, 황상을 곁에서 모실 사람이 없으니 적당한 규수를 골라 후궁을 채울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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