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주 귀비의 장례는 웅장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 속에 거행됐다. 온 경성도 먹구름이 내린 듯이 암울했다. 진왕과 진왕비도 궁에서 한 달 동안 영구를 지켜야 했다. 수녕백부가 백부이고 영구를 지킬 품계였지만, 수녕백부 근래 몇 대 동안 임무를 받은 사람이 없고 그저 예부에 이름만 올린 정도로 몰락한 지 오래였다. 경야 같은 일은 수녕백부까지 차례가 돌아가지 않았다.
강환장은 그날 후원 정자에서 새벽까지 앉아 있은 다음 하룻밤 사이 십 년은 늙은 듯했다. 진왕과 진왕비가 경야로 저택을 비웠어도 그는 평소처럼 정시에 진왕부에 들어가서 얼마 없는 사무를 처리했다. 그러고는 창가에 앉아서 넋을 놓고 이런저런 일들을 반복해서 생각했다.
저녁이 되어 서반들이 문서를 봉인하는 걸 지켜본 다음에 수녕백부로 돌아가 정원으로 들어가는데 문지기 어멈이 그를 향해 웃으며 축하했다.
“대야, 축하합니다. 새 식구가 늘었습니다.”
“고씨가 낳았느냐?”
강환장은 얼떨떨해졌다. 아침에 기척도 없었는데 이리 빨리 낳았나? 지난 생엔 고씨가 밤에 산기가 들어서 족히 다음다음 날 새벽까지 시달리다가 겨우 장자를 낳았다. 이번엔 어찌 이리 빠르지?
“고 이낭이 아니라 묵란 낭자입니다. 아들이에요.”
어멈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를 표정에 미소도 이상했다. 경멸하는 느낌이 난달까.
강환장은 넋이 나갔다.
“누구? 누구라고?”
“묵란 낭자요. 부인께서 매우 기뻐하신답니다.”
문지기는 수화문 안쪽을 향해 입을 비죽였다.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경사를 보고해도 상금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하지 말 걸 그랬다. 요 오지랖 넓은 입, 입!
강환장은 머릿속이 안개에 잠긴 듯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빠른 걸음으로 상방으로 달려갔다. 예를 갖출 겨를도 없이 진 부인을 빤히 바라보며 대뜸 물었다.
“누가 낳았다고요?”
진 부인은 싱글벙글했다.
“묵란이다. 아들이란다. 네 누이들과 아명을 지어주려던 참이었다. 이름은 네 부친이 지어야지. 네 장자 아니냐.”
“묵란이라니요? 묵란이 누굽니까”
강환장은 강렬하게 불안감이 몰려왔다. 안 좋은 일이 아직 더 남았단 말인가? 설마 이씨가…….
“묵란이 누구냐니. 고씨 시중들던 묵란이지. 너도 참. 거뒀으면 거뒀다고 말을 해야지. 다섯 달이 되어서야 알았지 뭐냐. 다행히 네 누이가 재빠르고, 묵란 그 계집애도 영리해서 그렇지, 하마터면 우리 강가의 장자가 고씨 손에 죽을 뻔했다. 고씨는 그런 점이 참 나쁘구나. 대가아, 있잖니…….”
진 부인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주절주절 떠들었고, 강환장은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 묵란? 다섯 달? 누구 아이를 품었기에?
“제 아이라고 누가 그럽니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네가 말해라!”
강환장은 이마를 짚으며 강완을 가리키며 물었다. 조마조마하며 오라비를 바라보던 강완은 강환장이 자신을 가리키자, 얼른 묵란이 회임한 사실을 고 이낭이 발견한 것부터 낱낱이 털어놓았다. 묵란이 세자야의 아이를 품었다고 하자 고 이낭이 질투로 미친 듯이 묵란의 배를 걷어찼으며, 묵란이 달아나서 처음에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가 나중엔 어떻게 된 일인지 강가 사당에 달려가 도움을 청한 것, 고 이낭이 질투가 심해서 수녕백부에 계속 있으면 고 이낭이 분명 그녀와 배 속의 아이를 해칠 것이라고 종친들에게 말해서 종친들이 그녀를 가족 사당에 묵게 했는데 조금 전에 가족 사당에서 묵란과 함께 있던 나이 든 비구니가 묵란이 아들을 낳았고 모자 모두 평온하다는 희소식을 전한 것까지 들은 강환장은 헉헉 숨을 내쉬며 뒷걸음질 쳤다. 그는 의자에 엉덩방아를 찧듯이 주저앉았다가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열었다.
“내 아이가 아니다! 내 아이가 아니야!”
진 부인은 넋이 나갔다.
“뭐라고? 네 아이가 아니야? 그럼 누구 아이냐?”
“제가 어찌 압니까?”
강환장은 미칠 것만 같았다.
“고씨는? 불러와라! 고씨는 분명 알 것이다. 불러와!”
고 이낭은 불룩한 배를 양손으로 받치고 허둥지둥 상방으로 들어왔다. 강환장은 그녀를 빤히 보며 물었다.
“묵란의 아이가 누구 아이냐? 솔직히 말해라!”
“세자야의 아이라고 묵란이 말했어요.”
고 이낭은 얼이 빠졌다. 무슨 말이야? 묵란의 아이? 묵란이 오라버니 아이라고 했는데?
“묵란을 불러와라!”
강환장은 기절할 것 같았다.
“금방 아이를 낳아서…….”
강완이 주저주저 대답하자 강환장은 관자놀이를 힘껏 눌렀다. 미칠 것 같았다. 묵란을 건드린 적이 없다. 묵란의 배 속 아이는……. 그렇지. 고가 아이겠지. 고가 대야 아니면 고가 노야의 아이겠지!
묵란이 꾸민 일일까, 아니면 그 여인이 꾸민 일일까?
강환장은 고 이낭을 노려봤다. 퉁퉁하고 촌스러운 얼굴부터 티 나게 더러워진 솜옷, 그리고 불룩 부른 배까지 훑어봤다.
정말 진저리가 났다.
묵란을 건드리지 않은 걸 고씨가 모를 리가 없다! 자신이 묵란을 건드린 적이 없는 걸 고씨는 안다. 그런데 묵란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시치미 떼다니. 고가 핏줄을 길러주길 바라는 건가?
“묵란이 낳은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 더러운 씨다! 그 잡것을 물에 빠뜨려 죽여라! 그리고 묵란도! 그 천한 년을 끌어내 내쫓아라! 가족 사당에 두다니. 강가 선조의 눈을 더럽힐까 두렵구나!”
강환장이 이를 갈며 분부했다.
방 안에 있던 사람은 진 부인부터 모두가 발광하는 강환장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봤다.
진 부인은 멍하니 있다가 주눅이 들어서 얼버무리듯 웅얼거렸다.
“결국 이러는구나. 그러니까 종친들 말이…… 네가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하더구나. 고씨도 별말 없지 않으냐. 아무리 고씨를 아껴도, 그 아이는 네 장자다…….”
“장자가 아닙니다! 말했지요. 내 자식이 아닙니다. 더러운 씨예요! 더러운 씨!”
강환장이 버럭 고함쳤다.
진 부인은 식겁하고 뒤로 물러나며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강환장은 벌떡 일어서서 방 안 가득한 두려움에 질린 얼굴들을 둘러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종친들께는 내가 가서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수녕백부에서 뛰쳐나간 강환장은 사당 쪽으로 달려가다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사당에 가서 무얼 하나. 족장을 찾아가자! 강환장은 방향을 틀어 말발이 제일 센 종친, 둘째 숙조부 댁으로 달려갔다.
숙조부 댁에 들어간 강환장은 상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침착해야 한다, 침착하게 이 일을 설명해야 한다.
강씨 가문에서 항렬이 가장 높은 둘째 숙조부는 일흔이 넘었지만 아직 정정했다. 그는 화항에 앉아 가장 예뻐하는 어린 손자와 바둑을 두다가 강환장이 들어오는 걸 보고 놀란 얼굴로 손짓했다.
“환장이 왔구나. 앉아라. 소육, 네 형님께 차를 따라드려라.”
강환장이 장읍하며 예를 갖췄다.
“잘 지내셨습니까. 번거롭게 할 일이 아닙니다만, 실로 다급하여 어쩔 수 없이 찾아왔습니다.”
강환장은 앉지 않고 공손하게 화항 앞에 섰다.
“앉아라. 앉아서 이야기해라. 이 귀한 손님이 모처럼 왔구나. 앉아라. 지난번에 날 찾아왔을 때 넌 겨우 소육만 했다. 아직 기억한단다. 네 아비와 함께 왔었지. 그때도 이렇게 서 있었단다. 앉아라, 앉아. 할아비 앞에서 체면 차릴 것 없다.”
강가의 둘째 숙조부는 성격이 아주 좋았다.
“예. 감사합니다.”
강환장은 자리에 앉아서 숙조부가 주절주절하는 말을 듣다가 할 수 없이 말을 잘랐다.
“중요한 일로 숙조부께서 나서 주시길 부탁드리러 찾아온 것입니다.”
“중요한 일? 말해라, 말해.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야. 네가 모처럼 찾아왔는데, 소육, 네 어미가 막 튀긴 과자 한 접시 가지고 오너라. 맛보게 네 형님에게 드려라.”
숙조부는 아랫사람을 잘 챙겼다. 특히 강환장처럼 용모도 훤칠하고 재주가 뛰어난 아랫사람은 더더욱.
“숙조부, 묵란이라는 시녀가 아이를 품고 얼마 전에 사당에 와서…….”
“그래, 나도 안다.”
강환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숙조부가 말을 잘랐다.
“사당을 지키는 아홉째가 찾아왔더구나. 네 저택에 고 이낭이 질투가 심한데 네가 그 아이를 총애한다고. 휴, 환장아, 이번 일은 말이다, 이 노인네가 잔소리 좀 하자. 고씨를 그렇게 끼고돌기만 하면 안 된다. 내가 고씨를 만난 적은 없지만, 만날 것도 없다. 용은 용, 봉황은 봉황을 낳는다고 하지 않아. 콩 심은 데 팥 나는 법은 없다. 쥐 새끼가 구멍을 뚫어도 닭장에서 봉황이 나진 않아. 고가 같은 집안에 괜찮은 아이가 어디 있겠느냐.”
“숙조부, 그런 게 아니라…….”
숙조부의 딴소리에 강환장은 다시 골치가 아팠다.
“네가 젊어서 그런다. 휴. 젊을 때 어리석은 짓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나도 젊었을 땐 어리석은 짓을 했다. 그 당시…….”
“숙조부!”
강환장은 다시 말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묵란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가족 사당에서 보내왔습니다.”
“아이고! 경사로구나! 사내아이냐 여자아이냐? 너희 백부에 첫 손자뻘 아이가 태어났구나! 삼대가 가족을 이루다니. 좋구나, 좋아!”
둘째 숙조부는 아이가 태어나고 혼인하는 이런 경사 이야기를 제일 좋아했다.
“숙조부, 제 아이가 아닙니다.”
강환장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내일 아침까지 본론은 꺼내지도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숙조부는 얼떨떨하다가 금세 깨달은 표정이었다. 나이가 들긴 했어도 노망이 나지는 않았다.
“환장아,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젊을 때는 누구나 어리석은 짓을 한다. 하지만 어리석더라도 잘못은 하면 안 되지. 고씨 이야기를 해 보자. 환장아, 내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 내 말은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다.”
강환장이 입을 열려고 하자 숙조부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막았다.
“내 말부터 들어라. 아무리 고씨를 총애해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 휴.”
숙조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환장아, 고씨 하나 때문에 황당한 일을 얼마나 했느냐. 은자 몇십 냥까지 고가에 주지 않았어! 쯧!”
그 이야기가 나오자 숙조부는 아까워 죽겠다는 듯 연신 혀를 찼다.
“잘 들어라. 나는 네가 먹은 밥보다 소금을 더 많이 먹었을 정도로 오래 살았다. 사람을 봐 온 지 칠십 년이 넘었어. 그 고씨, 이 할아비가 볼 것도 없이 고가만 봐도 안다. 좋은 아이일 리가 없다. 아이란 부모를 보면 아는 법, 부모를 보면 아이가 어떤지 안다. 아들은 아비를 닮고 딸은 어미를 닮는 법이다. 잘 들어라. 이건 틀리지 않는 이치다!”
“숙조부!”
숙조부의 엇나간 화제와 잔소리에 강환장은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 그래. 상관하지 않으마. 누굴 총애하든 상관하지 않으마. 고씨를 총애해도 된다. 하지만 자손을 모른 체하면 안 되지. 이건 큰일이다. 고씨가 언짢아할 것이 두렵다고 친자식도 모른 척할 셈이냐? 아들이냐, 딸이냐? 그래, 그래. 알았다. 내가 다 안다. 잘 들어라. 네가 앞뒤로 처를 들이면서 송사도 크게 했지. 고씨는 은자 몇십 냥을 날리게 했어. 네 아비가 손수 차용증도 쓰지 않았느냐! 그 차용증에 지장을 찍고 증인이 된 게 바로 나다!”
강환장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바탕 울고 싶었다.
“내 말 들어라. 우리 강가는 더는 망신당하면 안 된다. 지지난달에, 다섯째 기억하지? 얼마나 착한 아이냐. 모처럼 좋은 아내를 구했는데, 이야기도 다 끝냈었다. 그런데 상대가 수녕백 강가와 같은 가문이라는 걸 듣더니 무슨 말을 해도 안 된다고 하지 뭐냐. 이것 봐라! 다섯째 어미가 화가 나서 난리가 났었다. 내가 어렵게 말렸어. 환장아, 내 말 들어라. 우리 강가에 더는 망신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