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주 귀비의 복
상 태감의 말에 황상은 순식간에 주 귀비가 세상을 떠난 비통함으로 돌아갔다. 눈물이 나올 것 같고 일어설 기운도 없어졌다.
“부축해다오.”
황상이 손짓하자 태자가 다가가서 황상을 부축했다. 전전으로 그를 모시고 가려고 하자 영 황후가 소백에게 눈짓했다. 소백이 앞으로 나와 팔을 내밀었다. 영 황후는 소백의 부축을 받으며 황상과 비슷하게 비통한 모습으로 전전으로 향했다.
전전, 거대한 관 앞에 사람들이 양쪽으로 나뉘어서 새카맣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외 명부 쪽엔 복안 장공주가 맨 앞에서 회색 승복을 입고 뒤로 묶은 머리카락엔 나무 비녀 하나를 꽂고 방석 위에 다리를 틀고 합장하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비통한 얼굴로 나긋나긋, 살며시 걸어오는 영 황후를 고개를 들고 바라봤다. 주르르 엎드린 명부 중에 군계일학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 영 황후는 소백의 손을 놓고 손을 살짝 아래로 내리며 보일 듯 말 듯 예를 갖췄다. 복안 장공주는 살짝 눈썹을 까닥이며 시선을 피했다.
복안 장공주의 대각선 앞쪽에 의자가 놓여 있었다. 영 황후는 의자를 힐끔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내시에게 분부했다.
“방석으로 바꿔라.”
내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복안 장공주는 눈을 내리깔더니 경을 읊는지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에 방석이 있는지 상 태감에게 물어보거라.”
영 황후는 내시가 감히 대답할 수 없어서 망설인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내시는 내심 안도하며 얼른 상 태감에게 물으러 나갔다.
잠시 후, 내시가 방석을 안고 종종걸음으로 달려 들어와 의자를 치우고 방석을 놓은 다음 영 황후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의자를 들고 물러갔다.
삼베 휘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쪽에 앉은 황상은 애간장이 끊어질 듯이 눈물을 흘렸다. 영 황후는 소백의 팔을 놓고 영전으로 다가가 향을 올렸다. 복안 장공주는 경을 읊던 걸 멈추고 영 황후를 힐끔 쳐다봤다. 영 황후는 향을 피우고 돌아서서 방석 위에 앉더니 그녀처럼 다리를 틀고 앉아서 조용히 검은 관을 바라봤다. 사례관의 외침에 맞춰 울부짖으며 절을 하진 않았다.
복안 장공주는 눈썹을 까딱이며 입꼬리를 위로 끌어 올렸다.
거의 나란히 앉은 복안 장공주와 영 황후 뒤는 태자비 정씨, 그리고 측비 손씨였다. 두 사람 뒤는 조 노부인, 그리고 그 옆에 진왕비 진씨가 있었다.
태자비 정씨는 큰 소리로 울면서 손수건으로 쉴 새 없이 눈물을 닦았다. 얼마나 닦았는지 눈이 팅팅 붓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녀는 쩌렁쩌렁하게 울면서 쉴 새 없이 영 황후를 살폈다. 영 황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전에는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사황자와 혼인했을 때 잠시 수소문했지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모두 ‘시어머니’ 주 귀비에게 있었다.
주 귀비가 느닷없이 죽을 줄은 정말 몰랐다. 사왕야가 태자가 됐기에 앞으로 후궁의 주인이 될 줄 알았더니 웬걸 뜬금없이 황후가 나타났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어찌 됐든 거북했다.
측비 손씨는 서글프게 울어댔다. 대왕야부의 조씨가 느닷없이 죽더니 주 귀비도 느닷없이 죽었다. 조씨가 죽은 건 상관없었다. 비슷한 신세도 아니니까. 그러나 주 귀비가 죽어서 뒷배가 없어졌다. 앞으로 사는 게 얼마나 고달파질까. 어제부터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정씨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는데!
손씨는 그런 생각에 마음 아프고 걱정되어서, 갑자기 튀어나온 영 황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 노부인은 모든 이 중에 가장 처참하고 괴롭게 울었다. 황상의 울음소리보다 더 마음 아프고 가슴이 찢어질 듯이 들렸다. 눈이 흐릿해질 정도로 우는 조 노부인은 숨이 넘어갈 듯이 보였다. 가장 아끼는 자식이 이렇게 눈을 감았다. 처참하게 죽었다. 피를 철철 흘리고 죽은 딸을 본 그날 밤부터 지금까지, 차라리 숨이 멎어 이대로 딸을 따라가길 바랐다.
진왕비 진씨는 손수건으로 한쪽 얼굴을 가리고 울려고 노력하며 수시로 어깨를 흔들었다. 조 노부인 옆이라 자리가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 조 노부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고 있었다. 그녀가 진짜로 우는지 가짜로 우는지도 아마 몰라볼 것이다.
진씨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자주 입궁하지 않고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아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녀에겐 낯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복안 장공주를 처음 보는 것이며 영 황후는 더더욱 처음이었다. 똑같이 정좌한 두 사람이 마력처럼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쉴 새 없이 힐끔거렸다. 복안 장공주의 등은 대나무 같았고 영 황후의 뒷모습은…… 검 같았다!
오황자는 어떤 사람일지. 왕야가 영 황후와 오황자 모두 출타하지 못할 정도로 병약하다고 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영 황후는 아무리 봐도 병약한 사람 같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검 같았다. 일어서서 곧바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검.
사왕야가 태자가 된 후로 왕야는 생각을 접은 듯한데…….
정신이 딴 데 팔린 진씨 뒤에 백 노부인이 무릎 꿇고 있었다. 백 노부인은 반듯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절을 했지만 눈물은 형식적으로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뿐더러 비통, 상심, 그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굳고 표정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조아렸다가 들어 올리는 틈마다 정좌한 영 황후와 복안 장공주를 힐끔거렸다.
아까 장공주가 한 말을 들어보면 앞으로 보록궁에 묵을 듯했다. 보록궁에 살게 되면 영 황후와는…….
백 노부인은 고개를 조아리고 몸을 일으키면서 똑같이 꼿꼿하게 앉은 복안 장공주와 영 황후를 다시 힐끔 봤다. 이 존귀한 귀인, 둘 다 고집이 보통이 아니니 잘 지내기 어려울 것이다.
전 노부인 역시 영 황후와 복안 장공주를 쉴 새 없이 힐끔거렸다. 다만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황자가 새해에 여덟 살이 된다. 새해가 되면 글선생을 골라야 하리라. 궁에 나이 어린 황자는 오황자 하나뿐이고 황손은 하나도 없다. 글선생은 오롯이 오황자의 선생이 된다. 선생을 고르는 데 얼마나 무시무시한 명쟁암투가 벌어질까.
전 노부인의 비스듬히 뒤쪽에 여 승상의 맏며느리 원 부인이 무릎 꿇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절하고 일어나는 틈에 수시로 영 황후를 살폈다. 아들 말이, 영 황후를 궁으로 모셔 대례를 주지하게 한 사람이 시아버지 여 승상이라고 했다. 공적인 일을 공적인 입장에서 한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제가 낳은 아들을 모를까! 아들 얼굴만 봐도 솔직히 말하지 않은 걸 알 수 있었다.
묵 부인은 원 부인과 나란히 무릎을 꿇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앞에 있는 모친 전 노부인을 수시로 살폈다. 어제 소자람이 묵칠과 성 밖으로 나가 고내내 앞에 향을 피운 일을 아직 전 노부인에게 말씀드리지 못했다. 그 생각만 하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향을 피우러 간 건 별일 아닌데 하필 수국공과 마주쳤다. 역시 화는 연달아 닥친다 했던가.
묵 부인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곡을 했다. 이 일을 어찌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나. 어머니는 자람이 철든 아이라고 항상 말씀하시는데, 하필 이번 일이 자람의 생각이라…….
거애(擧哀)가 한 바퀴 끝나자, 아직도 애절하게 통곡하는 사람은 조 노부인뿐, 다른 사람은 허리를 세우거나 엎드린 채 무릎 꿇고 앉아서 다시 곡할 차례를 기다렸다.
영 황후가 일어서서 조 노부인 앞으로 걸어가 허리 숙여 그녀를 부축했다.
“노부인,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연세가 드셨는데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몸이 상해서 쓰러지면 주 귀비가 마음 놓고 떠나지 못합니다.”
조 노부인은 우느라 말도 하지 못했고 영 황후는 몇 번 부축하다가 일으키지 못하자 돌아서서 내시에게 분부했다.
“와서 노부인을 일으켜라. 의자를 가지고 오고.”
이번엔 내시가 매우 말을 잘 들었다. 내시 둘이 성큼 다가와 양쪽에서 조 노부인을 들어 올려서 다른 내시가 옮겨온 의자에 앉혔다.
복안 장공주는 꼼짝하지 않고 정좌한 채 영 황후의 방석과 기절할 듯이 우는 조 노부인이 앉은 의자를 바라봤다.
음, 영 황후도 눈가림을 잘하는 사람이군.
조 노부인을 부축해 일으킨 영 황후는 이번엔 백 노부인에게 다가갔다.
“노부인, 노부인도 잠시 일어나서 쉬세요. 바닥이 찹니다. 전 노부인도 일어나서 잠시 쉬세요.”
백 노부인과 전 노부인은 그 김에 일어섰다. 영 황후는 무릎 꿇은 태자비 정씨 옆에 있는 측비 손씨를 바라봤다.
“회임했으니 너도 일어나거라.”
손씨는 얼떨떨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정씨를 바라봤다. 정씨가 눈을 부릅떴다. 누구 보라고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이야!
“네가 정씨냐?”
분부를 마친 영 황후는 조씨가 분부대로 일어서든 말든 상대하지 않고 정씨를 바라봤다. 정씨는 살짝 몸을 수그리며 ‘예!’ 하고 대답하고는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다행히 그녀가 뭐라고 할 필요 없이 영 황후가 분부했다.
“태자에게 다녀오너라. 지금은 섣달이라 얼음이 바로 얼 정도로 날이 매섭다. 황상께 내가 말하는 네 가지를 부탁드려 보라고 해라. 첫째,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천막에 짚을 한 겹 더 씌워야 한다. 둘째, 화로가 더 필요하다. 셋째, 모두에게 두꺼운 방석을 내어주고 한 시진마다 일각 쉬게 해야겠다. 그때마다 뜨거운 탕을 달라고 해라. 넷째, 나이 든 부인과 노부인은 무릎 꿇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해 주시라 해라. 그것도 주 귀비의 복을 쌓는 일이니까.”
태자비 정씨가 눈이 똥그래져서 영 황후를 바라봤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 나를 부리는 건가? 아, 부려도 되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그런데 무슨 뜻이지? 태자에게 말하라고? 이게 나와 태자가 상관할 일인가?
“어서 가라. 곧 다시 곡을 시작해야 한다.”
정씨가 꿈쩍도 하지 않자 영 황후가 가차 없이 재촉했다. 정씨가 서둘러 일어서서 걸음을 내딛다가 방향이 아닌 걸 깨닫고 돌아서서 천막 밖으로 나갔다. 옆 칸으로 가서 영 황후의 그 길디긴, 이미 반은 잊어버린 분부를 태자에게 전했다.
복안 장공주는 영 황후, 그리고 바닥 가득 무릎 꿇은 내외 명부 여인을 바라보며 웃는 듯 마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환심을 사려는 거군.
영 황후는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내시를 손짓해서 불렀다.
“양빈은?”
내시가 얼떨떨해하더니 대답했다.
“아룁니다, 마마. 소, 소인은 모릅니다.”
“상 태감에게 가라. 가서 황상께 어째서 양빈이 안 보이는지 여쭤보라 해라.”
영 황후의 안색이 어두워 보이자, 내시는 공손하게 대답하고 후다닥 상 태감을 찾으러 갔다.
영 황후는 내시에게 기댄 채 아직도 통곡하는 조 노부인을 힐끔 보고는 내시를 다시 불렀다.
“상 태감에게 가서 황상께 태의 두 사람을 청해야 하는 건 아닌지 여쭤보라 해라. 조 노부인이 지나치게 상심하여 맥이 상할까 걱정이다. 그리고 다른 노부인들도. 괜히 병이 났다간 주 귀비의 복을 쌓는 데 지장이 생길 것이다.”
내시가 얼른 대답하고 후다닥 달려갔다.
복안 장공주는 달려나간 내시 둘을 눈을 반짝이며 바라봤다. 빙그레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곁눈으로는 천막 입구를 살피며 상 태감이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역시나,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상 태감이 잰걸음으로 달려와서 영 황후 앞에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황상의 전교입니다. 영씨는 황후, 후궁의 주인이다. 화로니 태의 같은 제반 사항은 알아서 처리하라. 일일이 짐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이상입니다.”
영 황후는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교를 전한 상 태감은 얼른 깊이 장읍하고는 허리를 숙인 채 뒷걸음질 치며 다시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영 황후는 내심 안도하며 고개를 들다가 복안 장공주의 웃는 듯 마는 듯한 시선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마주하다가 이내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상 태감이 전교를 전한 후로는 영 황후가 다시 분부할 때마다 시녀, 내시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명이 떨어지는 대로 곧바로 행했다.
백 노부인은 영 황후를 잠시 빤히 보다가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조금 멍한 눈빛으로 천막 안을 바라봤다. 그녀의 딸도 이렇게 속셈과 수완, 모두 갖췄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참지 못했고, 영 황후 같은 이런 시운도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