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85화 (285/463)

285화: 와르르 무너진

주 추밀부사는 얼굴이 다 시퍼레졌다. 괜히 으름장을 놓는 말이 아니었다.

“그럼 어쩌나?”

주 추밀부사는 으스스해지는 것 같아서 무심결에 두봉을 여미고 또 여몄다. 고서강이 주 추밀부사를 흘겨봤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자네가 할 엄두가 있는지 없는지에 달렸네.”

“고 사사, 말씀하시게!”

주 추밀부사는 이판사판인 얼굴이었다.

“자네 주가에 대왕야를 위한 사사(死士)들이 있지?”

고서강의 으스스한 말투에 주 추밀부사의 얼굴이 굳었다.

“영원의 수하는 많지 않네. 손을 댄 이상 끝까지 가야 하네. 뿌리를 뽑아야 해! 적자를 제거해 버리면 적어도 위협이 반으로 줄지.”

고서강의 말에 주 추밀부사는 숨을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시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알았네! 손을 댄 이상 끝까지 가야지!”

다음 말은 하지 않았다. 형님이 저택의 돈을 거의 탕진하면서 예전부터 키우던 사사들이 있었다. 형님이 꼭 잡고 있어서 손을 대지 못했다. 그 사사들을 형님 손에서 뺏어 올 수 있을지 셈하고 있었다.

음, 그래, 이 방법이 제일 좋겠군. 뺏어 올 것도 없이 그냥 가져다 쓰면 되지.

가는 내내 질주한 영원은 오시 정각 전에 별궁 밖에 당도했다. 영원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별궁을 둘러 계속 달려가서 호위영 문 앞에서 고삐를 잡으며 목소리를 높여 고함쳤다.

“성지다!”

통령이 허둥지둥 안에서 나왔다. 영원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성지를 흔들어 펼쳐서 통령 앞에 내밀었다. 통령은 목을 길게 빼고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머뭇거렸다. 영원이 콧방귀 뀌며 성지를 그의 손에 건넸고, 통령은 헛웃음 치며 성지를 들고 읽었다. 읽고 또 읽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영원을 바라봤다.

영원이 다시 성지를 가지고 와 품에 넣었다.

“귀비 마마가 귀천하셨다. 황후마마는 어서 궁으로 돌아가셔서 귀비 마마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 정문을 열어라, 어서!”

그는 성지를 받고 온 사자라서 반드시 정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누님과 소오는 더더욱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와서 정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통령은 당황한 모습으로 영 황후 거처로 향하는 대문을 겹겹이 밀어젖혔다. 영원은 말을 타고 그 길을 달려갔다. 대전 문 앞, 영 황후가 오황자의 손을 잡고 꼿꼿하게 서서 날 듯이 말을 몰고 육중한 문을 겹겹이 지나쳐 다가오는 아우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오황자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보다가 작게 “와!” 하고 감탄했다. 외숙, 너무 멋있다!

영원은 대전 문 앞까지 달려가서 계단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에서 뛰어내렸다. 말은 앞발굽을 치켜들었다가 내리고는 돌아서서 옆으로 물러났다.

영원은 재빠르게 뛰어서 단숨에 영 황후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누님, 하고 외치더니 고개를 들고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영 황후를 덥석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다.

영 황후가 영원을 일으키려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양팔을 덜덜 떠는 영원을 몇 번을 잡아당겨도 일으키지 못했다. 영 황후는 입을 떼려고 해도 목이 꽉 막혀서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아서 그저 살며시 등을 두드리며 하늘이 무너진 듯이 우는 아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황자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눈물을 흘리다가 콧물까지 흘리며 우는 외숙을 멍하니 바라봤다. 육중한 대문을 겹겹이 지나쳐 말을 타고 달려오던 용맹하고 멋진 모습은 그 눈물에 와르르 무너졌다. 지금 이 순간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오황자의 일생에 외숙의 인상은 이 모습으로 남고 말았다.

오황자는 반쯤 무릎 꿇은 영원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가서 눈물 콧물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는 외숙을 올려다봤다. 감탄 가득한 얼굴로 수시로 나직이 ‘와우!’하고 외치면서.

빗물처럼 내리는 눈물 사이로 오황자의 흐릿한, 감탄해 마지 않는 얼굴을 본 영원은 켁, 목이 메었다.

“외숙, 천천히 우세요.”

오황자가 영원의 등을 두드렸다.

“칠야, 그만 우세요. 오가아가 비웃겠습니다.”

소심은 마음도 시리고 우습기도 한 기분으로 얼른 설득했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어릴 때처럼 손톱만 한 사소한 일로 이리 물어. 네 눈물에 군대 일곱은 침몰되겠구나.”

영 황후가 잡아당기자 영원이 그 김에 일어섰다. 오황자는 실망한 얼굴로 영원을 올려다봤다.

“외숙, 다 우셨습니까? 조금 더 우시지, 왜.”

영원은 오황자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는 소심이 건넨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힘껏 닦았다.

“누님, 꿈에서도 누님을 만났습니다.”

“그래.”

영 황후는 웃고 싶고 울고 싶은 기분으로 영원의 두봉 옷깃을 쓰다듬고 두봉 끈을 만져주었다.

“이렇게나 컸구나. 내가 떠났을 때 겨우 지금 오가아만 했는데. 지금은 내가 널 올려다봐야 하는구나.”

“마마, 칠야, 들어가서 말씀 나누세요. 춥습니다.”

소심이 상기시키는 말에 영원이 정신 차렸다.

“누님, 얼른 가야 합니다. 내일 인시 말 전에 궁에 도착하라는 전교입니다. 물건은 다 챙겼습니까? 챙길 것도 없습니다. 제가 다 가지고 왔어요. 마차는 들어올 수 없어서 밖에 세워뒀습니다. 얼른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 가자.”

영 황후는 지극히 시원스럽게 오황자의 손을 잡았다. 소심을 비롯한 시녀들은 각자 보따리를 안고 영 황후 뒤를 따랐다. 영원이 씨익 웃었다.

“예전에 행군할 때 출발하자면 곧바로 출발하던 때와 똑같군요. 갑시다!”

영원이 휘파람을 물자 키가 크고 잘 빠진 검은 말이 달려와서 고분고분 영원 뒤에 섰다. 오황자의 두 눈이 반짝였다.

“외숙, 외숙, 나도 태워주세요. 안아서 올려줘요. 나 말 탈 줄 알아요!”

“오가아, 어미가 뭐라고 했느냐.”

영 황후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어머니, 아직 별궁 대문을 넘지 않았잖아요. 아직 별궁 안에 있다고요.”

오가아가 고개를 들고 이치를 따지자, 영원이 하하 웃었다.

“소오, 훌륭하다. 나를 닮았어! 아이는 외탁한다더니! 생질은 외숙을 닮는다지 않아! 자, 안아서 올려주마. 우리 영가 사람은 걸을 줄 몰라도 말은 탈 줄 알아야지!”

영원은 오황자의 허리를 두르고 안아서 안장 위에 올린 채 고삐를 잡아당겼다. 오황자는 말에 타고 흥분해서 우와 고함쳐댔다. 영 황후는 들떠서 두 눈을 빛내는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시큰해졌다. 아직 별궁을 떠나지 않았으니 즐기게 해주자 싶었다.

대전 대문을 나선 영 황후는 무릎을 꿇고 배웅하는 별궁 호위들을 둘러보며 겹겹의 중문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궁전을 돌아봤다. 그 작은 궁전이 그녀가 거의 십여 년 갇혀 살던 곳이었다.

영 황후는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영원이 어느새 오황자를 말에서 안고 내려 마차에 태웠다. 영 황후가 뒤따라 마차에 오른 뒤 소심이 따라 탔다. 다른 시녀와 어멈들은 영원이 데리고 온 호위에게서 말을 건네받고는 조금 낯설어하다가 곧 지극히 노련하게 말안장을 정리하고 말에 올라탔다.

영원도 말에 타고는 홀로 앞장서서 앞으로 나섰다. 호위가 채찍을 휘두르자 말 두 마리가 고개를 치켜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차 세 대가 시녀와 호위들의 호위하에 일사불란하게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잠시 앞으로 달렸을 때, 유월이 먼저 데리고 왔던 호위들이 몰려와서 마차와 영원 앞뒤를 에워싸고 함께 경성으로 달려갔다.

마차에 오른 영 황후는 휘장을 걷고 밖을 내다봤다. 유월이 호위들을 데리고 오는 걸 보고는 휘장을 좀 더 걷어서 유심히 보다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칠, 그동안 많이 성장했구나.

영 황후는 휘장을 내리고 마차 안을 살폈다. 소심은 벌써 작은 서랍을 열어 보고 있었다. 그 서랍 옆에서, 위에 갖가지 홈이 박힌 홍동 고리가 달린 자단목 판자를 꺼냈다. 뒤집어 봤더니 접힌 네 다리가 보이길래 잡아당겨 펼쳤다. 두꺼운 방석 위에 동그란 구멍 네 개가 보이길래 눈빛을 빛내며 네 다리를 집어넣고 힘껏 눌렀더니 경쾌하게 딸깍 소리가 들렸다. 흔들어 봤더니, 작은 탁자는 마차 바닥에 단단히 끼워져 있었다.

“정말 정교하네요.”

소심이 소리 없이 웃었다. 마차 안을 한 번 다 살핀 영 황후는 솜을 감싸 둔 마차 벽을 눌러 보았다. 오황자도 매우 재미있게 보다가 소심 쪽으로 다가가서 함께 마차 주변에서 서랍을 찾았다. 여기저기 서랍이 숨겨진 걸 보고 흥분해서 깔깔 웃어댔다.

소심은 홍동 보온 주전자, 찻잔, 서너 가지 간식을 찾아냈다. 심지어 책도 한 권 있었다. 영 황후는 그녀 옆쪽 마차 벽을 더듬다가 툭 튀어나온 홍동 장식을 발견하고 눌렀다. 작은 서랍이 튀어나오고 서랍 안엔 하얀 자수 비단 손수건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나를 꺼내 펼쳐 봤더니, 손수건 네 자락에 매우 정교한 나비와 목단이 수 놓여 있었다. 빙글 돌려보니 한 자락에 작게 ‘동(桐)’자가 있었다.

영 황후는 나머지 손수건도 꺼내서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모두 ‘동’자가 있었다. 영 황후는 손수건을 털면서 휘장을 젖혀 고개를 내밀고 말 위에 탄 아우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고개를 숙여 손수건을 쳐다보고 가볍게 콧소리를 내고는 휘장을 내리고 손수건을 서랍에 넣은 뒤 서랍을 닫았다.

소심은 한 바퀴 다 둘러보고 오황자에게 차를 따라 주고 간식 상자를 탁상에 놓았다. 오황자는 차를 마시면서 소심과 이야기를 나눴다.

“언제 경성에 도착하지? 들어갈 때 성문을 좀 봐야겠다.”

“들어갈 땐 분명 해가 졌을 거예요. 하지만 성문은 보일 거예요. 성문 위에 등롱이 잔뜩 걸려 있거든요.”

“소심, 경성은 정말로 진하 부두보다 몇십 배 커?”

“더 크지요. 진하 부두보다 몇백 배는 클걸요?”

영 황후는 폭신한 마차 벽에 기대면서 대충 잡히는 대로 등 받침을 들어 뒤를 받쳤다. 소심과 이야기하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오래전에 퇴색되었던 생기가 드디어 뿌리를 내리고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 그 희망이 그녀 마음속에서 잎을 키웠다. 아들을 위해 그 희망을 울창하게 키울 것이다. 아들의 일생을 평온하게 지켜줄 수 있도록 울창하게 키울 것이다.

마차 밖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가 갈수록 단조로워졌다. 오황자는 어느새 잠들었고 영 황후도 가물가물 졸고 있었다. 멀리서 아득하게 천둥소리가 콰광 하고 울리더니 잠시 후 비가 촘촘히 마차 위로 떨어지면서 지붕이 타닥타닥 울렸다.

비가 내리는구나.

영 황후가 몸을 일으켜 휘장을 젖히자, 소심이 후다닥 다가가 창문을 밀어 올렸다.

“오가아가 잠들었길래 바람이 들어올까 봐 창문을 닫아두었어요.”

소심이 나지막이 설명했다.

“칠야가 정말 세심하세요. 마차 안팎이 부족한 게 하나 없어요.”

“세심한 게 저 아이가 맞을까?”

영 황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머리를 살짝 내밀었더니 마차 밖으로는 폭우가 쏟아졌다. 대열 앞에 유리등 몇 개가 말의 움직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마차 속도가 아까보다 훨씬 느려졌다.

영 황후는 칠흑처럼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가아를 안고 별궁으로 갔던 날, 그날 새벽에도 이런 폭우가 내렸다.

솨솨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갑자기 “자객이다!” 하고 외치는 고함과 함께 칼로 뼈를 가르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별안간 멈춰 섰다. 영 황후는 한 손으로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다른 손으로 마차 창문을 재빨리 끌어 내려 닫았다. 소심은 오가아를 품에 안은 채 마차 벽에 등이 세게 부딪쳤다.

거의 동시에 마차가 흔들리더니 누군가 마차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다. 챙챙, 검날이 부닥치는 소리가 폭우 소리보다 더 촘촘히 들렸다.

“어머니!”

오가아가 놀라서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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