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84화 (284/463)

284화: 손을 댄 이상 끝까지 간다

“예.”

금군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말을 전하지 말라는 명령은 없었다. 게다가 주사를 만나는 것은 관례로도 허락된 일이었다.

양왕부 정문에 서서 공인이 대문을 막는 것을 뒷짐 진 채 바라보던 수국공은 금군의 보고를 듣고 안 그래도 어둡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그는 그 금군을 매섭게 노려봤다. 이 오지랖 넓은 놈을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때가 어느 때인데 만나긴 누굴 만난단 말인가. 만나서 또 무얼 한다고.

수국공은 대황자가 아까 들어간 측문을 힐끔 보고는 옆으로 옮겨서 공인에게 명령했다.

“저쪽도 어서 막아라.”

몇몇 금군이 다가가 문턱을 채우고 문을 닫으려는데 대황자가 안에서 달려 나오며 처참하게 고함쳤다.

“외숙! 할 말이 있습니다! 외숙! 이리 오십시오! 내 말 들어보세요! 외숙!”

금군들이 멈칫하고 고개를 틀어 수국공을 바라봤다. 수국공은 싫은 표정과 그보다 더 두려운 얼굴로 허둥지둥 측문에서 더 멀어졌다. 그리고는 호위들 뒤에 숨어서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며 호통쳤다.

“일을 어찌 하는 것이냐! 저러다가 달려 나오면 어쩌란 말이냐! 항명하려는 것이냐!”

금군들이 대황자를 덥석 밀어 넣고 깔끔하게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옆에서 기다리던 공인들이 후다닥 다가가 쇳물로 자물쇠를 봉했다. 옆에 있던 기와공도 같이 나와서 쿵쾅쿵쾅 벽돌을 발라 문을 봉했다.

측문 안, 대황자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며 고함쳤다.

“외숙! 부탁입니다! 외숙!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요. 외숙! 외숙! 이 짐승 같은 놈! 감히 날 만나지 않아? 이 짐승 같은 놈!”

금군은 무표정했고, 기와공은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벽돌을 옮겼다. 벽돌이 재빨리 쌓여가고, 대황자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은 담벼락 안에서 작아졌다.

왕부 안, 거의 모든 이가 갈수록 높아지는 담을 바라봤다. 처음에 놀라고 두려워하던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높은 담장 안엔 우는 소리, 고함이 가득했다.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로 울부짖는 대황자의 쉰 목소리와 함께 아수라장이 된 왕부는 종말이 다가온 지옥 같은 모습이었다.

도요는 창백해진 곽씨를 부축하고 창 앞에 서서 저 멀리, 이미 눈에 보이게 높아진 담장을 내다봤다.

“왕비!”

도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담장이 없더라도 우리는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지 않았느냐. 높이 쌓든 말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겠니.”

곽씨는 매우 평온한 마음으로 높은 담장을 바라봤다. 두렵고 괴로울 줄 알았는데, 오로지 평온하기만 했다. 오히려 통쾌한 마음도 들었다. 그날 조씨를 붙잡고, 그 천한 년을 호수에 빠뜨렸을 때처럼 통쾌했다.

죽으려면 다 같이 죽어야지!

안원후부, 소자람은 자기 거처에서 쉴 새 없이 서성였다. 수시로 멈춰서서 양팔을 휘두르고 하핫 고함쳤다. 그렇게 몇십 바퀴 돌다가, 걸음을 멈추고 문밖에서 구경하는 사환을 향해 손짓했다.

“후야께서 준비 다 되셨는지 보고 오너라. 언제 출발할 건지 말이다.”

사환은 재빨리 달려갔다가 금세 돌아왔다.

“세자, 후야와 부인께서 지금 입궁하여 경야할 물건을 준비 중이라고 성 밖으로 가지 않으신답니다.”

“뭐라고?”

소자람이 중얼거리면서 다시 몇 바퀴를 더 돌다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걸음을 멈췄다. 마음이 너무 들써서 얼른 나가서 풀어야만 할 듯했다.

“난 좀 나갔다가 오마. 부인께서 물으시면, 금방 돌아온다고 전해라.”

소자람은 분부하고 성큼 나가서 말에 올랐다.

골목 앞까지 온 소자람은 망설이며 좌우를 둘러봤다.

어디로 간다? 음, 소칠을 만나 이야기해야겠군. 뱃속 가득한 할 말을 할 곳이라곤 소칠밖에 없지.

소자람은 묵 승상부로 직행했다. 자주 승상부에 들르는 그는 기별 없이 묵칠의 거처로 달려가곤 했다.

주 귀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일로 묵 이야가 묵칠 대신 휴가를 청하고 함부로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명령했다. 따분해서 나귀 울음소리를 흉내 낼 지경이던 묵칠은 소자람이 나타나자 매우 기뻐하며 그를 잡아끌었다.

“형님, 들었어? 궁에 사람이 죽었대.”

“이렇게 큰일을 어찌 모르냐. 대왕야가 독으로 주 귀비를 독살했다잖으냐!”

그 이야기가 나오자 소자람은 흥분해서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묵칠은 눈알이 다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게, 정말이었어? 야우에게 듣긴 했는데, 그걸 어찌 믿겠어! 대왕야가 왜? 어떻게 귀비 마마를 독살할 수 있지? 독살해도 사왕야를 해야지. 형님, 약을 잘못 먹인 거 아닐까?”

“알게 뭐냐! 어쨌든 귀비는 죽고 대왕야는 위리안치되었다. 사왕야는 태자가 된다. 하나같이 큰일이지!”

소자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고모부는 기뻐하시지?”

묵칠이 소자람을 쿡쿡 찔렀다.

“기뻐하시지. 처음에 들었을 때는 못 믿으셨는데 나중에 사실이라는 걸 알고 고모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셨다. 정말이지……. 휴.”

“고모……, 그러니까 형님 고모님 말이야. 불쌍하지! 형님 고모님께 말씀드려야 할 일이다! 지하에서도 소식 듣고 이제라도 편히 눈 감으셔야지.”

묵칠의 말에 소자람이 툴툴거렸다.

“그러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성 밖으로 나가서 고모님께 말씀드리려 했는데. 나중에 궁에서 경야하라고 소환할지 모른다면서 가지 않겠다지 무어냐. 죽어서도 이리 발목을 잡다니. 아버지도 참. 하루 병가 내면 될 것을. 아니면 고모님께 향 올리러 간다고 하던지. 그게 더 중요한 일 아닌가?”

“경야를 하더라도 형님 집안까지 갈 일은 아니지 않나? 아무리 총애받았대도 귀비인데. 그게 말이 되나? 고모부님도 참!”

묵칠도 덩달아 투덜대더니 불현듯 물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가 성 밖에 가서 형님 고모님께 말씀드릴까? 어차피 우린 할 일도 없잖아. 할 일 없이 가만 있을 것 없잖아.”

“그렇지!”

소자람이 잠시 생각하다가 외쳤다. 그러게 말이다. 고모님께 향 올리고 그 일을 전하는 데 굳이 아버지가 갈 것도 없다. 자기가 가면 되는 것 아닌가.

“가자!”

묵칠은 나간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두 사람은 일어서서 두꺼운 두봉을 걸치고 사환과 종복을 데리고 억울하게 죽은 소씨를 위로하러 성 밖으로 달려갔다.

주육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처음엔 모친이 깨우더니 조모를 궁에 모셔다드리고 오라고 했다. 조모를 모셔다드리고 왔더니 부친이 깨웠다. 호위와 종복을 데리고 동화문에서 사왕야를 기다리다가 사왕야가 나오면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지키라고 했다.

아침까지 기다려도 사왕야가 나오지 않았다. 저택에 돌아온 후에야 어젯밤에 무슨 사달이 난 건지 알게 되었다. 고모님이 세상을 떠났다. 대왕야가 고모님을 독살했고, 사왕야가 태자가 되었다.

수국공부 위아래가 난리가 났다. 조모는 궁에 들어간 이래 나오지 않았고, 모친과 백모도 조모를 모시러 입궁했다. 부친은 어디에 갔는지 모르겠고, 백부도 어디에 갔는지 모른다. 마음이 턱 막힌 것 같은 기분으로 저택을 한 바퀴 돌았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서 저택에서 나와서 경부 관아로 달려갔다. 영원 형님이 없길래 정북후부에 갔더니 성지를 받고 출타했다고 한다. 오늘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에 주육은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가 풀이 죽어서 말을 타고 돌아왔다. 말이 움직이는 대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묵 승상부로 향했다.

묵 승상부에 갔더니, 문지기 말이 칠소야가 출타했단다. 주육은 더 울적해져서 눈물이 터질 뻔했다. 겨우 말에 올라 어슬렁어슬렁 걷는데 저 멀리 연향루 불빛이 보였다. 그는 연향루를 가리키며 무기력하게 저기로 가자고 분부했다.

아라와 술 한잔해야겠다.

연향루, 두 행수는 주육이 온다는 소식을 다다가 전하는 걸 아라와 함께 듣고는 손을 떨다가 찻잔의 찻물을 쏟고 말았다.

“신중히 모셔라. 절대로 성질부리지 말고. 성질부릴 때가 아니다!”

두 행수가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다시 당부하는 말에 아라는 마늘 빻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경중을 알아요.”

주육이 난간을 붙들고 괴로운 얼굴로 계단을 올라 실내로 들어와서 연탑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다는? 따듯한 술을 내오너라. 삼십 년 된 여아홍으로.”

“어서 가!”

아라가 다다를 밀자 다다는 허둥지둥 내려가 삼십 년 된 여아홍을 열러 갔다.

“왜 이렇게 지치셨어요?”

아라가 주육 곁에 앉아서 유심히 그의 안색을 살폈다.

“말할 기분 아니다. 가만히 두어라.”

주육이 무기력하게 손사래 쳤다. 가슴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데 뭐가 그렇게 괴로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라는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살금살금 뒤로 돌아가 조심스럽게 주육의 머리를 문질러주었다. 주육은 편안한 듯 숨을 후우 내뱉으며 머리를 아라 품에 기댔다. 다다가 한 주전자 가득 따듯한 삼십 년 여아홍을 가지고 올라올 때까지 머리를 주물러주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다다가 주전자를 들고 아라 손에 들린 작은 주전자에 술을 채웠고, 아라는 작은 주전자로 주육의 잔에 술을 따랐다. 주육은 매우 빠르게 연달아 잔을 비웠다.

두어 주전자 마신 후, 주육이 길게 술 트림을 하자 아라는 어느새 취기가 오른 그의 모습에 잔을 뺏어 왔다.

“육소야, 저랑 같이 마셔요.”

“그럴 것 없다.”

거나하게 취한 주육은 잔을 다시 뺏으려고 손을 뻗었다. 눈앞에 잔이 마구 흔들려서 손을 뻗어도 술잔을 가지고 오지 못했다.

“육소야, 자, 제가 먹여드릴게요.”

아라는 찻잔을 들고 주육 입가에 가져다 댔다. 주육은 술인지 차인지도 모르고 꿀꺽꿀꺽 마셨다. 아라가 계속 먹이자 주육이 잔을 밀치고는 아라의 품에 안겨 가슴에 머리를 묻고 엉엉 울었다.

“아라, 고모님이 돌아가셨다. 날 제일 아끼던 고모님이, 돌아가셨다.”

처음엔 말을 하던 주육은 우느라 나중에는 헐떡헐떡,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라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육을 품에 안고 어색한 동작으로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휴, 주 귀비가 죽었다고 이렇게까지 상심하고 이렇게까지 우는 사람도 있구나.

통곡하면서 울분을 다 터트린 주육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후련해진 듯 아라 품에 안겨서 그대로 잠들었다.

궁에서 나온 고서강은 물속에 가라앉아 물이 뚝뚝 흐를 정도로 얼굴이 어두웠다. 주 추밀부사가 경쾌한 걸음으로 따라와 후련하고 밝은 얼굴로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제 됐네. 드디어 대국이 정해졌어.”

고서강은 싸늘한 눈으로 주 추밀부사를 흘겨봤다.

“너무 기뻐하지 말게. 아직 이르네. 태자가 되면 무얼 하나? 이 황조를 세운 이래 폐한 태자가 몇인가? 죽은 태자는 또 몇인가?”

“고 사사, 지나친 걱정 아닌가?”

주 추밀부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나쳐? 오황자, 황상의 적자, 영원의 생질이 내일이면 경성에 나타나네. 문무백관 앞에 나타나고 황상 앞에 나타나는데, 지나친 걱정이라?”

고서강이 연신 비웃었다.

“황상께서는 태자 전하를 제일 아끼시네.”

주 추밀부사는 말은 그렇게 해도 불안한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몰려왔다. 고서강은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 아직도 모르는가? 황상이 사왕야를 제일 아낀 것이 아니라 귀비 마마가 사왕야와 대왕야를 제일 아낀 걸세. 황상은 귀비 마마를 제일 아끼는 것이고. 하지만 지금 귀비 마마는 세상을 떠나셨네! 그 무지렁이가 제 앞날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높은 담장 안에 가뒀어. 사왕야도 말려들었고!”

주 추밀부사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래도 변함없지 않은가. 귀비 마마를 향한 황상의 마음이…….”

“정이란 살아 있어야 있는 걸세. 사람이 죽으면 정도 같이 죽어!”

고서강의 말은 매우 가차 없었다.

“주 형,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말게. 잘 생각해 보게. 황상은 겨우 마흔 몇이네. 아직 장년이야. 후궁을 며칠이나 비워두겠나? 귀비가 있을 때도 후궁에 새 사람은 항상 있었네. 지금 귀비가 없는데 후궁에 새로 사람이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나? 황상께 새로운 여인, 새로운 총비가 생기면 어찌해야 하겠나? 회임해서 황자가 태어나면? 황상은 옥체가 항상 건강하셨네. 쉰 넘어까지 사시면 적자인 오황자가 열여덟아홉, 어린 아들이 일고여덟 살이네, 예순까지 사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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