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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283화 (283/463)

283화: 추론할 것도 없는 투두법

보림암 밖 별원. 복안 장공주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기다렸지만 궁에서 소식이 오지 않았다. 입궁하라고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고민하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그렇겠지. 지금 궁엔 주씨 말고 정원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양빈밖에 없다. 주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궁 안은 아수라장일 터다. 누군가 나서서 주지하기 전엔 자신에게 알려야 한다는 걸 떠올릴 사람이 없을 것이다.

복안 장공주는 그 생각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웃고 싶은데 참으로 처량했다. 당당한 황가 후궁이, 십여 년을 거치면서 대갓집 내택만도 못한 지경으로 몰락했다.

오늘 입궁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생각에 복안 장공주는 순간 매우 따분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녹운에게 분부했다.

“동저아를 모셔오렴.”

이동이 자등 산장에 돌아왔을 때, 복안 장공주가 보낸 어멈이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이동은 옷을 갈아입고 마차에 올라 보림암 별원으로 향했다.

복안 장공주는 어제 있던 자리에 앉아서 잣을 까먹고 있었다. 천천히 먹다가 이동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턱짓했다.

“앉아. 왜 이렇게 늦었어? 물건 정리 중이었어?”

“아니요.”

이동은 화항에 앉아 자기 차를 내리며 영원이 도움 청한 일을 말했다. 복안 장공주는 잣이 든 접시를 들고 눈썹을 치켜들며 이동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런 일도 너에게 부탁한단 말이야? 넌 그걸 또 해줬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걱정도 안 돼?”

“이미 다 끝냈는데 이제 와서 혹시 생길 일을 걱정하면 뭐 하겠어요.”

이동은 차를 한 잔 비우고 또 한 잔 마시고는 다시 차를 내렸다. 복안 장공주는 잣을 먹으면서 이동을 비스듬히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가 구르고 또 굴렀다.

이동이 차를 다 마신 후, 복안 장공주는 잣을 내려놓고 손을 탁탁 쳤다.

“나도 차 내려줘. 네가 내리는 차 맛에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이 내리는 차는 아무래도 뭔가 부족해.”

이동이 차를 내려주자, 복안 장공주는 잔을 들고 이동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좀 봐.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부고가 오기만 기다렸거든? 당장 궁으로 갈 준비를 했지. 그런데 소식이 오지 않는구나.”

“어떻게 된 일이에요? 궁이 그렇게 엉망인가요?”

“영리해!”

이동의 빠른 반응에 복안 장공주가 한숨을 푹 쉬고 또 푹 쉬었다.

“난 한 시진이나 기다리다가 겨우 떠올랐는데. 이것 좀 봐. 궁이 이렇게 엉망이야. 주씨 손에 십 년도 안 됐는데 난 말이지 정말…….”

장공주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영 황후가 이 엉망진창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겠네.”

“영 황후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셨잖아요. 영원도 그러던데요. 누님은 병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간 사람이라고요. 형님하고 비교해도 차이 나지 않는대요.”

이동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집안일 다스리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복안 장공주는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수완이 대단하고, 귀신같이 병사를 부려도 집안일을 잘 다스리란 법은 없어. 난 집안일 어쩌고 하는 게 제일 싫어. 그 이야긴 됐어.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자. 황상이 정사를 논하는데 신통한 방법이 하나 있거든?”

복안 장공주는 웃으면서 황상의 투두법을 이야기해주었다.

“조회에서 의논하다가, 여 승상이 영 황후를 밀었대. 묵 승상은 나를 밀고. 고서강은 양빈을 밀고. 넷째가 제일 솔직하지. 제 처가 나서면 된다고 했다네?”

이동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새벽에 일어났을 때부터 기분이 좋아서 사소한 일도 재미있었다.

“넷째가 제 처를 거론한 건 말할 것 없으니 빼고. 나머지 셋은, 황상이 바로 투두법을 써서 결정했어. 그 결과 영 황후가 세 알, 나와 양빈 모두 두 알이었대. 누가 누구에게 콩을 넣었을지, 네가 이야기해 봐.”

“그걸 제가 어떻게 맞혀요.”

이동은 잠시 생각해 봐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전생, 이번 생 다 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조정의 암투에 관해서도 겉핥기만 알 뿐이었다. 그걸 어떻게 맞히나.

“맞히는 게 아니야. 추론해야지. 이런 걸 맞히는 게 어딨어!”

복안 장공주가 이동을 슬쩍 흘겨봤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묵 승상은 나를 거론한 이상 반드시 콩을 넣어야 했겠지. 내 항아리에서 콩이 하나도 안 나오면 주군을 기만한 셈이니까. 즉, 묵 승상, 여 승상과 고서강이 콩을 어디에 넣었는지는 일목요연해. 계 천관은 여 승상에게 동의했어. 영씨가 오아가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오면 진왕의 부담이 줄어들 테니까. 어쩌면 영가와 넷째가 다시 용의 전쟁을 벌일 수도 있고, 그러면 어부지리를 얻을 테니까. 그러니까 분명 콩을 영씨에게 던졌을 거야. 자, 이렇게 네 명 나왔지. 나머지는 수국공, 주택헌, 그리고 해유덕이야. 주택헌은 평범하게 어리석으니까 고서강을 추켜세우려고 콩을 던졌겠지. 그럼 이제 수국공과 해유덕이야. 해유덕은 두루뭉술 일 처리하는 사람인데 과거 여 승상에게 큰 은혜를 입었어. 그러니 분명 영씨에게 던졌을 거야. 수국공 콩은 나한테 줬고. 얼마나 간단해.”

“여 승상이 영원 편에 선 거예요?”

이동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 몰라.”

복안 장공주는 날 듯한 얼굴로 유쾌하게 말했다.

“능글맞기로 따지면 여 승상이 손에 꼽히지. 계가도 그렇고. 얼마나 깊이 발을 디뎠는지 알게 뭐람. 계소영은 네 오라비, 그리고 여염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잖아. 여염은 영원과 꽤 잘 지냈고. 그리고 백 노부인은 항상 나를 찾아와. 오늘 아침에도 감상하라고 화분을 보냈더라. 여 승상이 나서서 오늘 영 황후를 위해 애써준 일로 영원이 뭘 약속했는지 모르지. 하지만 또 모를 일이야. 여 승상은 계 노승상의 제자니까. 됐다. 이런 생각 그만하자.”

복안 장공주가 손을 휘휘 저었다.

“재미없어.”

이동은 양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 얼굴은 재미있어 보였다. 아주, 많이.

“경성에 들어간 다음에 난 보록궁에 머물 생각이야. 도관(道觀)이긴 한데 불도나 비슷해. 수행은 수행이잖아. 동화문으로 들어가서 모퉁이만 돌면 나와. 너도 오기 편할 거야. 내가 입궁하기도 편하고. 벌써 사람을 보내서 살펴봤어.”

복안 장공주는 말을 돌려 앞으로 자기가 살 곳을 알려주었다. 이동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눈앞의 장공주는 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고 무기력해 보이던 모습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안원후부 부인 묵씨는 묵 승상부 중문에서 마차에 내려 치맛자락을 파도치듯 휘날리며 모친 전 노부인을 만나러 정원으로 달려갔다.

전 노부인은 시녀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 경야하며 쓸 옷과 환약 같은 걸 챙기고 있었다. 묵 부인은 들어가서 서둘러 예를 갖추고 제대로 서기도 전에 방 안에 있는 시녀, 어멈에게 나가라고 분부했다.

“어머니와 할 말이 있으니까 너희들은 잠시 나가 있거라.”

전 노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딸을 바라봤다.

“무슨 일로 이리 다급한 것이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이게 무슨 짓이야. 어째서 차분함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 무슨 일이기에 이러는 것이야.”

묵 부인은 전 노부인의 타박을 아랑곳하지 않고 화항 가장자리에 앉았다.

“어머니. 주 귀비가 죽었다면서요? 대왕야가 독살했다면서요?”

“어디서 들은 것이냐?”

전 노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안원후부엔 조회에 나가는 사람이 없다. 소문으로 들었을 것이다.

“아닌가요? 그런 일 없나요?”

묵 부인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

“맞다! 네 꼴 좀 보렴!”

전 노부인이 묵 부인을 툭 때렸다.

“어디서 들은 것이냐? 대왕야가 독살했다는 말 말이다.”

“모두가 그 이야기예요! 아침에 물건 사러 갔던 관사가 돌아오자마자 보고하던걸요. 얼른 수소문해 봤더니 곳곳에서 그 이야기예요. 귀비 마마가 대왕야의 독에 즉사했다고요.”

맞다는 전 노부인의 말에 묵 부인은 철렁 내려앉았던 마음을 다시 끌어올리며 가슴을 두드렸다. 말도 순조롭게 나왔다.

전 노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황자가 주 귀비를 독살한 건 아직은 비밀이었다. 주 귀비가 죽었는데 대황자가 위리안치되었으니 밖에서는 기껏해야 주 귀비의 죽음이 대황자와 관련됐다고만 생각할 것이다. 대황자가 불효막심해서 귀비가 화병으로 죽었다고 퍼지면 모를까, 독 이야기가 나온 건 누군가 일부러 퍼트린 것이다. 대황자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전 노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야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다가 펑펑 울었어요. 굳이 지금 성 밖으로 나가서 고내내에게 향을 피우겠다잖아요. 겨우 말렸어요.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는걸요. 혹시라도……. 그리고 설령 진짜라고 해도 지금은 시기가 아니잖아요. 이게 얼마나 큰일인가요. 휴. 악인은 악한 끝을 본다더니, 정말이었어요.”

묵 부인은 즐거운 마음으로 탄식했다.

“향 피우는 일로 굳이 성 밖에 갈 것 없다고 후야에게 전해라. 마음 있으면 통한다. 귀비 마마가 막 세상을 떠나 황상이 매우 괴로워하신다. 이런 때에 괜히 책잡힐 일을 할 것 없다. 그리고 너도, 진정해라. 얼굴에 빛나는 것 좀 봐라!”

“알겠어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어머니.”

묵 부인은 날렵하게 화항에서 내려가 얼굴을 문지르고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저 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택에서 지전이나 태우고 향을 피우고 말라고 후야에게 말할게요. 크게 제사 지내고 싶겠지만, 새해 때 다시 이야기하자고요.”

묵 부인은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서서 화항에 잔뜩 쌓인 두꺼운 의복을 바라봤다.

“어머니, 난 준비하지 않아도 되나요? 그리고 후야는요?”

“당연히 해야지. 황상은 분명 거창하게 장례를 치를 것이다. 태후의 장례보다 더 거창하게 치를 것이야.”

전 노부인은 이 나이에도 아직 덤벙거리고 거침없이 구는 딸을 못 말린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럼 얼른 가야겠네요. 아무 준비도 못 했는데 성지가 오면 어떡해요!”

묵 부인은 전 노부인을 향해 손수건을 휘둘러 보이고는 올 때보다 다급하게 돌아갔다.

궁에서 나온 수국공은 일단 예부에 가서 지난 황조의 선례를 확인했다. 이번 황조엔 황자를 위리안치한 선례가 없었다. 그다음엔 공부(工部)에 가서 왕부의 설계도를 찾아 공인을 부르고 금군 백여 명을 동원해서 다시 궁으로 돌아갔다. 대황자를 잡아서 곧장 대황자의 양왕부로 달려갔다. 대황자를 측문으로 안에 들여보내고 큰문, 작은 문 할 것 없이 모든 문을 걸어 잠갔다. 양왕부 편액을 떼어낸 후, 공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각 문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대문, 측문, 각문을 모두 단단히 막은 다음, 외발손수레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작은 문 하나만 남겨두고 그 위에 물건을 넣을 수 있는 철문을 달았다.

마차에서 금군에게 들려서 나온 대황자는 비틀비틀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대황자가 비틀거리면서 금군 하나를 덥석 잡았다.

“밖에 누구냐? 이 일을 주관하는 주사(主事)가 누구냐?”

“수국공입니다.”

금군은 무표정하게 대답하고 대황자를 뿌리치고 성큼 사람들 뒤를 쫓았다. 대황자는 후다닥 달려가 그 금군을 다시 붙들었다.

“가서 말을 전해다오. 나를 만나러 오라고 수국공에게 전해! 중요한 말이 있다고 해라! 말 좀 전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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