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82화 (282/463)

282화: 깨달음

무지는 서둘러 합장하며 답례했다.

“강 장사, 평온하신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승, 지금 오 노야를 모시고…….”

“법사, 괜찮소. 나 혼자 알아서 나가리다.”

오 노야라는 사람은 무지가 장사라고 칭하자 강환장이 관리인 걸 깨닫고 곧바로 무지의 말을 잘랐다. 오 노야가 지극히 예의를 갖추며 양보하자, 무지는 오 노야가 대웅보전 밖으로 나가는 걸 눈으로 배웅하고는 돌아서서 강환장을 안으로 안내했다.

“강 장사, 안색이 매우 안 좋습니다. 오늘 날이 추운데, 객청으로 가셔 차 한잔하시지요.”

“감사합니다. 괜찮습니다. 청공 큰스님 계십니까? 뵙고 싶습니다. 가르침 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강환장은 정신이 조금 돌아온 듯했다. 아까처럼 혼이 나간 모습은 아니었다.

무지는 유감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런, 공교롭군요. 사부는 이번 달에 폐관하고 입정하셨습니다.”

강환장은 우두커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폐관하고 입정하다니, 만날 인연이 없는 것인가.

“그럼 언제 출관하실까요?”

강환장이 겨우 물었다.

“그야 모르지요. 빠를 때는 하루 이틀 만에 나오신 적도 있고, 길 때는 반년, 1년이 걸린 적도 있는걸요.”

무지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모르는 일이었다.

강환장은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럼…… 첨대를 뽑으러 데리고 가주십시오.”

“여기에 첨통이 있습니다.”

무지는 대웅보전 구석 높은 탁자에 놓인 첨통을 가리키며 친절한 얼굴로 길을 비켜주었다. 강환장이 힐끔 첨통을 바라봤다.

“첨대가 하나 더 많은 첨통이 저건가요?”

“예? 첨대가 하나 더 많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상국사의 첨통은 다 같습니다. 첨대가 많은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그 첨통으로 데리고 가주십시오. 오늘은 어느 보살 앞에 있습니까?”

강환장은 평온하게 무지를 바라봤다. 한 달 전이었다면, 이렇게 시치미 떼는 무지의 말에 화를 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첨대가 하나 더 많은 첨통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입니다. 첨통의 진위가 있다면야, 오래된 첨통이 하나 있긴 합니다. 다들 그 첨통이 영험하다고 생각들 하시는데, 사실 다 같습니다. 점괘란 원래 성의를 보는 것인걸요. 어느 첨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구별하지 못합니다. 아마 큰스님이나 되어야 구별하실까요. 하지만 큰스님은 폐관하셨습니다. 아니었다면 제가 한 번 다녀와도 되지만요.”

무지가 지극히 성의 가득하게 설명해서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환장은 말없이 무지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첨통에 첨대 하나가 더 있다는 말을 알려준 것도 바로 무지 법사입니다.”

무지가 펄쩍 뛰었다.

“강 장사, 말조심하십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대상국사에서 지객승 노릇을 십여 년 했는데, 그런 말은 또 처음 듣습니다. 아미타불. 강 장사, 함부로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강환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느릿느릿 대전 구석의 첨통 앞으로 다가가 첨대를 뽑았다. 무지가 얼른 고개를 내밀고 바라봤다. 첨대 위에 검은 글자가 촘촘히 적혀 있었다.

‘꿈에서 큰 재물을 얻었다고 한들, 허명에 불과한 것이니 쫓을 것 없다. 높은 산, 먼 강물에 떨어져 있는 것을 어찌 믿으랴…….’

그리고 마지막 문구는 흐릿해져서 보이지 않았다.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원하고 점괘를 뽑아 길흉을 점치는 점법인 ≪관음영첨 觀音靈籤≫에 나오는 말로, 이어지는 마지막 문구는 ‘귀인이 길을 이끌어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입니다.)

“점괘라는 건 다 믿으면 안 됩니다. 큰스님도 이런 것들은 모두 세상 사람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일이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여인들이 찾아와서 점괘를 뽑은 다음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집어넣고 또 뽑고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뽑는 걸 종종 보는걸요. 마음에 드는 점괘가 나와야 기분 좋게 경쾌한 걸음으로 돌아갑니다.”

점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안 좋게 나온 걸 보고 무지가 얼른 말을 바꿔서 내용이 아니라 점괘 자체 이야기를 했다.

강환장은 사색이 되어 멍하니 점괘를 바라봤다. 무지의 말은 들렸지만 마음에 들어가지 않았다.

전에는 그도 이런 걸 잘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굳게 믿었다.

강환장은 첨대를 무지에게 돌려주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다리를 문턱에 걸치다가 비틀거리고는 더욱 급한 걸음으로 달려나갔다.

무지는 첨대를 들고 고개를 숙여 점괘를 읽었다. 마지막 문장을 보다가 손가락으로 닦았다. 참으로 이상했다. 마지막 문장이 왜 이렇게 흐릿해졌을까.

무지는 대전 앞으로 들고 가서 빛 아래서 한참 들고 바라봤다. 그래도 마지막 문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돌아서서 첨통에 다시 던져 넣었다.

강환장이 대상국사에서 달려나가자,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던 독산이 그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찻그릇을 내려놓고 고삐를 풀고 뒤를 따라갔다. 몇 번이고 불러도 강환장이 돌아보지 않자 더는 부르지 않고 뒤를 따르기만 했다. 수녕백부로 돌아가서 강환장은 곧장 중문 안으로 들어갔고, 독산은 말을 끌고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강환장은 갈수록 걸음을 서둘러서 거의 달리듯이 후화원으로 들어가 호숫가를 따라 정자까지 직행했다. 그는 정자 중간에 서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이번엔 예전의 화려하고 고귀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퇴락한 모습만 보였다. 호수의 진흙은 몇 년이나 쌓여 있었는지 모르겠고 구곡교는 사람이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낡았다. 화원 곳곳엔 잡초가 가득했고 눈이 닿는 곳 모두 메말라 있었다.

강환장은 천천히 뒷걸음질 쳐 아경의에 앉았다. 아경의에서 끽끽,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강환장은 고개를 떨구고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매서운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 여인의 말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 여인은 이미 어제의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도 이미 어제의 자신이 아니다. 그런데 무지하게 여태 정신을 못 차렸다. 오늘까지도…….

강환장을 배웅한 진왕은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일어서서 후원으로 돌아갔다.

진왕비는 진왕이 오늘 일을 다행스러워하며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대황자가 주 귀비를 독살한 일, 사황자가 태자가 된 일을 듣고 눈빛을 반짝이며 진왕을 바라봤다.

“왕야, 이제 어쩔 계획이세요?”

“응? 무슨 계획?”

진왕비가 나긋하게 묻는 말에 진왕은 얼떨떨해졌다.

“계 천관이 한 말이요.”

진왕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자, 진왕비는 할 수 없이 명백히 말했다. 진왕이 싱긋 웃었다.

“아, 그거. 무슨 계획이 있겠소. 넷째가 태자가 된걸.”

“왕야!”

진왕비가 진왕의 손을 잡았다.

“귀비 마마가 돌아가셔서 사왕야를 감쌀 사람이 없어요. 태자가 되었대도, 왕야, 만일, 황상께서 새 후궁을 들여 또 황자를 보면요? 황상은 겨우 마흔 남짓이세요.”

진왕이 숨을 힉 들이마셨다.

“당신 말은…… 황상이 새 후궁을 들이면…… 두 번째 주 귀비가 생길 거란 말이오?”

“그야 누가 알겠어요. 그렇게 되지 않는대도……. 아, 영 황후가 회궁한다면서요.”

진왕비는 지극히 중요한 일을 돌연 떠올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진왕은 멈칫했다. 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바로 사람을 보내 알아봐야겠어요.”

진왕비가 서둘러 사람을 불러 분부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어쩐지 혼란스러워질 것 같은걸.”

진왕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예, 혼란스러워질 거예요.”

진왕비의 목소리가 매우 작았다.

“귀비 마마가 없으니 이제 사왕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태자가 되었다고 해도요. 그러고 보니, 저는 아직 영 황후를 뵌 적이 없네요.”

자등 산장, 이동이 사람들이 물건을 정리하는 걸 보고 있는데, 어멈 하나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는 대영을 데리고 들어왔다.

대영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도 매끄럽게 영원의 말을 전했다. 이동은 어안이 벙벙하고 또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 든 생각은, 문 이야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체면도 차리지 않고 잘도 나를 부려 먹네!’였다. 두 번째 든 생각은 ‘어떻게 나를 이렇게 믿지?’였고. 길에서 먹고 마시고 쓸 것을 다 준비하라고 하다니, 그야말로 영 황후와 오황자의 안위를 자신의 손에 맡기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와 내 마차를 끌고 와. 수련, 너는 평소에 먼 길 출타할 때 하던 대로 준비하고, 녹매, 너는 소유에게 가서 음식을 준비하라고 전해. 네 사람이 하루 동안 꼬박 먹을 음식과 차를 준비하라고 해. 청국, 너는 대교에게 가. 가장 좋은 말 여섯 필을 준비하라고 해. 밤새 달려야 할 것들을 준비해.”

이동은 대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분부했다.

“문죽은 외출할 옷을 준비하고. 여기에서 오리 언덕까지 얼마나 걸리지?”

마지막 말은 대영에게 물은 것이었다. 대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달려가면…….”

“네가 말 타고 달리면 얼마나 걸리지?”

“빠르면 이각입니다.”

이동이 말을 무지르고 묻자 대영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이동은 속으로 가늠했다. 말을 타고 이각이라면 마차로는 반 시진은 걸릴 것이다. 시간은 여유로운 편이었다.

대교가 삼각 만에 뒤에 음식과 다과 수레를 연결한 마차를 몰고 나왔다. 대영은 다른 마차를 몰았다. 말 두 마리가 마차를 끌었고, 이동은 사환으로 분장한 후 두껍고 큰 가죽옷을 밖에 걸쳤다. 수련과 녹매도 같은 차림을 하고 자등 산장을 나와서 오리 언덕으로 직행했다.

이동은 말에 탄 채 저 멀리 경성 방향에서 몰려오는 흙먼지를 바라봤다. 영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앞장서서 말을 타고 달려오더니, 이동과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말고삐를 잡았다. 말이 급히 제자리에서 멈추어 서자, 영원이 이동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이 차림 뭡니까? 꽤 보기 좋군요.”

영원은 기분이 매우 좋은 듯 날아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동은 대답하지 않고 마차를 가리켰다.

“만일을 대비해서 두 대 준비했어요. 필요한 건 작은 수레에 다 준비해 두었어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건 가지고 오지 않았어요. 수레 뒤에…… 당신이 가 보면 알아요. 통이 하나 있어요. 샘물을 담았어요. 옆에 작은 상자엔 대야, 수건, 주전자 같은 게 있어요. 혹시 입궁해서 소세할 겨를이 없으면 마차에서 단장할 수 있도록요. 그리고 백호(白狐: 북극여우) 두봉도 두 벌 준비했어요. 소복 대신 걸칠 수 있을 거예요. 혹시 몰라서 준비했어요. 마차는 매우 튼튼하고, 마차 안의 물건은 마차에 고정되어 있어서 흔들려도 괜찮아요.”

이동의 말이 끝나자 영원은 마차와 마차 뒤의 말 두 마리를 바라보고는 웃으며 공수했다.

“낭자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정식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난 갑니다! 누님이 기다리거든요!”

대교가 어느새 마차에서 뛰어내렸고, 영원이 데리고 온 호위 중 하나가 말에서 내려서 말을 동료에게 건네고 대교에게 채찍을 건네받았다. 호위는 어느새 말을 몰고 달려가는 영원의 뒤를 따라 채찍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동은 영원 일행이 사라지는 걸 바라보다가 살며시 숨을 내쉬었다. 대교가 말에 오르자 함께 자등 산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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