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붕괴
영원이 다급하게 달려나간 후 문 이야는 서성이다가 얼른 밖으로 나가서 건물 밖 벽에 기대서 귀를 쫑긋 세웠다.
역시나 어서 별궁으로 출발해 영 황후를 맞이해 오라는 내용이었다. 내외 명부의 경야 등 제반 장례를 주관하는 동시에 오황자도 데리고 돌아와 당분간 연경궁에 묵게 하라는 성지를 받은 영원은 품에서 은표를 덥석 잡아서 얼마인지 세지도 않고 그대로 내시 손에 찔러넣었다. 내시는 한 손에 잡을 수 없을 만큼 두툼한 은표를 들고 눈이 휘어라 웃으며 장읍했다.
영원은 비단 종이를 끌어안았다. 성지가 신성한 물건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매우 사랑스럽고.
문 이야는 한쪽 벽 구석에 서서 한 손으로 성지를 들고 눈썹을 휘날리는 영원을 바라보며 살며시 숨을 내쉬었다. 첫 발걸음은 성공적으로 뗐구나!
“누님을 모시고 오려면 바로 출발해야 하네. 이야, 알아서 돌아가게.”
영원은 문 이야를 향해 대충 당부하고는 곧바로 달려가려 했다. 문 이야가 덥석 그를 잡았다.
“진정하세요. 경성에서 별궁까지 몇 시진 걸립니다. 돌아올 때는 어쩌시려고요?”
“내 속도라면 한 시진 일각 정도면 당도하네.”
지나치게 기분이 좋은 영원은 대충 대꾸하고 문 이야를 뿌리치고 나가려 했다. 문 이야가 성큼 다가가 다시 붙잡았다.
“예, 칠야의 속도라면 한 시진 일각이면 되겠지요. 하지만 돌아올 때는요? 영 황후와 오황자도 각자 말을 타고 칠야를 따라 돌아오라고 하실 겁니까?”
영원이 걸음을 멈췄다.
“응? 누님은 황후이니 의례대로 가마를 타야지. 내가 그 부분을 놓쳤군.”
“가마 의례는 생각할 것 없습니다. 지금 어떻게 황후의 의례대로 가마를 씁니까. 예부요? 궁이요? 궁에 누굴 찾아가실 겁니까? 예부를 찾아가면 서로 미루다가 사나흘이 걸려도 가마를 내놓지 못할 겁니다.”
문 이야도 골치가 아팠다. 주 귀비 사건이 갑작스러워도 너무 갑작스러웠다. 갑작스러울 뿐만 아니라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련의 일도 분명 혼란스러울 것이다.
“별궁도 고려할 것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십 년은 되어서 꼴이 말이 아닐 겁니다. 저택에서 쓸 만한 마차 두 대를 끌고 가십시오.”
“우리 저택에 쓸 만한 마차가 어디 있어야 말이지. 나는 항상 말을 타는걸. 복백!”
영원이 고함치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잰걸음으로 달려온 복백도 마차 이야기를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칠야, 저택엔 여인이 없어서 출타할 때는 모두 말을 탑니다. 말은 많습니다. 어떤 말이든 다 있지요.”
하지만 쓸 만한 마차는 정말 없었다. 있어도 화물이나 채소 싣는 수레였다.
문 이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가에서 반년 정도 사는 동안 기거 방면의 격식을 봐 온 게 있어서 꽤 식견이 넓은 편이었다.
“마차뿐만 아닙니다. 별궁에서 돌아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다섯 시진은 걸립니다. 경성에 도착하면 새벽이에요. 마마께서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내외 명부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궁의 엉망진창인 모든 사안을 마주해야 하고요. 처음으로 얼굴을 내미는 때입니다. 그리고 오황자도요. 그래서 돌아오는 내내 먹고 마시고 쓸 것들, 모두 준비해야 합니다. 마마와 오황자 모두 내일 아침에 기운찬 모습으로 모두를 마주해야만 합니다. 이건 별궁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별궁에서는 칠야가 지금 가는 것도 모르는걸요. 소식부터 보내 봐야 칠야가 먼저 도착할 겁니다.”
문 이야는 주절주절 잔소리를 늘어놓는 자기 모습이 만 어멈이 빙의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영원과 복백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얼굴을 마주 봤다. 이런 일을 신경 쓴 적 없는 영원은 말할 것도 없고, 평생 대관사로 산 복백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대관사이다. 대관사는 큰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사소한 일은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아니면 만 어멈을 불러서 도와달라고 할까요?”
만 어멈이 빙의한 것 같다고 생각한 문 이야가 곧바로 방법을 떠올렸다.
“늦었네. 자네 댁 낭자에게 수고 끼쳐야겠어.”
“네?”
영원의 말에 문 이야가 무슨 말인지 깨닫기도 전에 영원이 목소리를 높여 대영을 불렀다.
“자등 산장에 다녀오너라. 이 낭자에게 내가 별궁에 영 황후와 소오를 마중하러 가야 한다고 전하고, 수고스럽지만 마차 두 대, 그리고 길에서 먹고 마시고 쓸 것들을 준비해달라고 해라. 준비되면 바로 오리 언덕으로 오라고 하고. 내가 거기서 기다리마. 명심해라. 서둘러야 한다. 빠를수록 좋다.”
대영은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달려갔다. 문 이야는 눈을 깜빡였다.
음! 좋은 생각이군! 하지만…….
문 이야가 영원을 삐딱하게 바라봤다.
잘도 체면 차리지도 않고 우리 낭자를 부려 먹는군!
“유월, 너는 사람을 챙겨서 지금 바로 별궁으로 출발해라. 반 시진 뒤에 내가 출발한다고 누님에게 전해. 대웅, 말 준비해라. 반 시진 후에 출발한다. 복백은 최신을 부르고. 바로!”
영원은 계속해서 명령했다.
문 이야는 침착하게 지휘하는 영원을 바라보며 오리 언덕과 반 시진이란 부분을 기억했다. 경성과 자등 산장에서 별궁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기엔 오리 언덕이 가장 가까운 곳이다. 경성에서 오리 언덕까지보다 자등 산장에서 오리 언덕이 가깝긴 했다. 하지만 도대체 낭자에게 시간을 얼마나 준 것이지…….
문 이야가 위아래로 영원을 살폈다.
지척지척 진왕부로 돌아간 진왕은 마중 나온 강환장과 마주쳤다. 진왕은 멍하니 서서 강환장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그를 향해 깊이 장읍했다. 강환장은 화들짝 놀라서 후다닥 앞으로 다가가 진왕을 일으켰다.
“왕야, 왜 이러십니까. 무슨 일입니까?”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들어가서 이야기해.”
진왕은 놀라고 두려운 얼굴로 강환장을 덥석 잡고 서재로 그를 밀고 갔다.
서재로 들어간 진왕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찻상을 가리켰다.
“미안하지만 차 한 잔 주게. 소화, 정말 다행이었어. 이런 다행이 없어!”
강환장은 서둘러 차를 내려서 바쳤다.
“왕야,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큰일이지!”
진왕은 잔을 받아들고는 마시지 않고 탁자에 내려놓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다행이 없어! 다 소화, 자네 덕이다. 아니었으면…….”
진왕은 저도 모르게 목을 만졌다. 등 뒤에 소름이 다시 오소소 돋는 것만 같았다.
소화가 어제 설득하지 않았다면, 계 천관의 말대로 어제 입궁해서 장녕궁에 갔다면……. 정말 끔찍하구나!
“무슨 일이기에 이러십니까?”
두려워하다가 다행스러워하다가, 끊임없이 변하는 진왕의 얼굴에 강환장은 속이 탔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이 평안 무사할 시기인데?
“주 귀비가 죽었다.”
진왕이 허리를 숙여 거의 얼굴을 붙이고 살며시 속삭였다.
“뭐라고요?”
강환장이 꽥 고함쳤다.
“주 귀비라니요? 어느 주 귀비요? 주 귀비요? 말도 안 됩니다.”
강환장이 기겁하고 고함쳤다. 말도 안 된다. 절대로 말이 안 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진왕은 강환장을 손가락질하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조회라서 끽소리도 내지 못했다. 나도 자네처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
“어떻게 죽었습니까?”
강환장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첫째가 독으로 죽였다. 독살했어!”
진왕은 다시 다가가 그렇게 말해놓고 짧지만 들뜬 웃음을 터트렸다.
“첫째가 독으로 죽였어!”
“그럼 대왕야는요? 사왕야는요? 죽었습니까? 아니면 살아 있습니까?”
강환장은 숨을 죽이고 매우 긴장한 모습으로 진왕을 바라봤다. 진왕은 의아한 듯 강환장을 바라봤다.
“당연히 살아 있지. 첫째는 그저 위리안치되었을 뿐이고, 넷째는 태자가 되었다.”
“뭐라고요?”
강환장은 아까보다 더 놀랐다. 사왕야가 태자가 돼?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강환장은 두 눈이 멍해지고 혼이 빠져나갔다.
“소화! 소화!”
진왕은 더욱 의아해하며 강환장을 흔들었다. 강환장은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괜찮습니다. 생각 좀 하겠습니다. 조용히 생각 좀 하겠습니다. 제 말은,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상상도 못 해서. 왕야, 저 좀 조용히 생각하겠습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나도 상상도 못 했네. 이런 일을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진왕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모친을 시해하다니. 어떻게 그런 짓을. 첫째가 보는 앞에서 마마가 눈을 감았다는군. 마마가 중독되어 눈 감는 걸 첫째가 똑똑히 봤다는군! 얼마나 모질어야 그럴 수 있나! 쯧!”
진왕은 말도 못 하게 통쾌했다. 그래도 싸지! 잘 죽었다! 잘 죽였어!
“이걸 좀 보게. 멀쩡하던 사람이 그냥 죽었어. 독 하나로 말이야.”
진왕이 한숨을 푹 내쉬며 혀를 내둘렀다.
“세상일이란 참. 소화, 다 자네 덕분이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제 장녕궁에 갔을 것이고…….”
진왕은 지금 생각해도 두려운 듯 고개를 저었다.
“첫째는 분명 내게 뒤집어씌웠을 것이야. 오늘 겹겹이 높은 담장을 세우고 감금된 건 나겠지.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두렵네.”
“왕야, 제가 좀…… 좀 나가서 걷고 싶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정리 좀 해야겠습니다. 나가야겠습니다.”
강환장은 머리가 깨질 것 같고 토할 듯이 속이 울렁거렸다. 진왕이 쉴 새 없이 주절주절하는 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좀 나가서 걸어야 했다. 조용히 생각해야 했다. 잘 생각해야 했다. 어쩌면…… 꿈인지도 모른다.
“응? 그래.”
진왕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비틀거리는 강환장을 보자 울컥 치밀던 언짢음이 싹 사라졌다.
정말로 몸이 안 좋은 듯하군. 소화도 간이 작았구먼.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어서 돌아가서 쉬게. 다시 올 것 없어. 푹 쉬게. 어차피 왕부에 일도 없다.”
강환장은 다리를 질질 끌며 기운 없이 비틀비틀 밖으로 나갔다. 중문에 서서 찬 바람을 쐬니 부르르 진저리가 쳐졌다. 두봉을 잊었다. 강환장은 두봉을 잊고 나온 걸 떠올리고는 무감각하게 다리를 내디뎠다.
문간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기다리던 독산은 강황장을 보고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나리, 나가십니까? 두봉은요? 오늘은 날도 흐리고 바람이 거세서 춥습니다.”
강환장은 독산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내디뎠다. 계단을 내려가서 진왕부 대문 앞에 서서 바람을 맞다가 휙 돌아서서 용이 휘날리고 봉황이 춤추는 듯한 ‘진왕부’ 세 글자를 올려다봤다.
“나리, 왜 이러십니까? 아프십니까? 안색이 매우 안 좋습니다. 두봉은요? 밖이 이리 추운데…….”
독산의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듯했다.
“괜찮다. 따라오지 마라. 대상국사에 가야겠다. 가서 향을 피워야겠어.”
강환장은 제 목소리도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꿈이 아닌 듯했다. 이건 꿈속이 아니었다.
강환장의 분부를 들은 독산은 딱 봐도 이상한 강환장의 모습에 주저하고 또 주저했다. 세자야를 억지로 집으로 끌고 가자니 그럴 능력이 없었다. 세자야는 성질이 아주 괴팍하다.
돌아가서 기별해? 누구한테? 대내내? 시중을 못 들었다고 지난번처럼 또 1년 치 월전을 깎을지도 모르는걸. 됐다, 됐어. 부인? 치워라. 부인은 울기밖에 더 하나. 우는 것 말고 우는 것밖에 모른다.
독산은 서서히 고삐를 풀고 말을 끌고 멀리서 강환장의 뒤를 따랐다. 강환장이 대상국사 안으로 들어가자 독산은 대상국사 밖 마차포에 말을 묶어두고 차를 달래서 앉아서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간 강환장은 천왕전을 지나 막 나가려다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초승달처럼 두 눈이 휘어라 웃는 미륵불을 올려다보며 한참 바라보다가 앞으로 다가가 앞에 방석을 깔고 무릎 꿇었다. 고개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고, 연달아 네댓 번 조아린 후에 천천히 일어나서 뒷걸음질 쳤다. 천왕전에서 나와 향냄새가 가득한 뜨락을 거쳐 대웅보전으로 들어갔다.
대웅보전 안, 지객승 무지가 배가 볼록 나온 중년인과 함께 서서 이것저것 가리키며 소개하면서 밖으로 나가던 참이었다.
강환장은 걸음을 멈추고 무지가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가 공수했다.
“법사, 바쁘지 않으시면 가르침 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