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명쟁암투
영 황후의 눈꼬리에 눈물이 반짝였다. 영 황후 뒤에 서 있던 소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가리면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영 황후를 바라봤다.
“외숙이요?”
외숙이라는 말을 들은 오가아는 정신이 들어서 팔을 짚으면서 일어났다.
“어느 성으로요?”
“경성이다.”
영 황후가 이불을 끌어 아들에게 덮어 주었다.
“등 구경하는 경성이요? 외숙이 등 구경을 데리고 가주는 건가요?”
오가아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래. 하지만 올해는 등 구경을 하지 못한다. 내년엔 할 수 있을 거란다. 우린 여기서 나가야 한다. 경성으로 가서 궁으로 옮겨야 한다.”
영 황후는 조금 다가가서 오가아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주었다.
“어머니,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오가아가 반짝이는 눈으로 조금 두려운 듯 영 황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영 황후가 빙긋 미소 지었다.
“착하지. 그래, 일이 좀 생겼다. 대가아와 사가아의 어머니가 죽었다. 상을 치러야 해서, 올해는 등 구경을 못 한단다.”
영 황후 뒤에 서 있던 소백이 입을 꽉 틀어막고 비틀거리다가 난로 위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주 귀비요?”
오가아의 표정이 순간 심각해졌다. 영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럼 앞으로 여기로 돌아오지 않는 거죠? 어머니, 전에 그러셨잖아요. 언젠가 우리가 경성에 가게 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때부터 저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요. 어른처럼 말하고 어른처럼 굴어야 한다고요.”
“그래. 오가아, 앞으로 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영 황후는 애틋하고 서글픈 눈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여기를 떠나는 순간, 오가아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게다가 어른처럼 성공하면 왕이 되고 실패하면 죽는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
“그럼 외숙은 언제 우리를 마중 오나요? 오늘인가요?”
오가아는 조금 기쁜 듯했다.
“그렇게 빨리 오진 못 하지. 외숙도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래도 금방 올 것이다. 며칠 내엔 올 거다. 일단 자거라.”
오가아의 기뻐하는 모습에 영 황후의 미소가 포근해졌다. 오가아는 어른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잠이 안 와요. 사는 곳을 옮겨야 하는데 어찌 잠이 오겠어요.”
“그럼 소백이랑 무술 수련하러 가렴.”
영 황후가 오가아 머리를 톡 쳤다.
“아직 시각이 되지 않았는걸요.”
오가아는 얼른 다시 누워 몸을 움츠렸다.
“잠은 안 올 것 같지만, 누워있다가 보면 잠이 올지도 몰라요.”
영 황후는 이불을 잘 덮어 주고 화항 앞에 서서 잠시 들여다보다가 소백에게 잘 돌보라고 당부하고 밖으로 나갔다.
정전 안, 소심과 옆에 서 있던 위봉낭은 영 황후가 들어오는 걸 보고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위봉낭이 앞으로 살짝 나가서 허리를 구부린 채 고했다.
“마마, 마마 곁에 사람이 없을 거라고 칠야가 비자(婢子: 시녀의 겸칭)를 보냈습니다. 마마의 분부를 따르랍니다.”
“다른 사람처럼 비자라고 칭할 것 없다. 넌 사내가 하는 일을 하지 않으냐. 사내가 하는 일을 하니 시녀가 아니다.”
영 황후는 복잡한 표정을 짓는 위봉낭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사람이 보는 앞에선 사내처럼 칭하고, 사람 없을 때는 그마저도 필요 없다. 그냥 나라고 하면 된다.”
“예.”
위봉낭은 양손으로 공수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대답했다.
“오가아 곁에 있으렴. 소심, 네가 데리고 가라. 소백에게 당부하고.”
영 황후의 분부에 위봉낭과 소심은 곁방으로 향했다.
경성, 다음 날 조회.
묵 승상 등 몇몇이 보기 드물게 어둡고 엄숙한 모습이자 어젯밤에 일어난 참극을 모르는 대다수의 관리들도 심각한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덩달아 숨을 죽이고 조심했다.
계단을 오른 황제는 드넓기 짝이 없고 기댈 곳이 없는 용상에 앉았다. 절을 올리고 허리를 세운 문무백관들은 하룻밤 사이에 십 년은 늙은 듯한 황제를 힐끔거렸다.
속사정을 아는 묵 승상 등은 한숨을 푹 내쉬었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놀란 가운데 당황했다. 큰일이 생겼구나!
이날 조회에서는 아무도 상주서를 올리지 않았다. 아무리 중요한 상주라도 저마다 소매에 감췄다.
절을 올리고 일어선 뒤 침묵이 이어졌고, 그 잠깐 사이 침묵의 내막을 모르는 관리들은 긴긴밤을 보낸 듯한 두려움과 당혹감을 느꼈다.
잠시 침묵 후, 황상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어 세 가지 일을 선포했다.
하나, 주 귀비가 병으로 승하한 일. 둘, 사황자를 태자로 세우는 일. 셋, 대황자를 대황자부에 위리안치하니, 수국공의 총괄하에 즉각 담장을 높이 쌓아 가둔다고.
온 조정이 경악하는 가운데 황제가 천천히 일어서서 사황자, 묵 승상, 여 승상, 수국공, 주 추밀부사, 계 천관, 고서강, 그리고 예부 상서 해유덕에게 남으라고 지목했다.
조회가 끝난 후, 넋이 나갈 정도로 놀란 관리들은 한 번도 본 적 없이 조용하게, 또 한 번도 본 적 없는 속도로 재빨리 흩어져서 돌아갔다.
자극전 안, 황상은 무기력하고 지친 듯이 화항에 비딱하게 앉았다. 상 태감은 황상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소태감을 지휘해서 묵 승상 등에게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내주고는 망설이는 얼굴로 사황자를 바라봤다. 이제 태자가 되었으니 그에게도 등받이 없는 의자를 내어주어야 할까. 등받이 있는 의자를 내어오는 건 너무 지나칠까?
한창 고민하는데 황상이 손을 저었다.
“사가아, 여기 앉아라.”
사황자는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가 화항 가장자리에 몸을 틀고 앉았다.
“귀비의 후사부터 의논하세.”
귀비 이야기가 나오자 황상은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귀비가 떠났다. 자신보다 먼저 떠났다. 그것도 그런 식으로…….
“모비는 황후의 예로 안장해야 합니다.”
사황자가 가로채듯 하는 말에 황상이 말을 잘랐다.
“일단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라.”
“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귀비 마마는 후(后)로 추서하여 황후의 대례로 안장해야 마땅합니다.”
수국공이 주 추밀부사와 모든 이보다 먼저 나서서 태도를 밝혔다.
“그리고 시호 문제도 있습니다. 귀비는 재능과 덕망이 높으신 분이시니 ‘효’자와 ‘현’자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시호 문제는 일단 한림원에서 몇 가지 고른 다음에 황상과 전하께서 결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국공이 숨을 돌리는 사이에 묵 승상이 재빨리 말꼬리를 잡아채서 시호 문제를 한림원에 넘겼다. 시호 문제는 사나흘 옥신각신해도 정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급한 일이 한둘이 아니라서 시호 같은 전혀 다급하지 않은 문제를 논의할 때가 아니었다.
황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의 짐작대로 귀비를 황후의 예로 안장하는 일을 결정 지었다. 묵 승상이 말을 이었다.
“황후의 상제 대례는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지금은 섣달이고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묵 승상이 다소 모호하게 말했다. 주 귀비는 고작 마흔 남짓이고 줄곧 건강해서 그녀의 후사는 하나도 준비하지 않았다. 이런 때에 돌연 세상을 떠났으니, 지금은 관도 준비되지 않았다. 황상은 분명 거창하게 장례를 치르려고 할 것이라서 정말이지 준비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노신이 생각하기엔 바깥일은 노신과 여 승상이 총괄하고 수국공, 계 천관, 해 상서와 고 사사가 보좌하여 마마의 후사를 도맡아 처리하면 될 듯합니다.”
묵 승사의 말에 황상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여 승상이 총괄하게. 그리고 태자 책봉례도 올해 안에 거행하게. 흠천감에게 날을 고르라고 하고, 이 일은 묵 경이 맡아서 하게.”
태자 책봉례라는 말을 들은 사황자는 숨결이 다 거칠어졌다.
“예.”
묵 승상은 곧바로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궁 안에 각 명부의 경야 등 제반 사항을 총괄할 사람도 정해야 합니다.”
묵 승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 승상부터 주 추밀부사까지 화항에 비딱하게 누워 눈을 반쯤 감은 황상을 일제히 바라봤다.
“경들이 의논해 보게.”
황상은 그 안에 감춰진 무수한 중요한 부분을 의식하지 못한 듯이 눈꺼풀도 들지 않고 손가락만 까닥여 분부했다. 고서강은 사황자를 힐끔 바라봤다. 사황자는 책봉 대례 생각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때때로 흥분과 희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묵 승상의 말을 아마도 제대로 듣지 않았을 것이다.
“전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고서강이 얼른 가장 먼저 나서서 사황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황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은 또 매우 빠르게 했다.
“경들이 먼저 의논하게.”
“황상, 영 황후가 별궁에서 다년간 요양했습니다. 태의의 말이 근래 몸이 좋아졌답니다. 이건 큰일이고, 황후가 있는 이상 예법과 법도를 따르면 황후가 주관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여 승상이 고서강 뒤에 바로 입을 열었다. 부승상인 그가 묵 승상 다음에 입을 여는 건 지당한 일이었다. 이번 일은 그가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잡아야 했다.
“영 황후는 몸이 허약해서 별궁에 은거하며 세상일을 멀리한 지 오래입니다. 마마의 상제 대례 같은 큰일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신은 반대합니다.”
고서강이 즉각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영 황후가 돌아오면 오황자가 돌아온다.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이번에 돌아오면 다신 돌려보내지 못한다!
게다가!
고 서강이 여 승상을 빤히 바라봤다. 보아하니 여 승상이 다섯째 휘하에 들어간 듯했다. 언제 영원과 손을 잡았을까.
계 천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여 승상을 바라봤다. 그러고 고서강과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묵 승상을 바라봤다.
여 승상이 태도를 밝힌 것인가. 계 천관은 조금 실망하는 가운데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게 다행스럽기도 했다. 여 승상이 오황자를 내세우려 한다니, 음, 매우 좋은 일이다.
계 천관은 고서강을 힐끔 봤다. 오황자가 일단 경성에 나타나고 문무백관 앞에 나타나면, 사황자는 분명 모든 신경을 적자인 오황자에게 돌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왕은 지금처럼 조용히 물밑에서 움직일 수 있다. 사황자와 오황자가 한 번 더 용의 전쟁을 일으킨다면…….
“신은 여 승상의 말씀이 지극히 옳다고 여깁니다. 영 황후는 후궁의 주인, 영 황후가 마마의 후사를 주지하는 것은 법으로도 예로도 인정으로도 마땅히 그리해야 할 일입니다. 영 황후가 기력이 부진하면 궁에 양빈도 있습니다. 양빈이 영 황후를 보좌하면 됩니다.”
결정을 내린 계 천관은 즉시 여 승상의 의견에 동조했다.
“양빈은 줄곧 마마를 곁에서 모셔서 마마가 깊이 신임하고 의지했습니다. 신이 보기에 이번 큰일은 양빈이 주관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전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서강이 얼른 건의했다. 맞다. 왜 양빈을 잊었지. 양빈이 주관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지.
고서강이 다시 사황자에게 귀띔하자 조금 감을 잡은 사황자는 고서강의 물음에 침통한 마음으로 열심히 고심하는 표정을 드러내며 미간을 찌푸리고 이마를 짚었다.
“나는…… 나…… 고(孤: 왕이나 제후의 겸칭)의 생각엔 궁에 정 사람이 없으면 정씨가 나서서 주지하는 게 좋겠네. 고의 효심을 다하는 셈이기도 하고.”
그 말에 고서강은 쌍욕을 내뱉고 싶어졌다. 이렇게 판을 깨는 법도 있나? 정씨가 뭐라고? 천 팔백 번 돌아도 정씨가 나설 자리가 아니지!
여 승상은 눈을 내리깔고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고’자로 칭하는 게 빨라도 너무 빨랐다. 휴. 당당한 황자가 소인배처럼 뿌듯해서 거들먹거리는 모습이라니. 정말로 등극해서 천하에 군림하게 되면 역시 은퇴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경성을 멀리 떠나는 게 좋겠군. 이런 주군 밑에서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있나.
계 천관은 화가 나서 힘껏 수염을 쓰다듬는 고서강을 힐끔 바라봤다. 고서강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다가 우물쭈물 주뼛주뼛하는 진왕을 떠올리고는 그 웃음이 탄식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