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부모의 화근
여 승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영원을 바라봤다. 영원이 말하는 그분이 누군지 안다. 맞는 말이었다. 긴 세월 동안 궁은 그분의 손에 있었다.
“궁뿐만 아니라 별궁도 그분 손에 있습니다. 제가 경성에 오자마자 그분은 오가아를 별궁에서 꺼내서 성 밖에서 한 바퀴 돌게 했지요. 제가 어찌 감히 궁에 손을 대겠습니다. 오늘 같은 일을 어디 감히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영원이 쓴웃음 지었다. 복안 장공주가 오가아를 별궁에서 꺼냈었다는 말을 들은 여 승상의 표정이 변했다.
“그렇다면 어찌 그분을 찾아가지 않는가.”
영원은 대답하지 않고 여 승상을 바라봤다. 영원이 대답하지 않자 여 승상도 입을 다물었다. 영원은 그를 바라보고 그는 영원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영원이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먼저 말을 꺼냈다.
“승상야도 아시다시피 우리 영씨 가문은 언제나 본분을 지켰습니다. 태조께서 나라를 손에 넣은 이래 단 반 발짝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북삼로 밖이든, 경성이든 다른 지방이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여 승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영씨 가문은 북삼로 밖으로 손을 뻗은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누님이 황후로 책봉된 후에도 경성에서 십여 년 동안 살얼음판 걷듯이 조심했습니다. 전전긍긍 그저 목숨만 보전하려 했습니다. 영씨 가문도 경성에 손을 뻗지 않았습니다. 누님이 황후로 책봉된 건 태후의 친필 서신 때문이었습니다. 안팎으로 압력을 가하니, 아버지도 할 수 없이 누님을 경성으로 보낸 겁니다.”
영원은 조금 흥분했다.
“우리 영가는 대대로 식솔이 단출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누님을 사내 형제들보다 더 아끼셨습니다. 누님이 경성에서 불안하게 지내는 동안 아버지는 1년 사이 흰머리가 다 느셨습니다. 누님이 혼인하여 떠난 이래 어머니의 병이 나은 적이 없고요. 이런 상황에서도 영씨 가문이 손을 뻗은 적이 있었습니까?”
여 승상은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이번에 경성으로 온 건, 제가 자원해서 온 것입니다. 아버지가 허락하든 말든, 제가 왔습니다. 다른 걸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누님과 오가아를 그 새장에서 꺼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적어도 두 사람의 살길을 마련해 주려고요. 살아갈 기회를요.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 살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고요. 죽든 살든 원망은 없습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 영원과 영씨 가문은 경성에 남지 않을 겁니다. 성공하면, 저는 왔던 때처럼 홀로 말을 타고 돌아갈 겁니다. 북삼로로 돌아가서 계속해서 도적을 소탕하고 적과 싸우며 술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지낼 겁니다. 실패하면, 제 가족이 알아서 시신을 끌고 북삼로로 돌아가서 잘 묻어줄 겁니다. 거기가 제 집입니다. 우리 영가 사람은 죽든 살든, 북삼로가 아닌 곳에 머무르지 않을 겁니다.”
영원은 긴말을 내뱉고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양손으로 공수했다.
“승상야, 잘 생각해 주십시오.”
“내일 조회에서 이 일을 의논할 텐데 이 일은 남에게 전가할 수 없는 내 책임이다. 영 황후의 몸이 좋아졌다니, 주 귀비의 상제 대례와 후궁은 영 황후께서 주관하셔야지.”
여 승상은 승낙하려고 하니 시원스럽게 승낙했다. 영원은 너무 기뻐서 벌떡 일어나서 깊이 장읍했다.
“감사합니다, 승상야.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영원은 장읍하고 뒷걸음으로 물러난 후에 돌아서서 성큼 밖으로 나갔다. 기척을 들은 여염이 후다닥 나와 영원을 각문까지 배웅하고 서둘러 서재로 돌아갔다.
“영원이 왜 온 겁니까?”
의자에 기댄 채 잠든 듯 아닌 듯 눈을 감은 여 승상에게 물었지만, 여 승상은 눈을 뜨지 않고 대답했다.
“왜 왔겠느냐. 뻔히 알면서 묻기는.”
“할아버님을 포섭하려고요? 오황자요? 결탁하려고?”
여염은 의자를 끌어 여 승상 가까이 갔다. 흥분인지 긴장인지 격동인지 모를 모습이었다.
“함부로 말하기는!”
여 승상이 눈을 뜨고 노려봤지만, 여염이 다시 의자를 바짝 끌고 다가갔다.
“그럼 허락하셨습니까?”
“그래.”
“예? 허락하셨다고요? 전에 신하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으면서 왜 허락하셨습니까?”
여염은 너무 의외였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일은 변하는 법인데 어찌 같을 수가 있느냐. 변통할 줄 알아야지.”
여 승상이 여염을 툭 때렸다.
“주 귀비가 죽어서요? 그래서 영원 그치에게 약속하신 겁니까? 오황자를 아직 만나시지도 않았는데 어떤지 어찌 알고요. 할아버님, 할아버님은 언제나 신중하신데 이번엔 조금도 신중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여 승상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엄숙한 얼굴로 손자를 바라봤다.
“잘 들어라. 첫째, 영원은 결탁하려고 날 찾아온 게 아니다. 그저 영 황후가 궁으로 돌아와 주 귀비의 장례를 주관할 수 있도록 말을 꺼내달라고 했다. 네 할아비는 예부 아니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영 황후가 돌아오셔서 대례를 맡는 것도 지당한 일이고. 영원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여염이 입을 비죽였다.
그 지당한 걸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지 마는지가 문제죠. 조부가 나서서 말하는 이상 오황자를 끌어 올려주는 일이 되는데요.
“둘째, 아까 우리가 말하지 않았더냐. 사왕야가 설령 태자가 되더라도 불안하다. 오래 가지 못해. 남은 황자는 둘뿐이니, 인정으로도 이치로도 오황자를 내세워야 한다. 재목인지 아닌지는 지켜봐야 아는 것 아니냐. 게다가 오황자는 본성만 나쁘지 않고 자질이 심하게 떨어지지만 않으면, 잘 가르치면 분명 진왕보다 나을 것이다.”
여염이 한숨을 내쉬었다.
“길게 말씀하셨지만, 결국 마음이 기우셨군요.”
여 승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계 천관이 진왕 문하에 갔고, 내가 오황자를 조금 도와주면 묵 승상은 분명 중립을 지킬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게 가장 좋다.”
“예.”
여염은 한참 만에 짧게 대답했다.
“돌아가서 쉬어라. 내일부터 정신없을 것이다. 언제까지일지 몰라.”
“예.”
여염은 다가가 여 승상을 부축해서 거처에 모시고 직접 잠자리 시중을 든 다음에 거처로 돌아갔다.
같은 시각, 묵 이야는 함부로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는 묵 승상의 서재 뜨락에서 묵 승상과 함께 나왔다. 두 사람은 똑같이 뒷짐 진 채 고개를 숙이고 나란히 걸었다. 늙고 젊은 것이 달라서 그렇지, 판에 찍은 듯이 똑같은 모습이었다.
묵 이야는 묵 승상을 정원 입구까지 모셨고, 묵 승상은 계단에 오르다가 돌아보며 다시 당부했다.
“돌아가서 이런저런 생각할 것 없이 푹 자거라.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소칠에게 며칠 동안 출타하지 말고 집에서 글공부나 하라고 당부하고. 사람도 만나지 말라 해라. 특히 영원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님.”
묵 이야는 묵 승상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돌아갔다.
정원 상방에 희미하게 불빛이 켜있었다. 묵 승상이 들어가자 전 노부인이 일어서서 맞이했다.
“무슨 큰일이 났기에 부자 둘 다 일어나셨어요?”
“주 귀비가 죽었소. 대황자가 학정홍으로 독살했소. 휴.”
묵 승상은 전 노부인의 손을 잡고 화항 위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가 촉중에 갔던 첫해에 당신이 비슷한 사건을 심사했었지요.”
전 노부인은 그리 놀라지 않고 그저 한숨만 푹 쉬었다.
“그때 아들이 한 짓 같다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더랬어요. 그 어미가 얼마나 아들을 아꼈는데요. 아들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정도로 아꼈어요.”
“그랬지. 나중에 아들을 심문할 때 당신이 굳이 뒤에서 지켜보겠다고 했었지.”
묵 승상은 그리운 듯이 빙그레 웃으며 회상했다.
“그랬지요. 그 아들이 어미를 죽인 이유를 말할 때, 그 말들……. 휴. 부모 사랑이 깊을수록 자식에겐 해로울 수 있다니. 그 아들이 했던 말들, 평생 잊지 못했네요. 둘째가 도씨와 혼인하겠다고 했을 때, 난 도가와 도씨가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때 그 아들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결국 허락한 것이고요.”
전 노부인은 자식 중에 가장 똑똑하고 가장 잘난 둘째가 지금 집에서 스님처럼 사는 걸 생각하면 지금도 두려웠다. 그때 죽어라 막았었다면 둘째 아들은 지금쯤 진작 뼈가 삭아서 사라졌을 것이다.
“둘째는 지금 잘 살지 않소. 지금 집필 중인 전 황조의 사림 기록이 거의 끝나간답디다. 얼마 전에, 여생 동안 상인전을 쓸 생각이라고 하더군. 각지 상인 가문의 이야기를 기록해 책으로 엮겠다고. 나중에 우리 묵씨 가문의 이름을 둘째가 알릴지도 모르지. 둘째에겐 소칠만 있으면 충분하오.”
묵 승상이 전 노부인을 위로하지만, 소칠을 떠올린 그녀는 조금 마음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드러내진 않았다.
“나도 압니다.”
전 노부인은 잠시 멈췄다가 나직이 물었다.
“영 황후가 돌아오겠지요?”
“아마. 내일 조정에서 이 일을 거론할 만한 사람은 다 거론하겠지. 앞으로 분쟁의 국면이 이어질 것이오. 황상이 계실 땐 그래도 괜찮겠지만, 새 황상이 등극하면 온 세상에 피가 흐를 것이오.”
묵 승상은 앞으로의 난국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중심을 잘 잡으셔야 합니다.”
전 노부인이 걱정스러운 듯 당부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계 노승상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어느 정도는 하니까. 앞으로 당신은 소칠을 잘 단속하시오. 녀석은 속셈도 없는 데다가 단순하고 나쁜 쪽으로는 생각을 안 하는 성품이라 말이지.”
“소칠도 혼인할 때가 되었습니다. 좋은 처를 들여야겠어요. 좋은 아이가 들어오면 그 아이를 단속할 사람이 하나 더 늘겠지요. 그리고 여섯째도 나이가 찼습니다.”
“소칠의 처는 사람을 보고 골라야 하오. 반드시 좋은 아이를 들여야 해. 소칠 같은 아이는 반드시 중심을 잡아줄 처가 필요하오. 여섯째의 혼사는 집안을 봐야 하오. 좋은 집안부터 골라야 하지. 사내도 좋아야 하지만, 집안은 더더욱 좋아야 하오. 안원후부 같은 곳은 절대 안 되지.”
손자 손녀의 혼사 이야기가 나오자 묵 승상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압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휴. 1, 2년 사이에 아이들의 혼사를 정해야겠어요. 혼인하는 것도 방어가 될 테니까요.”
전 노부인은 귀밑머리가 하얗게 센 남편을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귀밑머리를 쓰다듬었다.
“눈 깜짝할 사이 몇십 년이 흘렀군요. 머리카락 센 것 좀 보세요.”
“당신 머리카락도 셌는걸. 됐소. 탄식하지 말고 어서 쉬시오. 내일부터 궁에 들어가 경야(經夜: 영구를 지키며 밤새는 일)해야겠지. 날이 춥소. 옷 든든히 입고 입궁하시오.”
묵 승상은 내일부터 조정과 궁이 혼란스러워질 걸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경성과 멀리 있는, 인적이 거의 없는 그 별궁 안. 영 황후는 유월이 창문으로 뛰어나간 후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화항에서 내려갔다. 가장 동쪽에 있는 곁방에 들어갔더니, 오가아의 화항 앞에서 난로를 지키며 당직 서던 소백이 얼른 일어났다. 영 황후는 소리 내지 말라고 손가락을 세워 보이고는 살금살금 화항 앞으로 다가가서 몸을 틀고 화항 가장자리에 앉아서 잠든 오가아를 내려다봤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영 황후가 오가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넘겨주는데 오가아가 단번에 눈을 뜨고는 영 황후인 걸 보고 웅얼거리며 “어머니!” 하고 불렀다.
“그래, 어미다.”
“어머니, 왜 안 주무세요? 무슨 시각이에요?”
오가아가 잠이 덜 깬 눈으로 꼼지락꼼지락 제 얼굴을 영 황후에 손에 비볐다.
“삼경이다. 자다가 일어났다. 네 외숙이 사람을 보냈다. 올해는 성에서 새해를 보내야 한다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