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여 승상의 한담
그리고 장공주. 장공주는 무슨 생각일까? 얼마 전에 혼인 강요를 받고 궁에서 나온 이래 측비 하나가 죽더니 오늘은 주 귀비가 죽었다. 이건 장공주의 솜씨다!
그렇다면 넷째는 고려할 것 없고, 진왕과 소오 중에 누구로 생각할까?
장공주는 일단 접어두고, 조정은 어떨까? 내가 결탁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누가 소오 편일까?
묵 승상? 수상 스스로가 지지하는 쪽이 있으면 공격당하기에 십상이다. 수상 자리에 있기도 어려워진다. 수상은 오로지 황상에게만 충성해야 하니, 기우는 쪽이 있어도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묵 승상은 당분간 경원하자.
여 승상은?
여 승상을 떠올린 영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 승상은 계 노승상이 신경 써서 키우고 승상 자리까지 발탁한 사람이었다. 그와 계 노승상은 결이 같다. 예전에 누님과 소오는 계 노승상의 도움 덕에 난관을 넘기고 살아남았다.
한 번 도왔던 사람은 줄곧 도울 것이다!
영원은 벌떡 일어나서 두봉을 걸치고 대영, 대웅을 데리고 매우 평범한 마차를 타고 정북후부 후각문으로 나가서 여 승상부로 향했다.
지금 조정은 세 세력으로 나뉜다. 계 노승상의 위엄과 은혜를 이어받은 계 천관이 묵 승상, 여 승상과 균등하게 세를 겨루고 있다. 여 승상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묵 승상은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으니 5할 이상의 승산이 생긴다.
여 승상은 저택 일각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서재에서 손자 여염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염은 차를 매우 옅게 내렸고 여 승상은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등을 구부린 채 계속해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휴, 이런 일이 생겼으니 앞으로 사서에 뭐라고 쓰일까나. 모친 시해라니. 아이고!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예전에 내가 글공부를 가르친 적도 있었는데, 아둔하고 모질긴 해도 이 정도는…….”
여 승상은 쉴 새 없이 고개를 젓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마음은 거죽 안에 있지 않습니까. 그 속을 누가 들여다보겠습니다.”
처음엔 놀랐던 여염은 대황자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고는 그가 모친을 시해했다는 사실을 여 승상보다는 쉽게 받아들였다.
“대왕야에게 사사하겠지요?”
여염의 물음에 여 승상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아마도 위리안치할 것이다. 기껏해야 몇 년 연명하는 것이겠지만.”
“음, 황상이 계실 때나 대왕야를 감쌀 테니까요.”
여염은 사황자를 떠올렸다.
“대왕야가 끝장났으니, 사왕야가 태자가 되겠지요?”
“그렇겠지.”
여 승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신이 딴 데 팔린 듯했다.
“사왕야의 천성이 대왕야보다 못하다고 하셨잖습니까. 정말로 태자가 되면……. 휴.”
여염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계 노승상의 말이다. 계 노승상이 사람 보는 눈은 틀린 적이 없던 것 같구나.”
계 노승상을 떠올린 여 승상은 또 한숨이 나왔다.
너무 심각한 화제에 여염은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참, 계 노승상이 역경에 정통해서 점괘를 지극히 잘 봤다던데, 정말인가요?”
여 승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염이 계속 물었다.
“그럼 국운을 점친 적 있으셨나요?”
여 승상은 손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랬지.”
“정말로요? 뭐라고 나왔나요? 계 노승상의 점괘는 틀린 적 없다면서요. 그랬다면…… 뭐라고 나왔나요?”
여염이 웃으며 호기심 가득한 듯 물었다. 여 승상은 그리움 가득한 얼굴로 등받이에 기댔다.
“그때, 영 황후가 막 입궁해서 뭐든 양보하던 시절이지. 계 노승상은 근심이 많았다. 그래서 점을 봤는데, 첫 점괘가, 나는 역경도 모르고 점괘도 몰라서 계 노승상의 해석만 들었는데, 황상의 혈맥이 한 대만에 끊어진다고 명확하게 나왔다고 하더구나.”
“예? 한 대요? 그럼…….”
그럼 지금 황자 대에서 대가 끊어진다는 말 아닌가. 말이 되나.
“계 노승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마도 점괘에서 더 무시무시한 것을 봤겠지. 그런데 이야기하진 않으셨다. 어쩌면 성의가 부족하고 경건하지 못해서 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다시 점을 쳤다.”
여 승상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조화로운 것이 매우 듣기 좋았다.
“또 한 번 점을 쳤는데, 이번엔 국운이 왕성하고 자손이 덕망 높은 매우 좋은 점괘라고 하시더구나.”
“응? 재미있네요. 어쩌면 그렇게 달랐을까요? 어떤 점괘가 틀린 거였습니까? 정말로 성의와 경건함이 부족해서였습니까?”
여염은 지극히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점괘를 모르니 알 수 없지. 계 노승상의 안색이 매우 안 좋았다. 다음 날 목욕재계하시고 다시 두 번 점을 보았다. 두 번 모두 그 전의 점괘와 똑같았다.”
여염은 아까보다 더 놀랐다.
“예? 같은 일로 두 번 점을 쳤는데 결과가 똑같았다고요? 계 노승상은 뭐라고 하셨어요?”
“귀신과 관련된 일은 믿지 않을 수도 없지만, 완전히 믿으면 안 된다고 내가 설득했더니, 계 노승상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고 열흘 뒤에 다시 한번 점을 칠 생각이라고 하시더구나.”
거기까지 말한 여 승상은 돌연 말을 멈추고 허탈한 얼굴로 한참 있다가 계속했다.
“그때 말렸어야 했다. 휴! 진실한 점괘를 얻으려면 수명을 바쳐야 한다고 하셨다. 이 할아비는 예전에 그런 것들을 안 믿었단다. 신불을 경원할 뿐이었다. 그래서 계 노승상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날 내가 점을 치는 계 노승상을 밖에서 지켰다. 꼬박 하루를. 날이 밝았을 때 계 노승상이 문을 열고 나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여염은 숨도 잘 못 쉴 정도로 긴장했다.
“모른다. 그 점괘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저 본인의 수명이 다했다고만 말했지. 두 달 후에 계 노승상이 몸져누우셨다. 그렇게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어. 자주 뵈러 갔는데 한 번은 점괘가 어떻게 됐는지 물었더니, 딱 한마디 하시더구나. 천기를 누설할 수 없다고.”
“예? 그때 여쭤보셨어야죠.”
여염은 실망하는 표정인데, 여 승상은 허무한 표정이었다.
“묻지 말아야 할 건 캐묻는 게 아니다. 근래 내내 생각한단다. 정말 수명이라는 게 있다면, 그때 계 노승상이 마지막 점괘를 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도 건재하지 않을까. 계 노승상이 건재했다면 오늘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할아버님.”
여염이 더 물으려는데 서재 밖에서 사환의 기별이 들렸다.
“승상야, 대소야, 배첩(拜帖: 방문할 때 사용하는 봉투 크기의 명함)이 들어왔습니다.”
여 승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한밤중에 배첩?
“음? 가지고 오너라.”
“예.”
사환이 검은 바탕에 이금(泥金: 금을 잘게 부수어 금분으로 만든 후 아교에 갠 것)으로 글자를 쓴 배첩을 들고 와서 여 승상에게 바쳤다.
“승상야, 이것입니다. 중문 문간방 당직 말이, 허리를 잠시 숙여 숯을 휘저은 사이에 탁자에 이 배첩이 놓여 있더랍니다. 지체할 일이 아니라서 얼른 가지고 들어왔고요.”
이미 배첩을 열어본 여 승상이 살며시 한숨을 내쉬며 사환에게 분부했다.
“음. 물러가라. 옛 친우가 장난친 것이다. 배첩이 아니라고 문지기에게 전하고.”
“예.”
사환이 물러간 후 여염이 여 승상을 바라보며 누구인지 물었다.
“누구겠느냐.”
여 승상이 배첩을 손자에게 건넸다.
“후각문에 있다는구나. 네가 데리고 들어와라.”
여염이 배첩을 열었다. 역시나, 마지막 낙관이 ‘영원 배상’이었다.
영원은 여염을 따라 느긋한 모습으로 서재 뜨락에 들어가서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여 승상부는 청아한 곳이라고 다들 그러더니, 과연 곳곳이 소박하고 본연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 실로 드물게 청아한 곳이군.”
“과찬이네. 부끄럽네, 칠야.”
여염은 수시로 영원을 힐끔거렸다. 평소에 못 말리게 방탕한 언행이 모두 위장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 늦은 밤 찾아온 그의 앞에서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여염은 영원을 서재 입구로 안내하고 휘장을 들어 올려주고는 따라 들어가지 않고 곁채로 물러가 기다렸다.
영원이 들어가자 여 승상은 일어서서 공수했다. 영원이 다급하게 깊이 장읍했다.
“깊은 밤에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승상야.”
“칠랑, 체면 차릴 것 없다. 앉아라.”
여 승상이 자리에 앉아 영원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영원은 여염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취침 들지 않으신 건 오늘 일어난 큰일이 근심되어서겠지요.”
“근심은 아니고, 마음이 아플 뿐이다.”
여 승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마음이 아팠다.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죄업이지요.”
영원은 단정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평소의 건들거리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긴 하지.”
여 승상은 줄곧 한숨을 내쉬었다. 영원은 담담하고 평온해 보이는 여 승상의 모습을 침묵하고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깊이 장읍했다.
“영원,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체면 차릴 것 없다. 칠랑, 앉아서 이야기해라.”
여 승상이 몸을 숙이며 손짓하자 영원은 고분고분 다시 자리에 앉아서 여 승상을 바라봤다.
“제 누님, 영 황후와 오황자는 줄곧 별궁에 은거했습니다. 주 귀비가 세상을 떠났으니 상제 대례를 주지할 사람이 궁에 없습니다. 누님과 오황자가 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도와주신다면, 저 영원, 영씨 일가 감사하기 그지없겠습니다.”
여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긴 해야지. 하지만 영 황후와 오황자는 병약해서 그 사이 별궁에서 정양하지 않았나. 괜찮아진 적이 없지. 올해도 작년, 재작년과 비교해서 나아졌다는 소식을 못 들었네. 특히 오황자, 올해만 일곱 번 병 드셨어. 지난번이 두어 달 전이었고. 영 황후와 오황자께서 견디지 못할까 걱정이다.”
영원은 눈을 내리깔고 침묵했다.
“오늘 승상야께 도움을 청하러 온 이상, 제 사람으로 여기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누님과 오가아가 이렇게 병약하지 않았다면 이미 그 무덤에 풀이 높이 자랐을 겁니다. 실로 부득이해서 그런 것입니다.”
“영 황후와 오황자의 몸이 괜찮단 말이냐? 건강한 편이란 말이냐?”
여 승상이 몸을 꼿꼿이 세웠다. 조금 놀란 듯했다. 영원은 조금 어이없는 듯 바라보다가 살짝 몸을 숙이고 매우 진지하게 대답했다.
“예. 건강한 편입니다. 주 귀비의 상제 대례를 주지하는 것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그럼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 마음이 놓인다.”
여 승상은 다행이라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승상야.”
영원이 바라보자 여 승상이 온화하게 웃었다.
“안다. 경성에 온 지 반년 동안 한 번도 누이를 만나러 가지 않았지. 그 그리움이 어쩔지, 나도 짐작한다. 참 귀한 오누이 정이구나.”
영원이 쓴웃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왜 경성에 왔는지, 제가 경성에 들어오기 전에도 승상야는 이유를 다 아셨겠지요. 경성에 왔는데 이런 상황이 오기 전에 누님을 만나러 가는 건 누님에게도 저에게도 시시비비를 초래할 뿐입니다.”
“그건 그렇지. 줄곧 시기를 기다려 왔는데, 고심한 보람이 있구나.”
여 승상이 뼈 있는 말을 건넸다.
“승상야, 영명하십니다. 오늘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듣고 저는 놀라서 혼비백산했습니다. 저 영원, 우리 영씨 가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승상야도 믿지 않으실 것이고, 저 자신도 그런 말을 할 염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있어도 힘이 없었습니다. 승상 자리에 십여 년 동안 계셨으니 경성의 모든 것을 거울 보듯 훤히 알고 계시겠지요. 궁 안은 절대로 저 영원이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경성에도 제가 거슬러선 안 될 사람이 많고요. 그중 선두가 바로 그분이고요.”
몇 마디 나누는 사이, 영원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여 승상 같은 사람을 상대로 빙빙 돌리고 떠봐야 바라는 걸 얻을 희망이 묘연하다. 그럴 바엔 터놓고 말하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