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76화 (276/463)

276화: 얼음물 뿌리기

“황상이 아무리…… 어쨌든 내 오라비야. 나는 적어도 황상이 주씨처럼 횡사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새해가 되면 난 이 별원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 내일 아침 일찍 문도를 내게 보내.”

“알겠어요.”

“이번 독 사건, 영원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은 모르겠어. 다 북삼로에서 데리고 온 사람을 썼을 테니 경계심이 매우 강해. 하지만 분명 영원이 상관있을 거야.”

복안 장공주의 목소리에서 갈수록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그 사람은요? 장공주께서…….”

이동은 묘하게 걱정이 됐다. 복안 장공주는 웃는 듯 마는 듯 이동을 삐딱하게 바라봤다.

“내가 영원을 탓하냐고? 내가 왜? 첫째도, 넷째도, 먼저 이상한 마음을 품었으니 현혹당한 거겠지. 속았다고 하더라도 남 탓이 아니야. 제가 어리석은 걸 누구 탓을 하겠어.”

“영원이 더 많은 일을 꾸몄다면요?”

이동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아냐. 황가의 피를 묻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영원은 똑똑한 사람이야. 영씨 가문은 조상대에 절대로 주군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했어. 가장 중요한 건, 손을 더 쓸 필요가 없어. 지금만 해도 이미 충분해.”

“네.”

복안 장공주의 담담하고 냉담한 말에 이동은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영원은 그녀에게 모든 걸 숨김없이 말했다. 영원과 복안 장공주가 어느 날 칼을 겨누고 너 죽고 나 살자 다툴까 봐 걱정되었다.

“조금 피곤해. 가지 말고 곁에 있다가 닭이 울면 돌아가.”

복안 장공주는 비단 방석 아래로 몸을 내려서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이동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몸을 숙여 이불을 덮어 주었다. 불을 끄려고 하는데 장공주가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불 끌 것 없어. 이대로 둬.”

“네.”

이동은 뒤로 물러나서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서 이불을 두르고 앉았다.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예전엔 그녀가 강환장과 혼인한 지 4년째 되던 해였음을 똑똑히 기억한다. 고 이낭이 낳은 장자가 엉금엉금 기어 다닐 때, 대황자와 사황자가 한바탕 싸운 끝에 양측 모두 몰락했다. 쓰러진 주 귀비는 네댓 달 몸져누워있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주 귀비가 세상을 떠난 후 황상은 병에 걸렸고, 거의 1년 가까이 누워있었다. 마지막 몇 개월엔 태자가 감국했고.

이번엔 강환장과 혼인한 지 두 달 만에 수녕백부에서 나왔고, 그 후로 영원이 경성으로 왔다. 지금 주 귀비가 죽었고 사황자가 태자가 되었다. 모든 것이 예전과 완벽하게 달라졌다.

이동은 양손으로 이마를 짚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불조의 은혜다. 그녀에게 살길을 주고 지금은 장공주의 살길도 주었다.

그렇게 오래 지난 것 같지 않은데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동은 살짝 몸을 움직여 화항에서 내려와 신을 신은 다음 고개를 내밀고 장공주를 내다봤다. 푹 잠든 것처럼 호흡이 고른 그녀를 깨우지 않고 발끝을 세우고 방을 나와서는 바깥채를 지키는 녹운에게 눈짓하고 조용히 별원을 나섰다.

이동이 자등 산장으로 돌아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마차가 중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만 어멈이 마중 나왔다.

“낭자,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태태와 대야가 속을 태우면서 기다리고 계세요.”

“소식을 전했잖아.”

이동이 마차에서 내려서 장 태태의 정원으로 허둥지둥 가면서 말했다.

“그냥 아무 일 없단 말뿐이었잖아요. 낭자가 아무 일 없다는 건지, 장공주가 아무 일 없다는 건지도 모르고 그냥 아무 일 없다는 한마디요. 그런데 낭자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으시니.”

만 어멈이 뛰듯이 걸었다. 그녀도 온통 안 좋은 생각만 하며 조마조마 기다리고 있었다.

시녀가 휘장을 걷어주자 이동이 안으로 들어갔다. 장 태태는 그녀를 보자 길게 안도하며 합장하고 쉴 새 없이 염불을 외웠다. 이신과 문 이야는 같이 일어섰다. 이신은 무심결에 바짝 다가가서 이동을 유심히 살폈다.

“괜찮은 거지?”

“괜찮아요. 장공주도 아무 일 없고요.”

이동은 두봉을 벗으며 방 안에 있는 시녀와 어멈에게 물러가라고 명했다.

“다 물러가. 만 어멈은 문 앞을 지키고.”

문 이야와 이신의 안색이 변했고 장 태태도 곧바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동은 안에 있던 시녀, 어멈들이 싹 나가고 만 어멈이 휘장을 내리고 나가서 문 앞을 지키는 걸 보고 일단 문 이야에게 말했다.

“이야부터 들으세요. 주 귀비가 죽었어요. 대황자의 독으로요. 장공주는 오늘 날이 밝으면 바로 입궁해야 할 거라고, 얼른 만나러 오라고 하셨어요.”

문 이야의 두 눈이 희한할 정도로 빛났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잠깐만요.”

이동이 문 이야를 불러서 나지막이 속닥였다.

“기회를 보고 영 칠야에게 말을 전하세요. 주 귀비의 중독 증상에 유의하라고요. 그날 장녕궁엔 두 왕야 모두 있었어요.”

문 이야가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자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 마음 놓으십시오.”

문 이야는 이동을 향해 공수한 다음 장 태태와 이신에게도 공수하고 돌아서서 나갔다. 사람을 불러 말을 준비한 다음 날 듯이 대문을 나서서 복안 장공주의 별원으로 질주했다.

문 이야가 나간 뒤 이동은 한숨을 내쉬며 장 태태의 곁에 앉았다. 그녀는 표정이 심각한 오라버니와 걱정 가득한 어머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새벽에 절 부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요. 바로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래요. 대왕야가 학정홍을 주 귀비의 탕약에 넣고 직접 약을 바치고 먹였대요. 태의도 살리지 못했고요.

주 귀비가 눈 감기 전에 황상께 두 가지를 부탁했대요. 하나는 대왕야를 죽이지 말라는 것, 또 하나는 즉시 사왕야를 태자로 세우라는 것. 주 귀비는 분명 황후로 추서될 거래요. 또 영 황후도 궁으로 돌아올 거라고 하셨어요.”

“그럼 당분간 장공주는 보림암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겠구나.”

장 태태가 민감하게 묻자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슬슬 정리하고 경성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요?”

이동이 장 태태와 이신을 바라봤다. 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때엔 경성에 있는 게 움직이기 쉽긴 하지. 나는 이따 바로 성으로 들어가마.”

“휴. 혼란스러워지겠구나.”

장 태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밤, 영원은 묘하게 마음이 어수선했다. 경전을 베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서 아예 후원으로 가서 권법 수련을 했다. 땀을 흠뻑 흘리고 돌아와서 목욕한 후에도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일어나 앉아서 후원에 가서 한 바퀴 달리고 올까 고민하는데 대영이 다급하게 밖에서 고했다.

“칠야, 최 나리가 뵙길 청합니다.”

“최신? 어서! 들어와서 이야기해라!”

영원이 벌떡 일어섰다. 대영이 문을 열자 최신은 열기를 내뿜으며 달려 들어왔다. 눈이 얼마나 빛나는지 불을 뿜을 지경이었다.

“칠야, 주 귀비가 죽었습니다! 주 귀비가 죽었어요!”

“뭐라고?”

영원이 꽥 고함쳤다. 귀를 의심할 말이었다.

“죽었습니다! 죽었어요! 꽥! 대왕야가 죽였습니다. 독으로요.”

“귀비가 죽었다!”

영원이 이마를 탁 내리쳤다.

“귀비가 죽었습니다! 누님!”

영원은 누님을 큰 소리로 부르고는 침상에서 뛰어 내려와서 대뜸 옷을 잡아당겨서 입으면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귀비가 죽었다. 누님에게 알려야지! 누님을 모셔와야지!”

“예?”

최신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영원은 어느새 그의 곁을 쏜살같이 지나쳤다. 문밖에서 지키던 대영은 맨발로 밖으로 쏜살처럼 달려가는 영원을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을 벌리고 바라봤다.

중문까지 단숨에 달려간 영원은 맨발로 서서 조용하고 어두운 중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굴을 문질렀다.

내가 왜 이러는 거냐.

영원은 얼굴을 또 문지르고는 돌아서서 맨발인 채로 안으로 돌아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대영이 신과 옷을 끌어안고 최신과 함께 달려왔다. 최신은 영원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칠야!”

“나리, 얼른 신발 신으세요.”

대영은 영원의 하얀 발을 마음 아픈 듯이 바라봤다. 품에 안은 옷을 최신에게 찔러주고 저는 얼른 다가가 무릎을 꿇고 영원에게 신발을 신겨 주었다.

영원은 다리를 들고 대영이 신겨 주는 신발을 신은 다음 최신의 품에서 두봉을 가져와 걸쳤다.

“괜찮다. 숨 돌리려고 잠깐 달린 것이다. 어서 돌아가자. 대영, 너는 복백, 유월, 위봉낭, 그리고 장대를 불러라. 다 불러와. 빠를수록 좋다.”

대영이 쪼르르 달려 나간 후 영원이 최신을 향해 눈짓했다.

“말해 봐.”

“예. 장녕궁 다수방, 황 영감이 전한 소식입니다. 제가 경성에 오자마자 알게 된 자인데 그동안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저녁에 장녕궁에 갑자기 커다랗고 포악한 들고양이가 뛰쳐 들어와서 앵무새를 물어 죽였답니다. 회랑에 걸린 등롱도 떨어져서, 앵무새에 고양이에 거기에 불까지 나서 장녕궁이 아수라장이 됐답니다. 그러다가 주 귀비가 중독됐다고 해서 태의들이 모두 달려와서 숯 재를 가지고 오라고 황 영감을 불렀답니다. 그리고 황상도 오시고, 사왕야도 왔답니다. 나중엔 대왕야를 가뒀답니다. 소인이 사람을 보내 가 보았는데, 대왕야부를 벌써 겹겹이 에워싸고 봉쇄했습니다.”

“장녕궁엔 누가 또 있고?”

“다른 사람은 없는 듯합니다. 황 영감이 마침 어제 당직이라서 똑똑히 봤답니다. 어제 절 찾아와서 뒷일을 부탁했습니다. 장녕궁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아마도 아무도 없을 거라고요.”

최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장보살 앞에서 이틀이나 앉아 있더라니. 나는 넷째에게 손 쓰려고 고민하는 줄 알았지. 형제 사이에 정이 그렇게 깊었나 감탄했더니, 내가 참 높이 샀네. 어미를 시해하려는 거였어. 정말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군.”

영원이 혀를 찼다.

“최숙, 일단 돌아가. 가서 세 황자 저택, 계가를 눈여겨서 지켜봐. 사람은 모두 동원하고. 한동안 바빠질 거다.”

영원의 분부에 최신이 활짝 웃었다.

“예! 진작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소인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최신이 공손히 물러간 후, 영원은 자신의 거처 뜰 문으로 돌아가 뜨락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대웅, 대호를 불러 물통을 가지고 오라고 한 다음 뜨락에 선 채 옷을 벗고 물통을 들어 올려 머리부터 들이부었다. 한 통을 붓고 또 한 통, 연달아 네댓 통 부은 다음 정신이 완전히 맑아졌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축축이 젖은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대웅와 대호에게 몸을 맡기고 깨끗이 닦은 다음 옷과 신을 신었다.

유월을 비롯한 수하가 모두 도착하자 영원은 간결하고 명료하게 분부했다.

“유월, 별궁에 가서 누님에게 대황자가 주 귀비를 독살한 사실을 알리고, 궁으로 돌아올 준비하라고 전해라.”

유월을 비롯한 모두 경악했다. 복백은 잠시 얼떨떨해하더니 뒷걸음질 쳐서 얼굴을 가리고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사 조심하라고 전해. 됐다.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지. 내가 마중 갈 거라고 전해라.”

연달아 얼음물을 몇 통이나 들이부은 영원은 지금 매우 침착했고 감정을 억누르며 흐느끼는 서글픈 복백의 울음소리에도 영향받지 않았다.

유월이 나간 뒤 영원은 위봉낭에게 분부했다.

“넌 별궁에 가서 누님 곁에 있어라. 누님 쪽엔 사람이 부족할 것이다.”

위봉낭이 나간 뒤 영원은 계속해서 복백과 장대 등에게 분부했다. 모든 명령을 마치고 모든 이가 명을 받고 나간 뒤 영원은 다리를 틀고 화항에 앉아서 정신을 집중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주 귀비가 죽었으니 대황자와 사황자는 의지할 곳을 잃었다. 대황자는 이미 갇혔고. 모친을 시해했으니 죽지 않더라도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게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가두다.)는 당할 것이다.

사황자가 태자가 될까?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태자가 되더라도 주 귀비가 없다. 넷째의 어리석음과 안하무인,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태도라면 태자 자리에 앉아 있기 힘들 것이다. 자신에게 보이는 일인 만큼 남의 눈에도 보이리라. 조정엔 영리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첫째와 넷째를 제외하면 남은 건 진왕과 소오다. 계 천관은 이미 진왕 문하에 의탁했고, 앞으로 더 많은 이가 진왕 문하에 의탁할 것이다. 그럼 소오는? 소오에게 기울 사람이 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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