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모든 것이 변했다
백 노부인뿐만 아니라 이동도 새벽에 불려 일어났다.
청국이 흔들어서 일어났더니, 청국이 긴장하고 두려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낭자, 장공주가 사람을 보냈어요. 별원으로 오시래요. 지금 바로요. 즉시. 게다가 길을 서둘러 오래요.”
이동은 화들짝 일어났다.
“서둘러! 소세할 것 없어. 옷! 젖은 수건 줘! 어서!”
이런 새벽에 불러서 즉시 오라니. 게다가 길을 서둘러서.
장공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픈가? 아니면…….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놀라고 초조해서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장 태태가 고르고 골라서 들인 청국을 비롯한 시녀들은 서두르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재빠르게 손발을 놀렸다. 청국이 이동의 옷시중을 마쳤을 때 녹매는 밖에서 기다리다가 대교를 불러 마차를 준비했다.
이동은 소식을 빠르게 전할 수 있도록, 말을 탈 줄 아는 어멈도 불러 말을 타고 따라오게 했다. 그녀는 장 태태에게 기별할 새도 없이 다급하게 나와서 수련과 녹매를 데리고 중문에서 마차에 탔다. 대교에게 마차가 흔들려도 상관없으니 빠를수록 좋다고 분부했다.
대교는 빠르게 말을 몰았고, 이동과 수련, 녹매는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고도 흔들려서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평소보다 반밖에 안 걸려서 대교가 복안 장공주의 별원 각문 앞에 마차를 세웠다. 마차가 제대로 서기도 전에 녹매가 튀어 내렸고, 수련이 뒤따라 내렸다. 두 사람이 이동을 부축해 내렸을 때 각문이 벌써 소리도 없이 안에서 열렸다.
“장공주는 아무 일 없으시지?”
이동은 각문 안으로 발을 내디디며 다짜고짜 물었다. 문을 연 어멈은 평온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살짝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췄다.
“무슨 일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이동은 잠시 어멈을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걸음을 내딛다가 뻣뻣하게 돌아섰다.
“장공주는 어디에 계시지?”
“등롱을 따라서 가시면 계십니다.”
어멈이 웃으며 하는 말에 이동이 돌아봤다. 바닥에 놓인 작은 등롱이 그야말로 작은 길을 만들어 놓았다.
장공주의 성격과 수완이라면 아무리 큰일이 생겨도 알리려고 하지 않으면 알리지 않을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어멈들이 모르게 할 생각이었다면 감쪽같이 모를 것이고.
이동은 몇십 보마다 놓인 작은 등롱만 바라보며 뜨락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서 뜨락을 지나 수화문으로 들어가서 다시 뜨락을 지나쳐 계단으로 오르자마자 휘장이 안쪽에서 열렸다. 얼른 들어가 보자, 긴 옷을 걸친 복안 장공주가 나른하게 화항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마음이 놓인 이동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서둘러 옆에 있는 의자 손잡이를 잡고 그 김에 의자에 털썩 앉았다.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네가 이러는 걸 보니, 혹시 너 내가…….”
“네,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 금을 삼켰거나 병이 났거나 불이 났거나, 뭐든요.”
이동은 정말로 오는 내내 안 좋은 일만 생각했다. 장공주가 멀쩡해도 너무 멀쩡한 모습을 보자 걱정했던 만큼 목소리도 불퉁스러웠다.
“금을 삼켜?”
복안 장공주는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턱을 문질렀다.
“재미있네. 어쩌다가 금을 삼킨다는 생각을 한 거지? 역시 장사하는 사람이라 뭐든 금을 떠올리네. 내가 금을 왜 삼켜? 하지만…….”
복안 장공주가 말꼬리를 길게 끓었다.
“자진할 거라면 좋은 방법이네. 금을 삼키면 당장은 안 죽어. 시간이 걸리지. 하루 이틀은 걸린다더군. 그사이에 천천히 생각하는 거야.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었는지. 금을 삼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리석었는지 말이야. 하나하나 생각하는 거지. 하루 이틀 걸린다잖아. 죽기 전에 분명 명명백백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러면 여한 없이 죽는 거야. 자기가 어리석어서 죽는 거잖아.”
이동은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바로 이렇게 생각하고 금을 삼킨 것이었을까.
“겉옷 벗고 화항 위로 올라와. 이 방은 바닥을 지피지 않았어. 난 수행하는 사람이잖아. 너무 사치하면 안 돼. 하지만 봄이 오면 사람을 불러 바닥을 지필 수 있도록 할 거야. 올라와. 위엔 따듯해. 얼굴 좀 봐. 얼어서 시퍼렇다.”
복안 장공주는 절대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동은 일어서서 두봉을 풀었다. 장공주 말대로 얼굴이 시퍼렜다. 하지만 장공주의 말 때문이지 추워서가 아니었다. 다급하게 걸어오느라 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이동이 신을 벗고 화항 위로 올라가자, 녹운이 얇은 이불을 다리에 걸쳐주고 방석 몇 개를 들고 왔다.
“녹운, 내가 하면 돼. 미안하지만 차 한 잔 줘. 입 헹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신경 쓰지 못했어.”
이동이 손을 내밀자 녹운은 방석을 건네주고 따듯한 물과 수우(漱盂: 입 헹굼 물 그릇)을 들고 왔다.
복안 장공주는 이동이 입을 헹구고 차를 마시는 걸 본 후에야 나지막이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걱정해?”
“무서웠어요.”
이동이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복안 장공주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가 된 거야? 나한테 무슨 일이 있을 게 뭐가 있어. 금을 삼킨대도, 그러니까 내가 정말로 금을 삼킬 생각이었으면 모든 걸 다 준비했겠지. 이 새벽에 널 부를 리가 있어? 내가 그렇게 엉망인 사람이야? 병이 든 거라면, 태의도 부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말을 전할 때 의원도 모시고 오라고 했겠지. 널 불러온 다음에 의원을 부르라고 할 리가 있어? 그리고 불이 난 거라면, 불이 났는데 널 불러서 뭐 해? 네가 용왕이니?”
“너무 놀라서 그런 거예요.”
이동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이유를 다른 사람은 이해 못 할 수밖에 없었다.
복안 장공주가 어이없는 얼굴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내가 왜 이 새벽에 널 불렀는지, 안 물어 봐?”
“이 새벽에 왜 부르셨어요.”
“주씨가 죽었어.”
복안 장공주가 담담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이동은 순간 반응하지 못하고 얼떨떨해졌다.
“네? 누가 죽었다고요? 주씨? 주 귀비요?”
“응. 당연히 주 귀비지. 오늘 저녁에 일어난 일이야. 아들 손에 죽었어.”
“그럼 대왕야와 사왕야는요? 살아있어요? 둘 다 살아 있어요?”
이동이 다급하게 묻는 말에 장공주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봤다.
“당연하지.”
“다 살아 있구나.”
이동은 한마디씩 끊어 말하면서 복안 장공주를 빤히 바라봤다. 기쁘면서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온갖 생각이 다 들고 눈물이 뚝 흘러내렸다.
주 귀비가 죽었다. 그런데 두 황자는 모두 살아 있다. 변했다. 모든 것이 변하려 한다. 모두 바뀌었다. 그럼 장공주의 숙명은……. 이제 장공주의 숙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 바뀌었다!
그 빈 첨대! 이래서 빈 첨대가 나왔구나!
“너, 왜 이래?”
복안 장공주가 몸을 내밀고 이동 앞에 손을 흔들다가 그녀의 눈이 풀린 것 같자 화들짝 놀라서 이동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무슨 생각해!”
이동은 진저리치며 정신을 차리고 장공주를 바라봤다. 웃고 싶은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떨어졌다.
“이것아, 미친 거지?”
복안 장공주는 걱정이 되기 시작해서 일어나 앉아서 이동의 이마를 만지려고 손을 뻗었다. 이동이 몸을 피했다.
“괜찮아요. 기뻐서…… 기뻐서 그런다고 생각하세요.”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네가 왜 기뻐해. 무슨 일이야?”
복안 장공주는 이동이 이상하긴 해도 정신은 멀쩡한 걸 보고 안도하며 유심히 그녀를 살폈다.
뭔가 이상했다. 이 아이가, 감추는 게 있나?
“앞으로 장공주에게 혼인하라고 강요할 사람이 없을 걸 생각하면 기뻐서 그래요. 기쁘지 않겠어요?”
이동은 자기가 지나치게 굴었다는 걸 안다. 다른 사람 앞이라면 아닌 척 감출 수 있겠지만, 장공주 앞에서는 감추지 못하는 건 감추지 못한다.
이동은 얼른 말을 돌렸다.
“너무 놀라서 잠깐 멍해졌네요.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워지겠죠? 주 귀비가 아들 손에 죽었다고 하셨죠? 어떻게 된 일이에요?”
복안 장공주는 이동을 잠시 빤히 보다가 더는 추궁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복안 장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물어야 할 말을 묻는구나. 전에 계 노승상이 내게 역사를 알려줄 때, 전 황조가 타락하고 더럽다고들 하지만, 사실 어느 황조나 똑같다고 했었어. 우리 황조도 어미를 시해한 사건이 이렇게 발생했네.”
“대황자예요? 아니면 사황자예요?”
“사서에는 첫째로 기록되겠지. 하지만 어미를 시해한 건 첫째만 있는 게 아니야.”
복안 장공주는 비단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 다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동을 바라봤다.
“첫째가 학정홍(鶴頂紅: 비상)을 주 귀비의 탕약에 넣었어. 병은 불주금 아래 묻었고. 넷째가 그걸 보고는 독 하나를 더 추가했어. 첫째가 제 손으로 그 탕약을 들고 제 어미에게 가지고 갔지. 태의가 바로 장녕궁 밖에 머물고 있어서 독 하나였다면 어쩌면 살았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두 아들 모두 독을 넣었지.”
복안 장공주가 코웃음 쳤다.
“아들을 이렇게 길러냈으니, 죽어야지 어째. 첫째는 무릎 꿇고 통곡하면서 그 자리에서 인정했어. 넷째는…….”
복안 장공주의 가늘게 뜬 눈에 날카로운 검광이 아른거렸다.
“독을 넣고 혼란스러운 틈에 장녕궁을 벗어났어. 일이 터진 다음에야 태연하게 막 들어온 것처럼 나타났지. 아무런 일 없는 듯이 어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어. 아들의 도리를 하고 싶어도 이제 어미가 없다면서, 첫째를 흉악하고 잔인하다고 욕했지.”
잠시 말을 멈춘 장공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예전에 계 노승상이, 심성을 따지면 넷째가 첫째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정말이었어. 첫째는 그래도 양심이라는 게 조금은 있는데 넷째는 양심이 뭔지 아예 몰라!”
이동은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황상 품에서 죽었으니, 주씨도 소원을 이룬 셈이지. 예전에 황상과 싸우기만 하면 꼭 하던 말이 있었어. 죽어도 황상 품에서 죽을 거라고.”
복안 장공주는 피식 웃고는 또 피식 웃었다.
“주씨가 죽기 전에 황상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어. 첫째를 죽이지 말 것. 자기의 아들,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그래, 제가 낳고 제가 기르고 오냐오냐해서 저렇게 만든 잘난 아들이니, 남 탓할 수가 없지. 심지어 첫째 탓도 하면 안 돼. 평생 옳은 말은 딱 그 말 한마디 했네. 또 하나는 넷째를 태자로 세우라고 했어. 곧바로 세우라고.”
이동은 집중해서 들었다. 주 귀비가 죽기 전에 황상에서 부탁한 두 가지는 그리 의외가 아니었다. 세상에 이런 부모는 얼마든지 있다. 자녀 손에 죽으면서도 법을 어긴 자녀가 잡혀갈까 봐 걱정하는 부모가.
“넷째를 태자로 세운다는 성지가 내일 조회에서 내려올 거야. 독을 추가한 보람이 있네.”
복안 장공주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이동이 대놓고 물었고, 복안 장공주는 뒤로 기댔다.
“일단 기다려 봐야지. 내일 아침 일찍 분명 사람이 오겠지. 주씨는 분명 황후로 추서될 거야. 나도 가서 상을 치르고 울어야겠지.”
복안 장공주가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영씨와 소오도 궁으로 돌아오겠네. 계 천관이 진왕 쪽에 섰고, 묵 승상은 아마 누구 쪽에도 서지 않겠지. 여 승상은 모르겠네. 영원은 분명 오늘 밤에 큰 소리로 세 번 웃고 서둘러 판을 짜겠지. 영씨는……. 난 일단 상황을 봐야지.”
“그럼 저도 준비하고 경성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새해가 지나고 말해야겠네요.”
“그래.”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틀고 등 받침에 기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가에 눈물이 맺힌 듯했다. 이동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넷째도 독을 넣은 일을 영원에게 흘려.”
한참 만에 복안 장공주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이동은 “네.” 하고 한마디 대답하고는 계속 침묵했다.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들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