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74화 (274/463)

274화: 화원을 거닐고 잊다

“자네는 나와 함께 가세.”

백 노부인은 원 어멈에게 분부하고 고개를 돌려 상엽과 도엽에게 분부했다.

“불 끄고, 너희는 쉬어라.”

상엽과 도엽이 두봉을 원 어멈에게 넘겼다. 원 어멈은 백 노부인에게 두봉을 걸쳐주고는 등불도 들지 않고 다가가 백 노부인을 부축해서 상방을 나섰다. 두 사람은 후원으로 둘러 가서 후원을 가로질러 각문으로 나가 회랑을 따라 대나무밭 옆 작은 난각으로 들어갔다.

원 어멈이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고 난각 문을 열었다. 백 노부인이 들어간 다음 자기도 따라 들어가서 문을 닫고 노련하게 옆에 있는 제사상 위 불씨를 찾아서 불을 켜서 촛불을 붙였다.

창과 문이 꼭꼭 닫힌 난각 안엔 제사상 하나와 방석 두 개뿐이었다. 제사상 위에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어린 낭자의 초상화였다. 어린 낭자는 한 손은 뒷짐 지고 다른 손엔 불진(佛塵: 먼지떨이. 총채. 수행자가 마음의 티끌과 번뇌를 털어내는 상징적 의미의 도구)을 들고 찬란하게 웃는 얼굴로 검은 고양이와 하얀 고양이와 장난치고 있었다.

원 어멈은 초상화를 올려다보다가 눈가가 촉촉해지자 눈물을 닦고 앞으로 나가 향 세 개를 집어서 불을 붙이고 백 노부인에게 건넸다.

백 노부인은 초상화 앞 향로에 향을 꽂고 초상화를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듯 중얼거렸다.

“아운아, 그 여인이 죽었다. 친아들 손에, 독약으로 죽었다. 네 말이 맞았다.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언젠가는 비명에 죽을 팔자였다. 보렴. 네 말이 정말로 맞았구나. 이 어미, 드디어 그 모습을 살아서 보았다. 네 대신 보았어. 비명에 가는 것을 내가 보았다. 어미는 그거면 됐다. 그 여인이 비명에 죽었으니, 그도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아운, 이 어미는 아직도 후회한다. 너는 네가 결정한 일이라서 어미와 상관없다고 하지만…….”

백 노부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자. 네가 떠난 게 언제인데. 네가 왕생했다고 큰스님이 그러더구나. 진작 왕생했다고. 하지만 어미는…… 두 사람이 죽는 걸 보지 않고는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 점은 이 어미는 네 아버지만 못하다. 다행히 이 어미가 보았다. 앞으로 어미는 너를 내려놓으마. 편안하게 살아라. 바라는 대로 살아라.”

백 노부인은 몸을 움직여서 제사상에 기대어 초상화 위 여자아이의 치맛자락을 쓰다듬었다. 딸의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원 어멈은 뒤에서 연신 눈물을 훔쳤다.

잠시 후, 백 노부인은 뒤로 물러나서 초상화를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분부했다.

“내일 이 초상을 치우게. 내 방에 있는 큰 장에 두고, 내가 떠날 때 함께 보내주게. 이 난각의 창과 문도 다 열게. 예전처럼 꾸며두고.”

“예.”

원 어멈이 나직이 대답했다.

이 난각은 낭자가 친정에 있을 때 가장 좋아하던 곳이었다. 책을 끌어안고 여기에서 한 번 책을 보면 반나절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었다.

원 어멈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간 백 노부인은 두봉 깃을 여몄다.

“잠이 오지 않는군. 영가아를 불러오게. 화원을 거닐어야겠어.”

원 어멈은 대소야를 모시고 오라고 당직 어멈을 불렀다.

계소영은 매우 빠르게 허둥대며 나타났다. 등불 아래 조모의 모습이 평온해 보이고 눈빛이 맑은 걸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 아버지가 저기 계십니다. 할머니를 뵙겠다고요.”

“만나지 않으련다.”

백 노부인은 일어서서 원 어멈에게 분부했다.

“영가아가 곁에 있으면 되네. 자네가 가서 이 아이 아비에게 전하게. 오늘 밤엔 만나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서 쉬라고 하게. 내일 조회에 많은 일이 벌어질 걸세. 푹 쉬라고 하게.”

원 어멈은 대답하고 돌아갔고 백 노부인은 영문을 모르는 계소영의 모습에 그를 툭 쳤다.

“할미와 함께 화원을 거닐자꾸나.”

“할머니,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계소영은 백 노부인을 부축하며 불안한 듯 물었다.

이 새벽에 할머니는 화원을 거닐겠다고 하고 아버지는 할머니를 만나겠다고 한다. 보통 일이 아니라 큰일이 난 것이다.

“주 귀비가 죽었다.”

백 노부인은 오늘 날씨가 좋다고 말하는 말투로 말했다. 계소영은 넋이 나갔다.

“할머니……. 주 귀비요? 귀비가 왜요? 정말로 죽었습니까?”

“음, 조금 전에 죽었다. 대왕야가 독을 먹였다는구나. 바로 죽었다. 휴. 죄업이다. 죄업.”

백 노부인의 말투는 아까처럼 담담하고 편안했다. 계소영은 놀라서 발을 삐끗했다.

“할머니?”

“다 사실이다. 할미가 잠꼬대하는 것이 아니야.”

백 노부인은 계소영 얼굴 앞에 손을 흔들었다.

“너도 꿈을 꾸는 게 아니고.”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대왕야가 귀비를 독살해요?”

계소영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귀비는 대왕야의 친어미고 대왕야와 사왕야는 귀비의 보물이다. 대왕야가 귀비를 독살해? 너무나 황당한 일이었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황당한 일!

“음. 귀비가 빚 받으러 온 미치광이 둘을 낳고 길렀구나. 그 이야긴 됐다. 여기 좀 보렴. 우리 화원의 경치가 얼마나 좋으냐.”

백 노부인은 경치를 보라고 계소영의 등을 두드렸다.

“네 고모가 집에 있을 때 달빛 아래서 화원을 거니는 걸 그렇게 좋아했다. 운치 넘친다고 말이다.”

백 노부인이 빙그레 웃었다.

“그 어린 것이 이상한 소리만 했지. 네 할아버지는 그 아이 마음속에 풍경이 있어서 그런다고 칭찬했지. 어찌나 오냐오냐하던지.”

할머니가 고모 이야기를 입에 올리자 계소영은 가슴이 시큰해졌다. 그는 얼른 마음을 수습해서 대왕야가 귀비를 독살한 놀랍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지우고 정신을 집중해서 할머니와 함께 화원을 거닐었다.

“저도 우리 화원은 달빛 아래서 거니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너도 그렇다고?”

백 노부인이 웃음 지었다.

“그러니 네 고모가 널 제일 예뻐했지. 넌 그 아이와 가장 닮았다. 고집이 있다.”

“아버지는 얼마 전에 제가 융통성 있다고 칭찬하셨는데요.”

계소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융통성은 융통성이고 고집은 고집이지.”

백 노부인은 느긋하게 호숫가로 걸어갔다. 얼음이 얼어 달빛 아래 환하게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결국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나섰구나.”

“누가요?”

계소영은 백 노부인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말의 의미가……. 너무 무시무시했다.

“저쪽으로 가 보자.”

백 노부인은 호수 중간 정자를 가리켰다. 계소영은 얼른 마음을 수습하고 백 노부인을 부축해서 구곡교에 올라 천천히 호수 안 정자로 다가갔다.

“네 고모가 집에 있을 땐 여름만 되면 이 호수에서 배를 타고 놀았다. 배를 호수 한가운데까지 타고 와서 맨발로 뱃머리에 앉아 있었지. 빠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더니, 물고기가 발을 깨문다고 고함치더구나.”

백 노부인은 그리움 가득한 눈빛으로 호수를 바라봤다. 뱃머리에 앉아서 두 다리를 물 위에 늘어뜨리고 흔들면서 온 화원에 가득하도록 까르륵 웃는 딸의 모습이 보이는 듯이.

계소영은 백 노부인 곁에 나란히 붙어서 할머니의 회상을 말없이 들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근래 할머니는 고모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얼굴 탄다고 했더니, 연잎을 꺾어서 머리에 받치고는 연꽃 선녀 같지 않으냐고 물었지. 얼마나 장난꾸러기였는지.”

백 노부인은 딸이 연꽃 선녀 같지 않은지 잘 보려는 듯이 난간을 붙잡고 몸을 내밀었다.

“할머니.”

“가자. 춥다.”

계소영이 나직이 부르자 백 노부인이 손을 거두고 두봉을 여몄다.

“우리 화원은 곳곳의 경치가 아름답단다. 가자. 우리 대나무숲으로 가서 죽순이 있는지 보자꾸나.”

계소영은 백 노부인을 부축하고 다른 쪽 뭍으로 가서 모퉁이를 돌아 공들여 꾸며 놓은 자죽림(紫竹林)으로 들어갔다.

“네 고모가 어릴 때, 모든 대나무에서 죽순이 나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지. 그랬더니 죽순을 찾겠다고 여기에 왔단다.”

백 노부인이 하하 웃었다.

“바보 같은 녀석. 네가 어릴 때도 왔었다. 이만한 죽순을 캐서는 꼭 먹겠다고 부엌에 가지고 가서 볶아달라고 졸랐지.”

“맞아요. 기름에 볶아 주었어요. 지금도 그 죽순 맛이 기억납니다. 참 맛있었습니다.”

“그래, 넌 지금까지 기름에 볶은 죽순을 좋아하지. 하지만 그때 네가 먹은 건 네가 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네 아비가 네게 거짓말을 했다고 부엌 일꾼들을 혼냈다. 네 고모가 그때 굳이 자기가 볶겠다고 하다가 부엌을 태워 먹을 뻔했단다. 휴. 네 고모는 바느질이니 음식이니,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사내아이처럼 다녔거든. 네 할아버지가 너무 오냐오냐했지.”

“할아버님은 저도 애지중지하셨어요. 아직도 기억합니다. 어릴 때 잘못을 저지르면 곧바로 할아버님을 찾아갔어요.”

조부를 떠올린 계소영은 포근하면서도 씁쓸해졌다. 할아버님이 아직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매화림에 가 보자. 매화 향이 매우 짙단다. ‘암향부동월황혼(暗香浮動月黃昏), 은은한 향기가 황혼 무렵 달빛 아래 일렁인다.’라. 지금이 바로 그 시기다. 하지만 우리 숲의 매화는 향이 짙어서 은은한 향이라고 할 수 없지.”

(※북송 시인 임포林逋, ‘산원소매山園小梅’)

“저 앞이 바로 매화림입니다.”

계소영은 백 노부인을 부축하고 매화림 방향으로 걸었다.

“가까워서 그럴 겁니다. 우리 매화림이 꽤 넓으니까 향이 진할 수밖에요. 멀리서 맡으면 은은할 겁니다.”

“네 고모는 매화 향을 제일 좋아했다. 어릴 때 참 장난꾸러기였는데, 한 번은 팔을 휘두르며 매화림을 빙글빙글 돌길래 뭐 하는 것인지 물었더니, 향이 배게 하려고 그러는 거라더구나. 향이 진하니까 그 안에서 빙빙 돌면 몸과 옷에 향이 묻을 거라고.”

백 노부인은 매화림 가에 서서 웃다가, 웃다가 눈물을 철철 흘렸다.

“할머니, 춥습니다. 한참 돌았으니 이제 돌아가서 좀 쉬다가 다시 거닐어요.”

계소영은 눈물을 흘리는 백 노부인의 모습에 씁쓸한 마음을 누르며 설득했다. 이렇게 감정이 동요할 때 계속 거닐다가 한기라도 들었다간 큰 병이 날 것이다.

“그래. 돌아가자.”

백 노부인은 힘이 빠진 듯이 손자의 어깨에 기대서 천천히 돌아갔다.

계소영은 백 노부인을 가장 가까운 난각으로 모시고 들어가서 난로, 홍니로, 주전자와 샘물을 가지고 오라고 분부했다. 사람들이 물건을 가지고 오자 모두를 물리고 직접 물을 끓이고 차를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 난각은 봄처럼 따듯해졌다. 백 노부인은 창문을 반쯤 열어젖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울처럼 밝게 빛나는 호수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며칠 전에 대왕야부의 측비 손씨가 바로 저런 호수에서 익사했다. 가련하지. 곽씨는 버텨내려는지. 어제 할미가 사람을 보내 문안 올렸는데 고열이 내렸다가 다시 올랐다가 한다더구나. 휴. 곽씨도 가련하지.”

“할머니, 황상이 대왕야를 죽일까요?”

계소영은 조모가 곽씨를 입에 올리자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생각하기엔?”

백 노부인이 되묻자 계소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아마도요.”

백 노부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황상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귀비는 황상이 그녀의 아들을 죽이도록 두지 않을 것이야. 황상은…….”

백 노부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당시 네 할아버지와 나 모두 황상은 황상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평범한 집안의 지아비, 아비처럼 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나와 네 할아버지 모두 틀렸다. 황상은 평범한 집안의 지아비와 아비였다. 그러니, 대왕야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며느리가 죽었는데 아들까지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계소영은 경악했다.

“할머니, 아버지께서 일을, 알고 계시지요?”

잠시 침묵하던 계소영은 백 노부인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올려다보며 나직이 물었다. 백 노부인은 손자의 귓가를 쓸어넘겨 주었다.

“안다. 네 아비는 네 아비, 너는 너, 나는 나다. 그 아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을 나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라. 네 아비 역시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집안이 단출하지만, 우리 집안은, 다 별개다.”

계소영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할머니.”

“피곤하구나. 차는 됐다. 가마를 내오라고 해라.”

정말로 피곤해 보이는 백 노부인의 모습에 계소영은 후다닥 일어서서 분부하러 나갔다. 돌아와 보니, 백 노부인은 잠이 든 듯이 턱을 괴고 눈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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