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무적의 용기
진 부인은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고 강완과 강녕은 병풍 뒤에 숨어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분위기를 살폈다. 봉운을 비롯한 시녀들은 더더욱 눈꺼풀 하나 까닥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곡 대내내처럼 칼을 들고 휘두르고, 한 시진 넘게 목도 쉬지 않고 겹치지 않는 욕을 내뱉는 문무 출중한 진짜 사나운 여인네 앞에서 수녕백부 위아래는 참패 두 글자밖에 없었다.
곡 대내내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고, 그 마을에서 가장 고귀한 집안이 바로 곡가였다. 평생 처음으로 출타한 걸음에 곧바로 경성으로 와 혼인했다. 지금까지 뭘 보고 배웠을지 상상할 수 있지 않나.
체면에 대해서도 그녀 나름의 견해가 있다. 혼인해 강가에 들어오기 전이라면 강가 사람 앞에 체면이 필요했겠지만, 지금은 이미 혼인해서 들어왔다. 게다가 성지를 들고 들어왔다. 체면? 강가 사람 앞에선 필요 없어졌다. 그리고 남 앞에서는……. 작은 수녕백부는 문을 닫으면 식구라고는 이게 다인데 만날 남이 어디에 있나.
곡 대내내가 혼인한 이래 유일하게 고려하는 것이 어떻게 이 일가를 무릎 꿇려야 하느냐였다. 수단을 불문하고 그저 무릎 꿇리면 그만이었다. 염치가 없으면 천하무적이라고, 곡 대내내는 적어도 수녕백부에서는 적이 없었다.
곡 대내내에게 또 참패한 진 부인은 곡 대내내가 돌아간 다음 곡씨의 말이 옳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두 노비가 낳은 자식은 제 젖으로 기르면 된다. 밖에서 구해온 유모보다 제 젖으로 기르는 게 더 좋다. 최선을 다할 것 아닌가.
하지만 이런 집안에 그런 법은 없다!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결국 결정은 아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아들에게 말한 것이다.
강환장은 얼굴이 다 시퍼레졌다.
전생에 고씨가 회임했을 때, 그의 첫 아이라서 회임한 순간부터 사흘돌이로 의원을 불러 진맥했다. 출산하기 한 달 전엔 저택에 의원 하나 산파 둘을 모셔서 대기했다. 유모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서른 명은 골랐다. 고씨는 항상 격식을 따지니까.
고씨가…….
강환장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언제나 소박하게 사릉을 입고 선녀처럼 우아하고 수줍어하던 기억 속 고씨가 지금 고씨와 겹쳐서 나타났다. 두터운 남색 솜옷에 솜바지를 입은, 잿빛 먼지에 구른 둥그런 새알 같은 고씨가 예전의 그 고씨를 밀어냈다. 가끔은 두 고씨가 간절한 눈빛으로 함께 그를 바라보기도 했다.
“대가아!”
강환장이 새파래진 얼굴로 넋이 나간 걸 본 진 부인이 저도 모르게 고함치자, 강환장도 정신을 차렸다.
“내 생각엔, 유모를 부르지 않아도 그만이다. 제 젖으로 아이를 기르면 은자를 아끼는 건 물론이고 유모보다 더 마음 쓰지 않겠느냐.”
진 부인은 자기 의견을 드러냈다. 유모를 부르려면 알아서 돈을 내라는 곡 대내내의 말을 생각하면 할수록 겁이 났다. 부르지 말자.
은자를 아낀다라……. 강환장의 가슴을 누군가 쥐어뜯는 것처럼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머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적서를 막론하고 장자입니다. 우리 같은 집안에서 유모를 부를 돈도 내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 정도는 아닙니다.”
강환장의 말이 조금 어수선했다.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진 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긴 하지만, 네 처가 돈이 없다지 않으냐. 나더러 돈을 내라는데, 내가 돈이 어디에 있느냐. 부르려거든 네가 돈을 마련해 주어라. 그래야 네 처가 내게 와서 난리를 부리지 않지. 난 몸이 나날이 안 좋다. 네 누이들이 먹던 제비집은 진작 끊었는데 내가 먹는 제비집도 나날이 질이 떨어진다.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며칠 전에 의원이 내 몸이 허하다고 독삼탕을 먹으라던데, 그럴 돈이 어디에 있느냐? 네가 네 집안을 꾸리고 자립했으니 은자 문제도 신경 써야지.”
“알겠습니다!”
강환장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진 부인의 잔소리를 무지르고 일어서서 돌아섰다.
정원을 나선 강환장은 뜨락 문 앞에 서서 갈수록 퇴락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아픔이 조금씩 퍼져나가자, 강환장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시선을 거두고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여인의 말이 맞다. 지금은 현재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 더는 예전 생각을 해선 안 된다.
단숨에 중문까지 걸어간 강환장은 중문 앞에 멍하니 멈춰 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은자를 어디서 구하나. 두 번의 인생, 몇십 년 살면서 은자 걱정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을. 그의 기억 속에 은자의 존재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필요하면 언제든 가져다 쓸 수 있었고.
지금은 어디에서 은자를 구한다?
강환장은 다리가 시릴 정도로 멍하니 서 있다가 그제야 중문 밖으로 나갔다. 어멈을 시켜 독산을 불러다가 말을 끌고 와서 계가로 향했다.
지금 은자를 융통해줄 수 있고, 또 그런 일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상대는 계 천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대황자는 저녁이 되어서야 관아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저택으로 돌아가더니, 이내 목욕, 환복하고는 궁으로 달려가 장녕궁으로 향했다.
대황자와 사황자는 언제든 장녕궁을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며, 기별도, 허락도 필요 없었다.
화항에 누워 두 아들 생각에 눈물을 뚝뚝 흘리던 주 귀비는 대황자가 들어오는 걸 보고 얼른 일어나서 앉으며 반가운 얼굴로 손짓했다.
“어서 와서 앉아라. 밖이 춥진 않으냐? 옷을 왜 이리 얇게 입었어. 두봉은 어쩌고. 손난로는 왜 들지 않았어. 점심은 어디에서 먹었느냐? 잘 먹었고? 안색이 좋지 않구나. 추워서 그런 것이냐? 어디 보게 가까이 오려무나.”
대황자는 평소와 달리 지극히 순종하며 다가가 앉아서 다정한 주 귀비의 물음에 일일이 대꾸했다.
“춥지 않습니다. 털 두봉을 입고 와서 밖에 벗어 두었습니다. 점심도 잘 먹었고요. 모비,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주 귀비는 갑자기 다섯 살 꼬마 때처럼 착하게 구는 대황자를 보고 웬일이냐 싶으면서도 의외로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착한 아이 같으니. 네가 착한 아이라는 걸 이 어미는 안다. 전에 궁에 있을 땐 얼마나 좋았느냐. 나가자마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널 부추겼는지 내가 안다. 안 그러면 네가 그렇게 변했겠느냐. 안색은 왜 이리 나쁘냐. 여봐라. 탕을 가지고 와서 대왕야에게 올려라. 저택에 성심을 다해 시중드는 사람이 없느냐? 조씨는 꽤 괜찮은 아이였는데, 안타깝게도 죽었지. 곽씨는……. 그러지 말고 이 어미가 다 나으면 좋은 아이로 골라주마.”
주 귀비가 조씨를 입에 올리자 대황자의 눈가가 실룩였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가 잠시 후 다시 주 귀비를 돌아보며 고분고분 대답했다.
“모비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렇지. 이렇게 착한 아이지. 나는 안다.”
대황자가 예전처럼 철든 걸 본 주 귀비는 매우 기뻐했다.
“제가 어깨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대황자는 자리를 옮겨서 주 귀비 어깨를 주물러 주었고, 주 귀비는 얼떨떨해하다가 감격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착한 내 아들.”
대황자는 주 귀비 뒤에서 눈을 내리깔고 세심하고 열심히 주 귀비의 어깨를 주물렀다. 이번에 주물러주면 다시는 다음이 없는 것처럼.
대황자가 입궁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서강은 서둘러 사람을 보내 사황자에게 얼른 장녕궁에 가보라고 알렸다. 결정적 순간에 대황자가 주 귀비와 황상 앞에서 꼼수를 부리면 어떡하나.
사황자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서다가 다시 허둥지둥 돌아왔다. 그리고는 시녀가 들고 있는 갈아입은 옷을 당겨서 염낭을 찾아내고는 작은 도자기 병을 품에 단단히 챙겨 넣고 다시 나가서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장녕궁, 대황자는 주 귀비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두어 살 때처럼 고분고분 주 귀비의 물음에 대답했다. 주 귀비가 뭐라고 하든지 주 귀비가 바라는 대로 대답했다.
주 귀비는 속이 아주 편안해졌다. 모친의 말이 맞았다. 아이는 열몇, 스물 때 말을 안 듣고 지나면 괜찮다더니, 역시 그랬다. 그때를 잘 넘긴 것이다.
“모비, 어제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 말로 모비 화를 돋우다니. 그리고 전에도 모두 제 잘못입니다. 어찌 됐든 절 낳아주신 분인데. 모비,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대황자는 자기에게 말하듯이 매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도 참. 철이 들려니 이렇게 드는구나!”
주 귀비는 다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돌아봤다. 애틋해서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눈빛이었다.
“모비, 약 드셔야지요. 제가 약 달여오겠습니다.”
대황자는 주 귀비의 시선을 피하고 일어섰다.
“약을 네가 왜 달여. 약 냄새도 싫어하면서.”
“모비, 제 마음입니다.”
대황자가 고집을 부리자 주 귀비가 웃어 보였다.
“그래, 그래. 이 아이도 참. 여봐라. 약 달이러 대가아를 모시고 가라. 이 아이도 참. 효도한다고 곧바로 이렇게……. 효도라는 게……. 아들아, 넌 멀리서 보기만 하면 된다.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아라. 약 냄새가 거슬릴라. 그리고 눈 맵다. 연기 조심해라.”
대황자가 시녀를 따라 밖으로 나간 후에도 주 귀비는 뒤에서 계속 당부했다.
시녀를 따라 나간 대황자는 다과방 옆에 특별히 비워낸 약 달일 작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궁은 법도가 엄격해서, 윗전의 약은 모두 두 사람의 손을 동시에 거쳐야 한다. 그리고 누가 손을 쓰지 못하도록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봐야 한다.
대황자가 탕약방으로 들어갔을 때, 약 담당 시녀 둘이 다급하게 난로를 피우고 규칙대로 약재를 꺼내 약탕기에 넣고 물을 넣었다. 그 옆엔 내시 하나, 나이가 좀 있고 직책 있는 시녀 하나가 눈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귀비가 약 먹을 시간이 아직 아니었다. 그러나 대황자가 효도한다고 하고 주 귀비의 명령도 있어서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물며 주 귀비의 약은 안정시키고 기를 다스리는 약이라 귀비의 뜻을 따르는 게 중요하지, 시각은 조금 이르든 늦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대황자는 탕약방 문 앞에 서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두 시녀, 엄숙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는 내시, 굳은 얼굴로 눈도 떼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시녀를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봤다.
이들을 모두 쫓아내야만 했다.
“됐다. 모두 나가라. 내가 달이마.”
두 시녀가 약탕기를 홍니로에 올리는 걸 보고, 대황자가 안으로 발을 들이더니 두 시녀에게 냉랭하게 분부했다.
두 시녀는 멈칫하고 얼른 나이 든 시녀를 바라봤다. 윗전들이 손수 약을 달인다는 건 보통 문 앞에 서서 조금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문 앞에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기만 해도 큰 효도인데, 대왕야는 왜 이러시는 걸까.
“못 들었느냐? 귀가 먹었어?”
대황자와 사황자는 장녕궁의 절대 권력이었다. 때론 주 귀비의 말보다 더 잘 먹혔다. 두 시녀가 멍하니 움직이지 않자 대황자의 얼굴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대왕야, 이 안은 더럽고 먼지도 많습니다. 눈 깜짝하는 새에도 큰 사고가 납니다. 게다가 마마께서 분부를…….”
시녀 하나가 설명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나가라! 내 직접 어머니께 약을 달여드릴 것이다!”
두 시녀는 당황한 얼굴로 다시 나이 든 시녀를 바라봤다. 나이 든 시녀가 눈을 내리깔자 두 시녀는 얼른 공손하게 물러났다.
“바로 밖에 있겠습니다. 대왕야 화로 곁엔 가지 마세요. 혹시라도…….”
“꺼져라!”
대황자는 주절주절 잔소리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 하물며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두 시녀는 한마디도 더 하지 못하고 탕약방에서 나가서 나란히 서서 수시로 화롯불, 약탕기, 그리고 곁에 서 있는 대황자를 살폈다.
“너희들도 나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