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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270화 (270/463)

270화: 심각하게 딴 길로 새다

조회가 끝난 후, 진왕은 평소처럼 곁눈으로 대황자와 사황자를 살피면서 최대한 두 사람과 거리를 두고 슬금슬금 선덕문 밖으로 나갔다.

계 천관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런 진왕을 흘끔 살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선덕문 밖으로 나간 계 천관은 얼른 진왕을 따라잡아 등을 살짝 두드렸다. 진왕이 화들짝 놀라 파르르 떨며 뒤돌다가 계 천관인 걸 보고 안도했다.

“계 천관이었군요.”

“예, 접니다. 왕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계 천관은 가자고 진왕에게 손짓하고 나란히 걸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왕야, 귀비 마마가 병이 났습니다. 입궁하여 문병을…….”

진왕이 살짝 진저리치며 입을 열려고 하자 계 천관이 먼저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하라는 듯이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귀비는 성격이 남다른 분이니 왕야가 정말로 입궁하여 문안 올리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닙니다.”

진왕이 안심하는 모습에 계 천관은 참지 못하고 그를 힐끔 봤다. 이렇게 벌벌 떨어서야, 원.

“가지 않자니 불효고, 가자니 귀비의 기분을 거스릅니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마침 왕야는 지금 궁내 명절 일을 맡고 계시니, 섣달그믐날 밤에 대나희를 어떻게 할 것인지 황상에게 직접 보고하고 윤허를 받아야 합니다. 황상의 윤허를 얻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진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명절 준비 중에 그가 직접 나서야 하는 몇 가지 안 되는 일 중에 하나임을 예부에서도 이야기했었다.

“황상은 저녁 어선을 반드시 장녕궁에서 드십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에 가세요. 어선 후에 알현을 청하시고 대나희 문제로 급한 일이라 바로 황상께 보고드려야 한다고만 하세요. 황상께서 분명 장녕궁에서 왕야를 만나실 겁니다. 그럼 왕야는 대나희 일을 보고하고 그 김에 자연스럽게 귀비께 문안 올리세요. 병세는 어떤지 몇 마디만 여쭈면 이번 일은 자연스럽게 넘어갑니다.”

계 천관은 그보다 더 상세할 수 없을 만큼 상세히 당부했고 진왕은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녕궁에 가는 게 제일 두려웠다. 장녕궁에 갈 때마다 좋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병문안은 계 천관의 말대로 가지 않으면 불효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니 이렇게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왕야, 명심하세요. 황상과 귀비가 같이 계시면, 대나희 이야기를 보고할 때, 반드시 명심하세요, 우선 귀비 마마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황상은 그다음입니다!”

계 천관이 이어서 당부하는 말에 진왕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응?”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대나희는 귀비도 보십니다. 귀비가 마음에 들어서 좋다고 칭찬하면 황상도 분명 기뻐하며 좋다고 칭찬하시겠지요. 황상이 칭찬하면 나머지는 좋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왕야의 임무는 귀비의 칭찬 하나만 얻으면 원만하고 좋게 끝납니다. 명심하세요. 일단 귀비가 기뻐해야 합니다.”

진왕은 목이 바짝 탔다. 귀비를 즐겁게 하다니. 그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귀비는 자신의 얼굴만 봐도 언짢아하는걸.

“명심하세요. 귀비께 먼저 고해야 합니다. 황상은 그다음입니다.”

계 천관은 다시 당부하고는 어느새 밖에서 기다리는 진왕부 사환까지 도착한 걸 보고는 공수하고 물러갔다.

진왕은 말에 올라 근심 가득한 채 진왕부로 돌아갔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강환장이 언제나 그랬듯이 마중 나왔다. 진왕의 근심 가득한 모습에 강환장은 곧바로 계 천관을 떠올리고는 서둘러 뒤따르며 물었다.

“왕야. 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없었다.”

진왕이 묵묵히 대답하자 강환장이 성큼 다가가 진왕의 안색을 살폈다.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없었다. 무슨 일이 있겠느냐. 귀비가 병들었으니 저녁에 입궁해 문안 올리라고 계 천관이 그러더구나.”

“왕야, 하관, 솔직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역정 내지 마십시오. 대왕야와 사왕야가 귀비 마마를 문병하면 효심이겠지요. 왕야께서 가시면 귀비 마마는 분명 웃음거리 보러왔다고, 속 터지게 하려고 왔다고 여길 겁니다. 왕야, 그동안 귀비 마마가 편찮으신 게 한두 번입니까? 그럴 때마다 문안 가셨습니까?”

강환장은 매우 가차 없이 말했다. 계 천관의 오지랖에 정말로 짜증이 났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진왕은 강환장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하면서 잠시 주저하다가 계 천관이 한 말을 전했다.

“어차피 그믐날 대나희 일을 보고해야 하니, 차라리 오늘 밤에 뵙길 청하라고 하더구나. 황상은 저녁을 장녕궁에서 드시니 마침 대나희 일을 보고하면서 그 김에 문안을 올리라고 말이다.”

강환장은 더욱 반대했다.

“귀비가 편찮은데 황상께서 대나희 이야기를 들을 심정이시겠습니까? 대나희는 틀에 박힌 행사입니다. 해마다 변한 적이 있습니까? 황상께 직접 보고하는 것도 해마다 변함없는 낡은 규칙입니다. 관례대로 하는 것일 뿐이지요. 왕야가 굳이 귀비 마마가 편찮으신 날을 골라 이런 관례 행사를 여쭈면, 왕야가 보기에, 황상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귀비 마마는 기뻐하시겠습니까?”

“음,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말이 더 마음에 든 진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강환장의 말은 꽤 일리 있었고, 그 이치는 마침 진왕의 생각과 똑같았다. 진왕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첫 번째가 장녕궁에 가는 것이요, 두 번째가 황상을 만나는 일이었다. 두려운 일이 두 가지 겹치니 오는 내내 벌써 천만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그런 때에 강환장의 이 말은 일리 있는 정도가 아니라 진리였다.

“왕야도 아시다시피, 대왕야와 사왕야가 요즘 심하게 다투고 있습니다. 대왕야 측비는 장녕궁에서 죽었고요. 대왕야와 사왕야가 어떻게 싸웠는지, 두 왕야의 얼굴을 분명 보셨지요? 그런 일이 장녕궁에서 벌어졌습니다. 요 며칠 두 왕야는 어떻게든 장녕궁에 들러 황상과 귀비 마마의 환심을 사려고 애쓸 겁니다. 왕야가 갔다가 대왕야와 딱 마주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사왕야를요. 아니면 두 사람 모두를요. 무슨 일이라도 정말 터지면, 왕야는 새우 등 터지지 않겠습니까.”

강환장은 한 걸음 더 바짝 다가갔다. 정말로 초조했다. 진왕은 진짜로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가만히 제 안위만 지키면 된다. 그러면 순조롭고 평탄하게 태자가 되고 즉위하여 황상이 된다. 그것 말고 다른 모든 일은 사족이다. 괜히 일을 망치고 화를 자초한다.

강환장의 그 말에 진왕은 질겁했다. 대황자를 거론한데다가 싸움이라는 말까지 하니 진왕은 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채찍에 맞은 아픔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은걸!

“소화, 자네 말이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천관은 호의로 하는 말이라 대놓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하지도 않았지. 내 생각도 소화와 같다. 대나희는 몇십 년 동안 이어진 일이니 급하지 않아. 귀비의 병도 심한 것도 아니니, 일단 몸이 나으면 다시 이야기하자.”

강환장은 진왕의 말에 내심 안도했다.

계 천관, 쓸데없는 일을 잘도 보태는군.

조회에 나간 대황자는 마음이 조금 붕 떴다. 사황자가 대놓고 질타해도 듣지 못한 듯이 계속해서 어제 만난 신선을 떠올렸다. 그 신선이 한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 보았다. 생각할수록 확고해졌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망설이니 신령이 현신해 가르침 준 것인지도 모른다. 신선이 몇 번이고 자신을 진룡이라고 했다. 진룡에게 어려움이 있으니 신령이 현신한 것이지.

더는 망설이면 안 된다. 하늘이 주는 걸 받지 않으면 오히려 화가 닥친다. 때가 됐는데 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화를 부른다!

조회가 끝난 후, 대황자는 태의원으로 직행해서 주 귀비의 병세와 진맥 상태를 꼬치꼬치 물었다. 처방도 받아서 확인하고 심지어 주 귀비의 약 찌꺼기까지 살펴보았다.

태의원에서 나온 대황자는 관아로 직행해서 관아를 맴돌다가 옷을 갈아입고 어딜 가는지 두 심복을 데리고 각문으로 나갔다.

수녕백부로 돌아간 강환장은 정원으로 직행했다.

그는 요즘 거의 매일 정원에서 진 부인, 그리고 강완, 강녕과 함께 식사했다. 정원에서 밥을 먹지 않으면 곡씨와 함께 먹어야 하니까.

곡 대내내의 관리하에, 요즘 수녕백부는 주인이 밥 먹는 곳은 단 두 곳, 진 부인의 정원과 곡 대내내, 즉 강환장의 곡란원뿐이었다.

곡 대내내는 우선 가족은 함께 밥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흥하는 명문가는 다 그렇게 한다고. 또 하나, 저택에 돈이 없어서 여기저기 식탁을 펼치는 건 낭비라고, 그럴 여유가 없다고 했다.

강환장이 참은 건 바로 두 번째, 저택에 돈이 없다는 항목 때문이었다. 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 부인의 정원과 곡씨의 곡란원을 저울질한 끝에 강환장은 거의 매일 진 부인의 정원에서 식사했다.

막 식사를 마치고 차가 올라오기 전에 봉운이 강완을 살짝 흔들었다. 강완이 강녕에게 눈치 주자 강녕은 강환장을 바라보며 목을 움츠렸다. 강완이 다시 강녕을 흔들자 강녕이 앞으로 다가가서 진 부인을 흔들었다.

“어머니, 어머니가 오라버니에게 말하세요.”

“아.”

그제야 떠오른 진 부인은 조금 난감한 듯 강환장을 바라봤다.

“대가아, 사소한 일이라서 네게 이야기할 거리가 아니다만, 그게…… 역시 네가 결정하는 게 좋겠다.”

강환장이 진 부인을 바라봤다.

“고씨와 청서 모두 곧 몸을 풀 때가 되어서, 며칠 전에 네 처에게 산파와 유모는 다 정했는지 물었다. 네 처 말이 산파는 정했고 날 때 되면 부르면 된다더구나. 유모는…….”

진 부인은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 처 말이 노비가 아이를 낳는데, 유모가 왜 필요하냐고 하더라. 아이를 낳으면 제가 어미고 고씨와 청서가 유모라고. 자기 젖으로 자기 새끼를 먹이는 게 밖에서 유모를 고르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구나.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진 부인은 자초지종을 반밖에 이야기하지 않았다.

청서와 고씨는 배가 점점 불러오고 곧 아이를 낳을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의원을 불러 사흘돌이로 진맥해야 하는 건 아닌지 싶었다. 그리고 산파와 유모도 결정할 때가 되었고. 이러다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유모가 없으면 그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서가 여러 다리 건너서 사람을 보내 대내내의 의중을 물었더니 곡 대내내는 딱 한마디 ‘그때 되어서 이야기하자.’고만 했다.

다급해진 청서는 봉운을 찾아갔고, 봉운이 기회를 보고 진 부인에게 이야기했다. 강가 자손과 관계된 일이니 진 부인도 눈 딱 감고 곡 대내내를 불러 의원, 산파, 유모 일을 물었다.

곡 대내내는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게 병도 아니고, 게다가 노비 둘이 아이를 낳는데 무슨 의원을 부르냐고 딱 잘랐다. 성에 산파는 널렸으니 태동이 오면 그때 불러도 늦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유모는, 유모가 왜 필요하냐고 했다. 본인 젖이 없냐고. 혹시 젖이 나오지 않으면 양 한 마리 사서 양젖을 먹이면 된다고 했다.

진 부인은 기함하고 뒤로 넘어갔다. 이런 가문에서 아이를 낳는데 유모 한둘 없이 넘어간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곡 대내내는 울고 욕하는 진 부인을 담담하게 대하며 딱 한마디 했다. 돈이 없다고.

의원이든 유모든 불러도 되는데 돈은 알아서 내라고 했다. 그럴 돈이 있다면 저택에서 나가야 할 돈도 잔뜩 있는데 하나같이 의원, 유모보다 중요한 일이니 그것까지 같이 달라고 했다.

그 돈을 내라는 곡 대내내의 말에 진 부인은 온몸의 솜털을 세우며 경계했다. 울음도 딱 그치고 곡 대내내를 노려보며 호통쳤다.

‘네가 안주인이다! 안주인인 네 지참금은 어째서 쓰지 않는 것이냐? 예전에 이씨가 안살림을 맡았을 때 은자는 다 이씨 지참금에서 나왔다!’

곡 대내내가 어디 호락호락한 사람인가. 허리춤에 손을 짚고 한 손으로 진 부인을 손가락질하면서 펄쩍펄쩍 뛰었다.

‘며느리 돈을 쓰는 게 강가 법도로군요! 그런 법도가 있다면, 어머니 혼수를 꺼내서 쓰세요. 나만 강가 며느리고, 어머니는 강가 며느리가 아닌가요? 두 노비의 아들 모두 어머니 손자, 어머니 아들의 자식인데, 어머니가 내지 않는 돈을 왜 내가 냅니까? 두 아이가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내 눈에 그 두 아이는 다 잡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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