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69화 (269/463)

269화: 귀신놀이

복안 장공주가 이동을 흘겨보았다.

“장공주와 관련 있는 일인가요?”

이동이 물었지만 복안 장공주는 이동의 물음에 직접 대답하지 않았다.

“주씨가 가장 어리석은 점이 바로 이거야. 처지를 바꿔 다른 사람 생각을 해줘야 할 때는 절대로 그러지 않고, 그러지 말아야 할 때는 또 그렇게 하지.

예를 들어 첫째와 넷째 저택의 처첩 문제. 황자가 왕으로 봉해져서 정비와 측비를 들일 때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직접 골랐어. 그리고는 두 측비를 예전의 자기에 대입해서 생각했어. 무수한 서러움을 겪던 그때의 자기 말이야. 정비가 측비를 괴롭히고 못살게 군다고 상상하면서 두 측비를 전력 지지했지.”

이동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얼마나 어리석어야 이런 짓을 할까?

“자기는 며느리가 넷이라고 자주 이야기했지.”

복안 장공주가 네 손가락을 세워서 흔들었다.

“이렇게 어리석은 건 처음 보지? 처첩은 안 그래도 물과 기름 같은 사이인데, 주 귀비가 이렇게 난리를 부리니 두 황자부엔 정비와 측비가 지위가 동등했어. 얼마나 격렬하게 쟁투했을지, 상상 가지?”

“네.”

이런 상황이 가장 무섭다고 전에 전 노부인이 말했었다. 예법, 기강이 모두 흐트러지고 처첩이 구분 없고 적서가 불분명한 이런 집안은 마지막엔 결국 패가망신한다. 예외는 단 하나도 없다.

“넷째 저택에 측비 손씨가 먼저 회임해서 지금 4개월이야. 납팔일에 넷째 정비 정씨와 첫째 정비 곽씨 모두 장녕궁 문 앞에서 꽃병의 물을 쏟았고, 손씨가 장녕궁 문 앞에서 미끄러져서 넘어졌어. 내가 한 일은 이것뿐이야.”

복안 장공주는 나른하게 차를 마셨다.

“이미 연기를 뿜으며 끓던 기름 솥이야. 불쏘시개만 넣으면,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흘러가.”

이동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기를 맞춰 불쏘시개를 넣는 일, 그녀도 예전에 많이 했었다. 시기만 잘 맞춰서 제대로 된 곳에 불을 지르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넷째 저택에서 문제가 생길 줄 알았거든. 어찌 됐든 손씨 배 속에 아이를 거슬러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손씨는 주씨가 고른 네 며느리 중에 유일하게 친정이 경성에 있는 집안이고. 친정에서 도와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이야.”

복안 장공주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곽씨가 정말 달리 보여. 수선화를 골라서 돌아오면서 구곡교로 가자고 조씨를 꾀어내서 호수에 던졌어. 그 기세라니……. 쯧쯧.”

복안 장공주가 혀를 내둘렀다.

“조씨가 거의 익사하기 직전이고 구하러 온 사람이 나타나니까 자기도 풍덩 빠졌어. 정말 보기 드물게 모질어. 조씨에게도 모질고, 자기에게도 모진 짓이야.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다시 살아났잖아. 곽씨 시녀도 참 대단해. 그 주인에 그 종복이라더니. 평소에 조용한 사람들은 역시 만만하지 않아. 너도 그렇고.”

“직접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건 저는 못 해요.”

“군자는 부엌을 멀리한다 이거지? 군자는 함부로 살생하지 않는다고?”

복안 장공주가 또 한마디 하자 이동이 슬쩍 흘겨보면서 상대하지 않았다.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목숨이 오가면 너도 할 수 있어. 곽씨가 사람을 죽인 건, 내 생각엔 진작 그럴 생각을 품었다가 마침 시기가 좋으니까 손을 쓴 거야. 모질기는 참 모진데, 어리석기도 하지. 하지만 이 혼란 속에 어쩌면 곽씨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거란 생각이 자꾸 드네. 마지막까지 살아남기만 하면 견딘 보람이 있는 거지.”

복안 장공주는 다리를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곽씨에 대한 인상이 괜찮은 편인 듯했다.

“조씨가 없어져도 전씨, 손씨, 이씨, 얼마든지 새로 생겨요. 그럼 또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텐데요. 끝이 어디 있나요.”

이동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씨가 저택에 다시 들어오든, 첫째, 그 아이가 이미 자리 잡았고, 둘째, 살인이라는 게 처음이 힘들어서 그렇지 한 번 하고 나면 두 번째는 쉬워. 둘, 셋 죽일수록 손에 익겠지. 마음에 안 들면 죽여 버리면 되잖아?”

복안 장공주의 지극히 무책임한 말에 이동은 눈을 흘기고 상대하지 않았다. 복안 장공주가 한참 만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곽씨는 아직 누워있어. 큰 병이 들었어. 장녕궁에 들려갔을 때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바닥에 버려졌거든. 2각 가까이 흐른 후에야 화항으로 옮겨져서 옷을 갈아입었대. 장녕전 바닥에 불을 지펴두지 않았으면 분명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2각이요? 장녕궁 사람들은 뭘 하고요? 시중드는 사람이 없었대요?”

“흥.”

이동이 경악해서 묻는 말에 복안 장공주는 싸늘하게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황자는 지금까지 왕부에 돌아가지 않았어. 곽씨가 흠뻑 젖어서 장녕전에 실려 들어갔을 때 주씨가 너는 왜 안 죽었냐고 욕했단다.”

“주 귀비가 곽씨가 한 거라는 걸 알고…….”

이동의 첫 반응이었다.

“그걸 알 정도였으면 이 구질구질한 일이 생기지도 않았겠지. 그냥 화풀이한 거야. 대황자가 왕부에 돌아가지 않으니 주 귀비는 곽씨가 병이 난 걸 신경 쓰지도 않아. 병이 나지 않았대도 거들떠보지 않았겠지. 내가 태의를 제시간에 왕부로 보내지 않았다면…….”

복안 장공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궁 일은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속이 터졌다.

“조씨와 곽씨는 무고한 사람들인데…….”

“무고해? 누가 무고해? 무고하면 또 뭐가 어떻고. 사람은 누구나 죽어. 너랑 나도.”

이동이 나지막이 하는 말에 복안 장공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대황자는 다시 대상국사로 향했다. 이번에도 지장전에서 새벽까지 꼬박 앉아 있었다. 영원은 정북후부에서 지휘하며 모든 것을 준비하고서 그가 대상국사에서 나오기만 기다렸다.

대황자는 삼경이 되어서야 앉아 있느라 뻣뻣해진 두 다리를 끌고 천천히 지장전에서 나와서 회랑을 따라 밖으로 걸어 나갔다. 회랑 한쪽에는 열 걸음마다 그를 위해 일부러 걸어둔 붉은 등롱이 있었다.

대황자는 고개를 숙인 채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그림자가 앞에서 뒤로, 다시 뒤에서 앞으로 오는 걸 바라보는 동안 내내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흔들리는 그림자처럼 마음도 혼란스러웠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대상국사에서 나간 후 등롱이 없어지자 사방이 짙은 어둠과 추위가 뒤덮였다. 대황자는 두봉을 꽉 여미고 계단으로 내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짙은 어둠만 가득했다. 대황자는 고개를 숙였다.

사환이 금세 사찰에서 등롱을 가지고 달려 나왔다. 사찰에서 볼 때 밝게 빛나던 그 등롱은 사찰 밖에선 겁을 먹은 듯이 아주 좁은 범위만 밝혀주었다.

사환이 등롱을 높이 쳐들고 말에 오르는 대황자를 비춰주었다. 하늘이 너무 어두워서 사환들은 말에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두 사환이 앞으로 나와서 하나는 대황자 말 앞에서 등롱을 들고 하나는 말을 끌었다. 나머지는 말을 끌고 뒤를 따랐다.

평소에 경쾌한 말발굽 소리도 지금은 이 어둠에 묻혀 매우 침울하기만 했다. 청석로에 떨어진 말발굽 소리가 금세 어둠 속에 묻혔다.

이 밤은 조용하면서도 무시무시한 거대한 짐승 같았다. 조금씩 이 어둠 속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짐승.

대황자는 말 위에서 두봉을 여미고 또 여몄다. 털 두봉으로 몸을 단단히 두르고 있어도 춥기만 했다.

침울한 말발굽 소리가 이 거리를 지나 저 거리로 들어가는데, 말 위에 탄 대황자 눈에 저 앞에 말을 탄 자기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뜬금없이 불빛이 나타난 것이 보였다. 불빛이 춤을 추듯 번쩍이더니 또 다른 불빛이 나타났다. 반짝반짝, 선명하게 붉어지더니 이어서 불빛이 또 나타났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갯빛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불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대황자는 넋을 놓고 보다가 즐겁게 반짝이는 빛을 보며 더듬더듬 물었다.

“저, 저게 무엇이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주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고개를 숙였더니 말 앞을 비추던 등롱은 어느새 꺼져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 사환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대황자는 무언가 의식한 듯이 고개를 휙 들었다. 역시나, 조금 전에 신명나게 춤을 추던 불빛들이 싹 사라졌다.

대황자는 두려움에 목구멍에서 뭔가 긁는 소리를 내면서 고삐를 움켜쥐고 말을 재촉했다. 하지만 말은 그 자리에 굳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 두려워져서 말에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눈앞에 느닷없이 휘황찬란한 유리등이 나타났다. 그 유리등의 빛과 함께 온몸을 검은색으로 두른 앙상한 노인이 나타났다. 창백한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한 손에 유리등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쉴 새 없이 등을 두드리며 비틀비틀 걸으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들, 힘들어 죽겠다. 얼른 돌아가자.”

대황자는 얼이 빠졌다. 너무나 괴이한 일이었다. 꿈을 꾸는 것인가?

“응?”

노인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코를 킁킁거렸다.

“산 사람 냄새가 나는구나.”

그러고는 또 코를 킁킁거렸다.

“귀인인걸? 아, 너였구나.”

대황자를 향해 걸어오는 노인은 갈수록 키가 커졌다. 대황자 앞에 이르렀을 때는 놀랍게도 말 위에 있는 대황자와 눈높이가 맞았다. 대황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나 두려웠다.

이건 인간이 아니다! 분명 인간이 아니야. 귀신을 만났다!

“난 귀신이 아니다.”

노인은 독심술을 하는 듯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대황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너는 지상의 주인, 나는 지하의 주인이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허공에 비치는 불빛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아가들아, 장난치지 말아라. 귀인이 왕림하셨다.”

“너, 너는…….”

대황자는 그제야 말이 나왔다. 정신이 조금 돌아온 후에야 이 노인의 눈이 시커먼 구멍이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음을 깨달았다. 비명을 지르는 대황자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귀인을 놀라게 하지 말아라. 얼른 돌아와라.”

노인이 손짓하자 불빛들이 노인의 손으로 날아갔다. 노인은 손을 뻗어 빛을 잡아서는 품에 집어넣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이다.”

노인의 온화한 태도에 혼비백산한 대황자가 조금 정신을 차렸다.

“너, 너는…… 여기는 천자의 발아래…… 잡귀는…… 잡귀는…….”

노인이 변함없이 온화하게 웃었다.

“내가 천자의 발아래 간 것이 아니다. 네가 내 땅에 침입한 것이다. 우리가 인연인 모양이지. 자, 좀 보자꾸나.”

노인은 텅 빈 두 눈으로 대황자를 마주 보다가 허허 웃었다.

“너 방금 지장보살 앞에서 나왔구나. 음, 다 보았다.”

“무, 무엇을?”

혼백 몇 조각이 다시 돌아온 대황자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

“너의 과거, 미래. 운명. 운수. 모든 것이다.”

노인의 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어쩐지 내 땅에 침입했더라니. 운명성이 널 보호하는구나. 음. 이것이 네 운명 중에 가장 큰 살(煞)이다. 이번을 무사하게 넘기면 앞으로 순조롭고 평탄하게 천하를 군림할 것이다. 넘기지 못하면, 휴, 진룡이 제자리로 돌아가겠지.”

“신령님의 가르침을 구합니다!”

대황자는 노인의 말에 경악하는 가운데 몹시 흥분했다. 귀신이든 신이든, 그가 만난 건 분명 인간이 아니다!

“무슨 가르침? 속으로 훤히 알지 않느냐. 이미 결정한 것 아니냐?”

노인의 텅 빈 눈엔 정말로 대황자가 보이는 듯했다.

“신령님, 말씀하신 살이라는 게, 제 혈육입니까?”

“그래.”

대황자의 다급한 물음에 신령은 그런 듯 아닌 듯 대답했다.

“신령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살……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차마 모진 마음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걸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대황자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천하를 군림하고 만백성의 주인이 되려면 견딜 수 없는 것도 견뎌야 하는 법이지. 휴. 견딘다, 인(忍)이라는 글자에 칼(刀)이 있다. 견디면 적을 죽이는 무기가 될 것이고, 견디지 못해서 손을 쓰지 못하면 그 칼이 네 머리 위로 떨어진다. 큰일도 아니지. 진룡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다시 윤회가 시작되는 것일 뿐.”

노인은 손을 들며 말을 이었다.

“네가 세상에 내려온 진룡이라고는 하나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된다. 돌려보내 주마.”

노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안개가 자욱해지는 것 같더니 대황자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눈을 떴더니 아까 그 거리로 돌아와 있었다. 두 사환이 하나는 앞에서 말을 끌고 하나는 붉은 등롱을 들고 있었다.

“멈춰라!”

대황자가 날카롭게 고함치고는 발고리를 밟고 말 위에 일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은 여전히 온통 어두컴컴하고 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조금 전에 아무것도 못 봤느냐?”

대황자가 다급하게 물었다. 말 앞에 선 두 사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제히 뒤돌아봤다.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뭐가 있었습니까?”

“아까, 조금 아까, 빛 덩이가, 갖가지 색 빛이, 그리고 노인……, 노인, 못 보았느냐?”

대황자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허리를 숙여 숨죽이고 사환을 빤히 봤다. 두 사환은 두려운 듯 대황자를 바라봤다.

“왕야,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소인들은…… 소인들은 정말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대황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허리를 세워 말 위에 앉았다. 흔들리는 말 위에 탄 대황자는 넋이 나간 듯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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