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격장법(激將法)을 남용하다
(※격장법激將法: 자극적인 말로 장수를 출전시키는 방법)
고서강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주 주밀부사의 끝없는 걱정을 잘랐다.
“사왕야, 그때 상황을 조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말할 게 뭐가 있습니까. 첫째 그 미친개가 닥치는 대로 물었습니다. 제 왕부의 처첩들이 질투로 사달을 일으킨 걸,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고 자신이 당한 거지요. 어떻게 된 일인지 자기네 시녀가 다 설명했는데, 어머니 탓으로 돌리다니. 어머니가 자기 첩을 죽였답니다. 게다가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느니, 손에 피를 얼마나 묻혔느니, 어머니가 죽은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도 장녕궁에 원혼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사람을 해치고 죽은 사람을 무서워하느냐고 했어요. 들어보세요. 미쳤지요? 미친개지요!”
고서강이 집중해서 듣더니 물었다.
“대왕야가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믿을 수가 없었다. 황상도 계신 자리에서 대왕야가 어찌 감히.
“그럼 내가 헛소리하겠습니까?”
사황자가 언짢은 듯 삐딱하게 고서강을 바라봤다.
“아닙니다. 사왕야께서 하신 말씀이 너무나 놀라워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실로 믿을 수가 없어요. 너무 지나칩니다.”
고서강은 얼른 변명했다. 현재 대국이 거의 정해졌다. 눈앞의 사왕야는 미래의 황상이다.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나쳐? 첫째 눈에 지나친 일이 뭐가 있다고. 아버지에게 버럭버럭 고함 지르는데도 아버지는 받아주시는걸!”
사황자가 혀를 차자 주 추밀부사가 웃으며 고서강을 향해 말했다.
“어머니가 귀비 마마를 만나러 입궁하셨다가 내가 나오기 전에 막 돌아오셨네. 귀비 마마가 매우 노하셨다는군. 내내 우시면서 대왕야에게 귀신이 씌었다고, 분명 뭔가 쓰인 거라고 하신다는군. 고 사사, 이 말 좀 들어보게.”
고서강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용자봉손(龍子鳳孫), 진룡의 혈통은 일거수일투족 신명이 보우하시는데 어느 악귀가 감히 들러붙겠나. 정말로 귀신이 쓰인 거거나 뭐가 달라붙은 것이라면 더 큰 일이지. 첫째, 덕이 바르지 못하면 사악함을 이길 수 없고, 둘째, 잠룡이 귀신에 씐다는 말은 정말로 듣도 보도 못했네.”
주 추밀부사가 손뼉 치며 동의했다.
“내 말이 그 말이네!
사왕야, 사왕야께서 쓸데없는 화를 입었지만, 이번 일로 황상과 귀비가 대왕야의 본성을 똑똑히 보셨습니다. 사왕야, 실보다 득이 큽니다.”
“훨씬 크지요. 그저 육신의 고통으로 황상과 귀비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사왕야.”
고서강이 일어서서 깊이 장읍하며 축하하자, 사왕야는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길 바라야지. 고 사사의 덕담을 빌어야지요.”
고서강은 다시 자리에 앉아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사왕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 대국이 거의 결정됐습니다. 하지만 거의 결정된 것과 결정된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사왕야와 대왕야 사이에 관건은 처음부터 단 하나, 황상과 귀비 마마의 자식 사랑밖에 없었습니다.”
주 추밀부사는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사황자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자식 사랑이라는 말이 조금 마음에 거슬렸다.
“부모 사랑이란 포용할 수 있는 한 포용하는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흔들리지 않는 감정입니다. 사왕야에겐 가장 변하기 쉬운 것이고요.”
고서강은 더더욱 진지해졌다.
“그 당시 귀비 마마가 대왕야를 낳기 전엔 처지가 매우 힘겨웠습니다. 대왕야가 태어난 후에야 서서히 기반이 단단해졌지요. 사왕야가 태어나기 전에 황상께서 여러 번 대왕야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계 노승상이 반대했고, 사왕야가 태어난 후에도 황상이 두어 번 거론했습니다. 대왕야는 황상과 귀비 마마 마음속엔 정당한 태자였습니다.”
사황자의 얼굴이 상당히 안 좋아졌다. 주 추밀부사는 사황자의 안색을 살피며 수시로 고서강에게 눈짓했다. 고서강은 아예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상 나라 때 탕왕은 태자 태갑(太甲)을 동궁에 가두고 3년 뒤에 다시 태자로 세웠습니다. 역대에도 어질지 못하던 태자가 개과천선하여 다시 태자가 된 일이 적지 않습니다.”
“그건 태자지. 대왕야는 태자가 아니지 않은가.”
사황자의 안색이 그보다 안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안 좋아지자 주 추밀부사가 얼른 분위기를 풀었다. 고서강은 주 추밀부사의 암시를 받아들이지 않고 엄숙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대왕야는 명분만 없었지, 황상, 특히 귀비 마마 마음속의 태자일세. 여인에겐 장자가 가장 소중하네. 사왕야, 보위가 정해지기 전엔 방심해선 절대로 안 됩니다. 설령 태자로 정해졌다고 해도 신중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절대로 방종해선 안 됩니다.”
“음, 알겠습니다.”
사황자는 아라의 그 말, 그리고 어제 첫째가 부황에게 버럭버럭 고함친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부황과 모비가 자기를 이용해 첫째를 단련하는 데 쓸까 봐 걱정이었다. 이런 일은 역대에도 많았으니까…….
“나도 다 생각이 있습니다. 난 볼일이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사황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서강과 주 추밀부사가 대답하기 전에 벌써 가버렸다. 다급하게 뒤쫓아가던 주 추밀부사가 돌아서서 고서강에게 투덜거렸다.
“자네도 참. 말을 해도……. 내가 눈치 주지 않았나. 말이 너무 심했네. 황상과 귀비는 대왕야와 사왕야를 언제나 똑같이 대하네. 명분만 없는 태자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고서강이 빙그레 웃었다.
“나도 아네. 일부러 심하게 말한 거네.”
“응?”
주 추밀부사는 살짝 이해되지 않았다.
“휴, 사왕야의 성격도 대왕야보다 조금 나을 뿐이지. 대왕야가 누르고 있으면 큰일을 생각해서 성격을 다스리고 법도를 지키고 신중하겠지만, 대왕야가 없고 모든 일이 안정되면, 사왕야의 성격이 지금과 같겠나?”
고서강이 바라보며 묻자 주 추밀부사는 미간을 단단히 좁히고 있다가 한참 만에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될지 그로서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없지. 황상에게 황자가 둘뿐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계 천관은 보아하니 진왕 문하에 의탁한 것 같고, 그리고 영씨 가문의 그 영원…….”
영원 이야기가 나오자 고서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조금 마음에 걸리네. 자네 소육에게 영원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하게. 영원이 경성에 온 후로……. 난 아무래도 뭔가 마음에 걸려. 영씨 가문은 만만하게 볼 곳이 아니네. 별궁에 있는 분은 적자일세.”
“그게 참…….”
주 추밀부사가 손바닥을 세워 목 위로 그었다.
“이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걸 바라나? 우리 고가의 손엔 황가의 피를 묻히지 않네.”
“그냥 하는 말이지. 계속 말하게.”
고서강이 삐딱하게 바라보며 하는 말에 주 추밀부사가 허허 웃었다. 그야 황가의 피를 묻히는 건 개의치 않지만, 별궁 쪽엔 손이 닿지 않았다.
“설령 대왕야가 끝장났더라도 사왕야는 아직 발 뻗고 잠들지 못하네. 하지만 사왕야는 진왕과 별궁의 그분을 안중에 두지 않을 걸세. 그러니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계속해서 대왕야로 사왕야를 눌러야 해. 그래야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걸 막을 수 있네. 그것 때문에 크게 잘못될 수도 있어.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걸세.”
“영명하네, 고 사사.”
즉시 알아들은 주 추밀부사는 혀를 내두르며 칭찬했다.
영원은 붓을 들고 종이 위에 쓰인 사람 이름, 사건에 하나하나 동그라미를 그리고 표식을 했다. 궁엔 손댈 수 없지만, 대황자부, 사황자부, 그리고 진왕부엔 어느 정도 손을 쓸 수가 있었다. 이 세 황자부 중에 지금 가장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건 오히려 진왕부였다.
영원은 정북후부에 두어 번 들렀었던 진경해와 진경산 형제를 생각했다. 이 형제는 우직하고 의로운데 속셈은 적지 않았다. 누이인 진왕비 진씨를 매우 아끼고 누이 이야기만 나오면 쉴 새 없이 칭찬했다. 보아하니, 진씨가 정말로 꽤 유능한 듯했다. 사내였다면 신하의 우두머리가 될 정도는 아니더라도 만만하게 여길 상대는 아니었으리라.
대황자부와 사황자부에서는 많은 걸 알아냈다. 납팔 그날 손씨가 넘어진 일, 곽씨가 물을 쏟은 일, 심지어 정씨도 바닥 가득 물을 쏟은 일까지 알아냈다.
영원이 쥐고 있는 붓이 물이라는 글자 위로 몇 획을 더 그었다. 정씨가 물을 쏟은 것, 곽씨가 물을 쏟은 것, 절대로 사고가 아니란 것을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이 직감으로 단정할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물을 쏟은 배후에 검은 손이 있다고 단정할 수 있었다.
그럼 곽씨와 조씨가 물에 빠진 건 어떨까.
영원은 종이 위의 곽씨, 조씨, 구곡교라는 글씨를 빤히 바라봤다.
물에 빠진 건 사고일까?
하!
영원이 헛웃음 쳤다.
사고는 무슨.
검은 손은 누구일까?
또 누가 있겠나.
스라소니는 스라소니다. 고양이는 화가 나면 기껏해야 발톱을 세워 피를 볼 뿐이지만, 스라소니가 화를 내면 사람 목숨이 오간다.
영원의 붓이 종이 정중앙 ‘주(周)’자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또 그렸다. 이 스라소니, 무슨 생각인 걸까. 어째서 계속 목표 주변만 맴도는 걸까.
그녀를 언짢게 한 것이 주 귀비가 아닌가?
그런데 주변에만 손 쓰고 있다. 무슨 생각일까?
보림암, 복안 장공주는 창가 앞에 서서 뒷산의 스산한 겨울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고, 이동은 등받이 의자에 앉아서 그런 장공주를 바라보며 차를 머금었다.
장공주는 이른 아침부터 그곳에 서서 벌써 반각 넘게 서 있었다.
“전에 계 노승상이 스산한 겨울 아래 생기가 숨어 있다고 자주 말했지.”
복안 장공주는 돌아서서 그렇게 말하고는 향로 앞에 가서 서서 손을 내밀고 불을 쬈다.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 간직한다고 하죠(春生夏長, 秋收冬藏). 겨울에 간직한다는 것은 1년의 수확물을 거둬 간직하는 것이기도 하고 내년의 생기를 간직하는 것이기도 하죠. 외할머니도 자주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겨울이 숨기는 것 중에 무수한 시신과 뼈도 있어.”
창밖의 한기를 마주하던 복안 장공주의 얼었던 얼굴이 금세 풀렸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이동이 건네는 차를 받았다.
“시신과 뼈가 생기를 품고 기르지. 죽음으로 생을 키워야 천도가 다시 윤회해.”
복안 장공주는 냉담한 표정으로 차를 머금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이동이 민감하게 물었다.
“첫째 정비 곽씨가 측비 조씨를 화원 호수에 빠뜨려서 조씨가 익사했어.”
복안 장공주의 목소리가 표정처럼 냉담했다. 이동은 잠시 멈칫하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처첩의 쟁투 중에 이건 가장 처참한 것도 아니었다.
“주씨가 쓰러졌어. 조씨가 죽어서가 아니라…….”
복안 장공주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가장 아끼는 아들 때문이지. 그 아들이 삿대질하며 그녀 양손에 피가 흥건하다고 호통쳤어. 두 아들이 그녀가 보는 앞에서 엉겨 붙어 싸우고 장식장을 걷어차서 쓰러뜨렸고.”
“어느 아들이요? 첫째요? 아님 넷째요?”
이동이 경악했다. 앞에 두고 양손에 피가 흥건하다고 했다고? 미쳤구나.
“첫째야.”
복안 장공주는 따듯한 차를 마시고 숨을 돌린 후에 혈색과 기분 모두 좋아졌다.
“어리석지? 당당한 황자가, 다 큰 사내가 화가 나서 핏대를 세우고는 막무가내인 아낙처럼 삿대질하고 남의 흠을 들추며 욕을 퍼부었어. 두 사람이 시정잡배처럼 엉겨 붙어서 구르고 밀치면서 싸웠어. 시정잡배만도 못해. 시정잡배는 차라리 서로 칼로 찌를 용기라도 있지. 이 둘 좀 봐. 이게 싸움이야?”
복안 장공주가 탁자를 탁 내리쳤다.
“정말 창피해서!”
“화난 여인네처럼요?”
“화난 여인네? 너도 여인이니 말해 봐. 화가 나면 어떻게 하니? 이렇게 못난 꼴을 보여? 네 어머니도 여인인데, 화가 난다고 이렇게 해? 나도 여인이야. 내가 화가 나면 이렇게 하디?”
복안 장공주가 어떻게 하는지 줄줄이 묻는 걸 보고 이동은 영원의 비유를 곧바로 떠올렸다. 웃음이 날 것 같아서 얼른 참았다. 자신과 어머니는 화가 나면 정말로 못나게 굴지만 장공주는 절대로 아니었다.
“왜 웃어? 내 말이 틀렸어? 너랑 네 어머니는 화가 나면 소매를 걷고 사람을 때려?”
복안 장공주가 가차 없이 묻자, 이동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기지 못하니까요. 이길 수 있다면 솔직히 직접 때리면 속은 풀릴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