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죽은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다
“말해라!”
대황자가 버럭 고함치자, 죽은 듯이 굳어있던 보주가 갑자기 마늘이라도 빻는 듯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진저리치던 도요는 약삭빠르게 오히려 떨림이 멎어서 황상을 빤히 바라보며 얼른 대답했다.
“부인입니다! 부인이…… 부인이 구곡교로 가자고 했습니다. 춥다고요. 왕비와 할 말도 있는데 구곡교가 이야기 나누기 좋다고요. 왕비는 부인을 따라 구곡교로 올라갔습니다. 부인이 앞에서 가고 왕비는 뒤에서 가다가 나중에…….”
도요는 부인을 호수로 던질 때 악귀 같던 왕비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무심결에 탑상에 누운 곽씨를 돌아봤다. 얼굴이 창백하고 기운 없어 보였지만 아까보단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황상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그리고 부인이 왕비와 이야기 나눈다고 떨어져서 오라고 했습니다. 소인과 보주는 뒤에서 따라갔습니다. 소인과 보주가 호심정에 도착했을 때 부인과 왕비가 멈춰서 이야기 나누고 있었습니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엔…… 그러니까…….”
도요는 이제 고개도 찧지 않고 가만히 바닥에 엎드린 보주를 쉴 새 없이 힐끔거리며 우물거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녀가 봤고 보주도 봤다. 제대로 다 보진 못했더라도 웬만큼은 봤을 것이다. 행여 보주가…….
그럼 보주가 거짓말하는 거라고 우기자!
“부인이 왕비를 밀었습니다. 그러더니 어떻게 된 일인지, 부인이 미끄러져서 호수에 빠졌습니다. 왕비는 부인을 잡으려다가 같이 빠졌습니다. 소인들은 멀리 있어서 도와달라고 고함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황상, 부디 명백히 조사해주십시오.”
결심하고 이판사판 나가기로 한 도요는 말도 줄줄 했고 더 영리하게 굴었다.
“그렇게 된 것이냐?”
황상이 보주에게 물었다. 보주는 여전히 엎드린 채 있었고 도요가 그녀를 흔들었다.
“황상께서 물으시잖아!”
보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부인은 이미 죽었다. 그녀들이 부인을 따라 친정에서 떠날 때 태태가 한 말이 있었다. 부인이 잘 지내면 그녀들도 잘 지낼 것이고, 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들에겐 죽음뿐이라고. 부인이 죽었으니 그녀에겐 죽음뿐이었다.
“저 천한 것이 겁에 질려 넋이 나갔구나.”
주 귀비는 눈에 힘이 풀린 보주를 싫은 듯이 바라봤다. 이렇게 변변찮은 천한 시녀가 제일 싫었다.
“무서운 줄은 아는구나.”
황상이 넋 나간 보주에게서 시선을 떼고 도요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도요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면서 절망이 몰려왔다. 난 이제 죽었구나!
“물러가라!”
잠시 후, 황상이 성가신 듯 명령했다. 도요는 사면이라도 받은 듯이 다급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일어나서 물러나다가 다시 얼른 앞으로 나가서 보주를 힘껏 일으켜서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큰형님 댁 집안일인가 봅니다. 질투로 궁에서까지 난리를 부리다니. 형님, 아무리 그래도 저택 일에 신경 좀 쓰세요. 이 사달이 나다니, 모비가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너무 창피하지 않습니까.”
사황자는 무시하는 눈으로 대황자를 바라보고는 황상과 주 귀비를 흘깃 바라봤다. 첫째가 얼마나 무능한지 상기시키려는 것이었다. 깊이 질타해? 큰 기대를 걸어? 퉤!
“네 개 눈깔엔 이게 질투 같으냐? 그래, 설령 우리 저택 여인들이 질투한다 치자.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대황자는 안 그래도 가슴이 터질 듯한 울분을 터트릴 곳을 찾고 있었다.
“형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여기는 장녕궁, 부황과 모비가 다 있는 앞에서 사황자는 대황자가 두렵지 않았다. 장녕궁이 아니고 부황과 모비가 없더라도 두렵지 않았다. 그가 언제 대황자를 두려워한 적이 있던가. 양보도 한 적 없거늘.
“내 눈이 개 눈깔이면, 형님 눈은 뭡니까? 부황과 모비는요? 형님 그 말은…….”
사황자는 대황자의 말꼬리를 끝까지 잡으려고 황상과 주 귀비를 가리켰다. 대황자가 별안간 사황자의 가증스러운 얼굴에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주 귀비는 꽥 고함을 질렀고 사황자는 대황자의 갑작스러운 주먹에 맞아 넋이 나갔다. 주먹을 휘두른 대황자는 금세 다시 팔을 들어 주먹을 꽂았다. 두 번째 주먹에 사황자가 넋이 나간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고 날카롭게 고함쳤다.
“감히 날 때려?”
고함이 다 끝나기 전에 주먹부터 나갔다.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무술을 연마했다고 하지만 그저 말뿐으로, 마보 자세조차도 연달아 사흘 선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싸움도 그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주먹이나 휘두르는 막무가내 권법이었다. 막무가내 권법의 규칙이란 마지막엔 같이 들러붙어서 얼싸안게 되고, 손발을 쓸 수 없으니 머리로 들이박거나 이로 물거나 하지 않나. 대황자와 사황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두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두 사람은 벌써 들러붙어서 바닥을 굴렀다. 대황자가 사황자 어깨를 물자 사황자는 비명을 지르며 입을 벌리고 대황자 어깨를 덥석 물었다.
황상은 기가 차서 부들부들 떨었다.
“뜯어내라! 어서! 불효자식! 이 불효자식!”
“뜯어내지 않고 뭐 하느냐! 이 쓸모없는 것들! 내 아들아, 싸우지 말아라. 싸우지 마. 말로 해라, 말로. 이년들, 어서 말리지 않고 무얼 하느냐!”
주 귀비는 고함치고 울고, 마음이 아파서 어쩌면 좋을지 몰랐다. 너무나 훌륭하고 착한 두 아들인데 누가 부추겨서 이렇게 됐을까.
궁인들은 한데 엉겨 붙은 두 황자를 목숨 걸고 잡아끌어서 하나는 화항 이쪽 끝, 또 하나는 저쪽 끝으로 끌고 갔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버둥거리는 와중에 눈을 부릅뜨고 눈빛으로 상대를 갈가리 부숴버리고 싶은 듯이 서로를 노려봤다.
황상이 대황자를 가리키며 고함쳤다.
“뭐 하는 짓이냐? 정신 나간 것이냐? 짐 앞에서 감히 주먹을 휘둘러? 네 아우다! 설사 잘못이 있다고 해도 그냥 주먹을 휘둘러?”
“잘못한 건 아시는군요. 잘못한 걸 알면서도 어째서 혼내지 않으십니까? 이놈이 잘못했을 때는 어째서 아무런 말도 안 하십니까? 굳이 내가 주먹을 써야 그때 입을 여십니까? 왜 내가 손을 써야 그제야 입을 여십니까?”
대황자는 황상을 노려보며 버럭버럭 고함쳤다. 분노, 서러움…… 살고 싶지 않았다.
“너! 너, 이 불효자식!”
황상은 대황자의 말에 기가 막혀 얼굴이 시퍼레졌다.
사황자는 대황자의 말을 듣고 싸늘하게 황상을 흘겨봤다. 마음이 서늘해졌다. 자기가 잘못한 걸 보고도 한마디도 하지 않다니. 오냐오냐해서 망쳐버릴 생각인가? 그렇겠지. 제왕의 마음엔 영명하기 짝이 없는 태자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다른 아들은 태자와 다투는 일이 없도록 돼지처럼 기르겠지.
“대가아, 무슨 말버릇이냐. 네 아버지다. 어떻게 네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 부황은 다 널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주 귀비는 초조하고 화도 나고 마음도 아팠다.
“게다가 사가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않으냐. 네 아내 둘, 모두 잘못 골랐다. 보렴, 그것들 때문에 네가 이렇게 변했구나…….”
대황자는 코웃음 치며 주 귀비의 말을 잘랐다.
“사가아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편애를 해도 해도 너무 하십니다! 저놈이 한 말이 틀린 게 아니라고요? 부황이 아까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매번 이렇지. 부황 말이 틀려도, 모비는 저놈만 편애하시니까 옳다고 생각하겠지요. 항상 부황에게 넷째는 훌륭하다, 넷째는 틀린 적이 없다고 하시잖습니까. 틀린 건 다 나고, 다 내 잘못이지요! 매일매일 부황을 부추기고, 매일매일 부황에게 그 편애하는 말을 하더니, 이제는!”
대황자가 돌아서서 곽씨를 가리켰다.
“이제 부추기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손을 쓰기 시작한 거지요? 모비가 조씨를 죽였습니다. 실족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누가 밀었니, 당겼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도 마세요! 내가 모비를 모릅니까? 이 장녕전 앞에서 무릎 꿇고 벌 받다가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이 궁 안에 원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죽은 사람이 두렵다고요? 그 손에 묻은 피가 얼마나 많은데 죽은 사람이 두렵다고요?”
“이 고얀 놈!”
황상의 이마에 핏줄이 불룩 튀어나왔다. 저 불효막심한 놈을 이 자리에서 쳐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주 귀비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져서 대황자를 바라봤다. 이게 내 아들인가? 내 아들은 이럴 리 없다. 내 아들, 귀신에 씌었구나. 그래, 분명 뭐가 쓰인 것이다. 내 착한 아들이 이럴 리가 없다!
사황자는 분노한 황상, 눈이 휘둥그레진 주 귀비를 불구경하듯 바라봤다. 보세요. 이게 바로 두 분이 기대를 걸고 깊이깊이 사랑하는 착한 아들입니다!
하지만 형님이 한 말들은 한마디도 틀리지 않았다.
“무릎 꿇어라! 무릎 꿇고 모비에게 사죄하고 머리를 조아려라! 무릎 꿇지 않고 뭐 하느냐!”
황상이 버럭버럭 고함쳤다.
“대가아,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무언가에 쓰인 것이다. 여봐라, 어서 가서…….”
주 귀비는 말문이 막혔다. 태의는 귀신이 쓰인 일 같은 건 못 고치는 것 같은데? 궁엔 무당을 부를 수도 없고……. 누굴 부른다?
“대가아, 귀신 쓰인 것이냐?”
주 귀비는 말하다가 울기 시작했다.
“형님 눈엔 이제 부황도 모비도 없군요.”
사황자는 대황자를 부추기면서 때려줄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시퍼렇게 멍든 눈, 부어오른 입술을 하고도 변함없이 시비를 걸었다.
“왜 저놈에겐 뭐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예? 왜 말하지 않냐고요. 저런 말을 내가 했으면 이간질한다고 하셨겠지요. 그렇지요? 그런 말을 했는데, 왜 가만히 계십니까?”
대황자가 사황자를 가리키며 황상을 향해 따져 물었다. 황상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손이 쉴 새 없이 떨렸다.
“이 불효자식!”
“대가아, 왜 이러는 것이냐. 넷째는 네 아우다…….”
주 귀비는 초조해서 어쩔 줄 몰랐다. 둘 다 소중한 자신의 아들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어쩌다가 이런 일이.
“아우요? 하!”
대황자는 싸늘하게 웃으며 모두를 뿌리치고 뒷걸음질 치고 또 뒷걸음질 쳤다. 공간을 분리한 장식장이 놓인 곳까지 뒷걸음질 쳐서는 갑자기 다리를 치켜들더니 장식장을 힘껏 걷어찼다. 진귀한 골동품 등 장식품이 놓인 장식장이 흔들거리더니 콰당 하고 넘어졌다.
주 귀비의 귀를 찢는 비명 속에 대황자는 장녕전에서 뛰쳐나가고 장녕궁을 뛰쳐나가서 선덕문을 뛰쳐나갔다.
이렇게 큰 서러움, 그리고 걱정, 상심을 풀지 못한 주 귀비는 그날 밤에 병이 나서 쓰러졌다.
대황자 측비 조씨의 사망 소식, 그리고 주 귀비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숨길 수 없었고, 사황자와 대황자의 얼굴에 상처도 숨길 수 없었다. 장녕궁에서 발생한 처첩의 쟁투, 형제의 쟁투는 주 귀비가 병으로 쓰러지는 동시에 온 조정 안팎으로 퍼져나갔다.
고서강은 들뜬 마음으로 술 몇 잔을 자작하면서 화원 안을 서성이다가 주 추밀을 만나러 외출해서 사황자를 모셔왔다.
주 추밀부사는 매우 마음 아파하며 사황자의 멍든 눈과 부어오른 입술을 바라봤다.
“어떻게 이렇게 모질 수가.”
“얼굴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깨도 물었는걸요.”
사황자가 어깨를 가리켰다. 주 추밀부사는 다급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 이엔 독이 있습니다! 태의에게 보였습니까?”
“그놈이 인간입니까? 보세요. 인간이 아닙니다. 미친개입니다.”
사황자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