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65화 (265/463)

265화: 여기저기 치이는 곽씨

곽씨와 조씨가 앞뒤로 서서 무릎을 꿇고 문안 올리자 주 귀비가 나른하게 손을 들었다.

“일어나라. 대가아는 어제 잘 쉬었느냐? 밤에 잠은 잘 잤고?”

곽씨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아룁니다. 마마. 어제 늦게까지 책을 읽으시고 바깥 서재에서 침수 드셨습니다. 서재 시종의 말이 밤새 푹 주무셨다고 합니다.”

주 귀비가 이런 식으로 한 번 물은 이래 곽씨는 대왕자가 어디에서 잠을 자든 잘 쉬었는지, 잘 잤는지 몰래 사람을 보내 알아봤다. 대놓고 알아볼 수는 없었다. 주 귀비의 명은 그녀에게 성지보다 무서운 일이지만, 대왕야는 모친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서 그녀가 분부할수록 반대로 했다. 풍상(風箱: 바람을 발생시키는 장치로 구성된 나무상자. 밀고 당기는 나무 손잡이, 움직이는 나무상자로 구성됨.) 안의 쥐처럼 이리저리 치이는 신세인 곽씨는 몰래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조씨는 고개를 숙인 채 슬쩍 흘겨보면서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대왕야에게 살짝 귀띔했었고, 대왕야가 곽씨 저 나쁜 년 앞에서 자신의 사생활을 절대로 몰래 알아보지 말라고 엄명했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까지 했는데, 저 나쁜 년이 감히 아직도 알아보고 있었나?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지. 저녁에 왕야를 만나면 이 일도 제대로 말씀드려야겠네.

주 귀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 대가아는 그런 아이지.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학문에 있어서는 비슷한 연배에 대가아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지.”

곽씨는 주 귀비의 말에 내심 안도했다. 됐다. 이번 관문은 넘겼다.

“예전에는 사가아가 명절 일을 준비했는데, 올핸 다른 일이 있으니 그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어쩔 수 없지. 올해 명절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수밖에. 큰 며느리 너는 명절을 이미 두 번 치렀고 넷째네는 올해가 두 번째라서 아무래도 믿음직하지 않다. 올해도 내 밑에서 잘 배워라.”

곽씨, 정씨와 조씨 모두 무릎을 구부리며 ‘예’ 하고 대답했다.

“내일은 노부인을 궁으로 모셔 수선화를 보여드릴 것이다. 마침 잘 되었지. 너희들도 같이 안목을 높여라. 넷째 며느리는 나와 같이 내일 먹거리와 간식을 살펴보고, 큰 며느리는 수선방(水仙房)에 가서 수선화를 골라라. 너도 가거라. 둘이 상의하면 좋지.”

정씨는 장녕궁에 남아 주 귀비와 함께 있고, 곽씨와 조씨는 두봉을 걸치고 함께 장녕궁에서 나가서 어화원을 가로질러 구석에 있는 수선방에 수선화를 고르러 갔다.

수선화가 튼튼하고 푸르게 크려면 온도가 너무 높으면 안 되어서 이맘때 수선방은 바깥 날씨와 거의 비슷했다. 주 귀비가 손난로를 들고 다니는 걸 제일 싫어해서 입궁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추워도 손난로를 들고 오지 못한다. 곽씨와 조씨는 물론 더더욱 그랬다. 손난로가 없으니 둘 다 두봉을 단단히 여밀 수밖에. 수선화를 많이 골라야 해서 두 사람은 몸이 꽁꽁 얼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다 고르고 허둥지둥 나와서 장녕궁으로 돌아갔다.

어화원 한가운데에 있는 큰 호수에 이르렀을 때, 조씨가 주저하다가 먼저 제안했다.

“구곡교로 건너가요. 이 구곡교에서 호심정으로 가서 저쪽에 있는 구곡교를 가로질러 넘어가면 훨씬 빨라요.”

너무 추워서 온몸이 덜덜 떨렸다. 어서 봄처럼 따스한 장녕궁으로 돌아가 몸을 녹이고 싶었다.

“그러지.”

곽씨도 곧바로 허락했다. 그녀도 춥지만 조씨만큼 추위를 타진 않았다. 평소라면 분명 거절했겠지만, 오늘은 조씨와 할 말이 있어서 마침 구곡교를 지나는 것이 더 좋았다.

조씨가 앞에서 먼저 다리로 뛰어 올라가 달달 떨면서 재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달릴 수는 없었다. 궁에서 함부로 달리는 건 큰 죄였다.

곽씨는 뒤를 따르며 심복 시녀 도요에게 눈짓했다. 의중을 알아차린 도요는 얼른 먼저 다리에 올라 곽씨를 따르고는 걸음을 늦춰서 조씨의 시녀 보주의 앞을 막았다. 구곡교는 한 사람밖에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좁아서, 도요 뒤로 쳐진 조씨의 시녀 보주는 앞에 가는 곽씨, 조씨와 갈수록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곽씨는 북에서 태어나 북에서 자라서 경성이 춥긴 해도 고향의 추위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조씨처럼 추위에 약하지 않았고 어떻게 조씨에게 입을 열지 고민하면서 뒤를 따르느라 추운 것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호심정을 지나자, 아직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은 곽씨는 초조해서 땀이 다 날 것 같았다. 조씨가 앞에서 종종거리며 빠르게 걷는데, 저 앞에 뭍이 보이자 곡씨는 다급해져서 성큼 나가서 조씨의 옷자락을 잡았다.

“할 말이 있네.”

“무슨 말이요? 이렇게 추운데. 이따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조씨는 입술까지 달달 떨었다. 정말로 너무너무 추웠다. 곽씨는 이판사판 작정했다.

“여기서 이야기하세. 어제 내가 꽃병에 물을 쏟은 일, 그래 내가 잘못했네. 전에 내가 자네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대인배인 자네가 너그럽게 용서해 주게. 어제 일은 그냥 지난 일로 치세. 왕야는 안 그래도 바쁘신데 걱정거리 보태지 말고.”

“어머나?”

곽씨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걸 알아챈 조씨는 조롱하는 얼굴로 곽씨를 흘깃 봤다.

“‘전에 잘못한 것이 있으면’이라니요. 말씀 참 잘하시네요! 형님, 저는 측비예요. 측비가 뭔지,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고명이 있어도 첩이라면서요? 일개 첩이 무슨 대인배인가요. 너그러운 배포는 더더욱 없죠. 형님, 그렇게 제 체면 세워줄 것 없어요. 전 얼굴이 작아서 체면도 그리 크지 않아요.”

조씨가 곽씨를 뿌리치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곽씨도 다급해져서 다시 조씨를 잡아당겼다.

“예전엔 다 내가 잘못했네. 제발, 이번 한 번만 봐주게.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가진 것이라면 뭐든 주겠네.”

“형님이 뭐가 있다고요. 형님이 가진 건 저도 다 가졌어요. 굳이 없는 거라면……. 하지만 지금은 없지만 곧 생길 거고요.”

조씨가 삐딱하게 바라보며 하는 말에 곽씨는 바로 깨달았다. 정비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곽씨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억지로 웃었다.

“도둑도 도망칠 곳을 주고 몰라고 했네.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정말로 봐줄 생각이 없는가?”

조씨는 두봉을 여미며 말했다.

“어머나, 말씀하는 것 좀 봐요. 자업자득이잖아요.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형님 혼자 일으킨 사달이라고요.”

얼어서 퍼레진 조씨의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떠올랐다.

“게다가요, 아무도 엿보지 말라고 왕야가 분부하셨잖아요. 저택 안이든 저택 밖이든요. 형님, 아까 마마께 뭐라고 하셨죠? 그거 사실인가요, 아니면 거짓말인가요? 정말 물어보고 대답하신 거예요?”

조씨가 까르르 웃었다.

“형님 지금 왕야의 분부를 어긴 건가요, 아니면 귀비 마마께 거짓을 고한 건가요? 정말이지. 화를 번번이 자초하네요. 형님, 이러다가 왕야께 독술이나 백릉을 받는대도 남 탓도 못 해요.”

곽씨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아까 마마의 물음만 신경 쓰느라 그 부분을 잊었다. 옆에 이 악랄하기 짝이 없는 나쁜 년이 있는 걸 까맣게 잊었다니.

“자네, 정말 이렇게 끝장을 볼 텐가?”

곽씨는 성에가 옅게 낀 호수를 힐끔 보고는 조씨를 노려보며 매섭게 물었다. 살 수 없다면 같이 죽어야지!

조씨는 눈앞에 닥친 죽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까르르 웃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런 건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거예요. 누굴 탓해요.”

조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곽씨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래, 좋아. 그럼 같이 죽어! 다 같이 죽어!”

곽씨는 조씨의 두봉 앞섶을 잡아채 조씨를 힘껏 잡아당겨서 호수로 밀어냈다. 조씨가 겁에 질려서 날카롭게 고함쳤다.

“무슨 짓……. 사람 살려……! 사람……!”

조씨는 살려달라고 입을 여는 순간, 자기보다 크고 건장한 곽씨에게 들려서 머리부터 호수에 고꾸라졌다.

자기 왕비가 이런 짓을 할 줄 상상도 못 했던 도요는 놀라고 두려운 와중에 놀랍게도 바로 반응해서는 팔을 들고 두봉을 펼쳐 보주의 시야를 가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돌아서서 조씨의 시녀를 품에 안았다. 조씨의 시녀는 조씨처럼 가냘프고 작았고, 도요는 보주보다 머리통 하나는 컸다. 덥석 안으니 품에 딱 들어왔다. 도요는 한 손으로 보주의 뒤통수를 꽉 붙들고 얼굴을 품으로 누르며 돌아서서 곽씨를 바라봤다.

호수에서 버둥거리는 조씨를 바라보던 곽씨는 용기와 지혜가 같이 치솟았다. 조씨가 죽으면 자기는 죽지 않아도 된다! 방법을 생각해야 해!

“사람 살려! 여봐라! 사람 살려!”

조씨가 더 이상 버둥거리지 않자, 빤히 바라보던 곽씨가 미친 듯이 고함치기 시작했다. 곽씨의 비명을 들은 도요는 잠시 멈칫하다가 보주를 풀어주고 같이 미친 듯이 고함쳤다. 보주는 방향을 잃고 그 자리에서 뱅그르르 돌았다.

궁에는 인적 없는 곳이 없어서, 사람 살리라고 몇 번 고함치자마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곽씨는 눈을 부릅뜨고 그쪽을 지켜보다가 어렴풋이 사람 모습이 보이자 펄쩍 뛰어서 호수에 빠졌다.

도요는 이번엔 정말로 놀라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꺄악 고함쳤다. 옆에 있던 보주는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다.

후다닥 달려온 내시들이 줄줄이 앞뒤 가릴 겨를 없이 호수로 뛰어들어서는 허둥지둥 곽씨와 조씨를 건져서 뭍으로 올라왔다.

곽씨는 그래도 숨이 계속 붙어 있었지만 조씨는 배가 잔뜩 부어서 두 눈을 부릅뜬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잘 훈련된 내시들은 절반은 곽씨를 보살피며 도요의 두봉을 벗겨서 걸쳐주고 장녕궁으로 들고 뛰었다. 나머지 반은 조씨를 보살폈다. 그중에 키가 제일 큰 내시가 조씨의 치마 쪽을 잡고 얼굴이 땅으로 향하게 거꾸로 둘러업고 비틀비틀 달려서 장녕궁으로 향했다. 조씨가 물을 토하기만 하면 작은 희망이라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토하면 살아날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장녕궁까지 뛰어가는 동안, 조씨는 물을 조금도 토하지 않았다.

태의가 약통을 메고 줄줄이 장녕궁으로 달려왔다.

이렇게 큰일이 터졌으니, 정사를 의논하던 황상과 사황자, 그리고 막 입궁한 대황자도 다급하게 장녕궁으로 달려왔다.

묵 승상과 여 승상을 비롯한 신하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고개를 젓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궁에 들어갈 수는 없고 나갈 수도 없어서 아예 내시들이 당직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소식을 기다렸다.

대황자 측비 조씨는 결국 살아나지 못했다. 달려온 태의가 유일하게 한 일은 그녀가 죽었다고, 살리지 못한다고 선포하는 일뿐이었다. 배가 불룩 부풀고 두 눈을 부릅뜬 조씨를 바라보던 주 귀비는 조씨가 죽었다는 말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옆에 있던 시녀들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주 귀비는 죽은 사람을 보는 게 제일 무서웠고 조씨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두 눈이 달라붙은 것처럼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조씨의 퍼레진 얼굴과 부릅뜬 두 눈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어서……! 어서……!”

스스로는 시선을 뗄 수 없게 되자 주 귀비는 더 공포에 휩싸여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마마?”

시녀들이 주 귀비가 바라는 게 뭔지 어찌 알까. 이런 일은 그녀들도 처음이라서 주 귀비의 의중을 읽을 수가 없었다. 주저하다가 주 귀비를 부축하고 한 걸음 내디뎠더니 시신과 더 가까워졌다.

주 귀비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고는 오히려 말이 순조롭게 나왔다.

“어서 치워라! 날 부축해서 들어가자. 들어가!”

시녀들은 순간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두 시녀가 주 귀비를 양쪽에서 들고 뒷걸음질 쳐 대전 안으로 돌아갔고, 내시들이 몰려와 조씨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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