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엇나가다
진왕이 대답하기 전에 강환장이 먼저 나섰다.
“대왕야와 사왕야가 있는데 귀비께 다른 사람의 효심이 보이겠습니까. 귀비는 질투가 강한 분입니다. 유사 이래 드뭅니다. 계 천관의 말씀대로 왕야께서 귀비 앞에 효심을 드러내러 갔다가는 효심을 내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미움만 살 겁니다. 어쩌면 궁에 계신 양빈 마마까지 연루할지도 모릅니다.”
계 천관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자 강환장은 시선을 피했다. 그는 계 천관의 얼굴이 어두워지든 말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간에 낀 진왕은 매우 난처한 듯 허허 웃었다.
“천관의 말씀이 옳습니다. 소화의 말도 옳고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다 과거 일입니다. 귀비도 나이가 드셔서 예전과 다릅니다.”
계 천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환장도 전혀 양보하지 않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대도 질투가 심한 건 심한 겁니다. 게다가 지금 대왕야와 사왕야가 물과 기름처럼 내놓고 칼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반년 동안 하루도 멈추지 않았어요. 이런 때 왕야에게 궁에 자주 드나들라 하시다니, 화살이 쏟아지는 전장으로 나가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부귀는 위험에서 추구하는 걸세! 두 사람이 물과 기름 같아서 이번 일이 왕야에게 떨어진 걸세! 무사태평했다면 서 있기만 해도 큰 공을 얻을 이런 좋은 일이 왕야께 떨어졌겠나!”
계 천관이 화가 치밀어서 하는 말에 강환장은 코웃음 쳤다.
“위험에서 추구한다고요? 그 위험이 어느 정도입니까? 왕야께서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면요? 목숨을 잃으면 뭘 얻은들 무슨 소용입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첫째, 대왕야와 사왕야가 있으면 다른 사람까지 오지 않습니다. 둘째, 대왕야와 사왕야 양쪽이 파멸하면 왕야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왕야와 사왕야가 그 정도로 싸우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을, 왜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까.”
강환장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진 계 천관은 진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야! 첫째, 대왕야와 사왕야가 다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까지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둘째, 대왕야와 사왕야가 모두 파멸한다고 해도 오황자도 있습니다. 왕야, 잊지 마세요. 영원이 지금 경성에 있습니다. 경성에 들어온 이래 조용하게 지낸 적이 없습니다. 셋째, 대왕야와 사왕야의 두 마리 용의 싸움이 꼭 양쪽의 파멸로 끝나리라는 법이 있습니까? 다치는 쪽이 사왕야라면, 대왕야는 민심을 잃었으니 다음은 세 왕야의 다툼이 될 겁니다. 왕야가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밀리지 않겠습니까? 다치는 쪽이 대왕야라면 제 생각엔 영원이 반드시 손을 써서 사왕야를 공격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어떤 국면이 펼쳐질지 지금으로서는 모를 일입니다. 왕야, 지금부터 나서서 민심을 포섭하지 않으면 그때 왕야께서 무엇으로 사왕야, 오황자와 겨루실 겁니까?”
진왕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두 눈썹을 치켜들고는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일리 있습니다. 소화의 말도 일리 있고요.”
“대왕야와 사왕야가 두 마리 용인 이상, 반드시 양쪽 모두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야는 천명이 있는 분입니다. 연못에 몸을 감춘 진룡이요. 조용히 숨죽이고 평온하게 있으면 자연히 기회가 옵니다.”
강환장의 단호한 말에 계 천관은 기가 차서 웃음을 터트렸다.
“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린다? 웃기는 소리군! 헛소리야!”
“그렇지요, 그렇지요.”
진왕은 강환장과 계 천관을 바라보며 누가 옳다는 건지도 모를 말을 했다.
“왕야, 왕야께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감 떨어지길 기다린다는 건 너무 우스운 일입니다. 천명이 있다 해도 인간이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천명이란 인력을 모두 기울인 후에야 찾아오는 수확일 뿐입니다. 천명이라는 강 장사의 말은 기가 막힐 뿐입니다!”
계 천관은 강환장 때문에 말까지 빨라졌다. 진왕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왕야께서 인사(人事)를 다하고 천명을 누리기를 최선을 다해 보좌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할지는 모두 왕야께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강 장사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두 사람은 진왕부에 숨어서 대문을 걸어 잠그고 느긋하게 세월을 보내십시오. 그 천명이 올 때까지요. 황권이 하늘에서 진왕부로 뚝 떨어지는 그 기회가 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럼 저도 왕야처럼 서책이나 읽고 경이나 베끼면서 한가하고 조용한 세월을 보내겠습니다!”
계 천관이 정말로 화를 내자 진왕이 다급하게 일어섰다.
“천관, 진정하세요. 소화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 말은, 나도 그런 뜻이 아니란 겁니다.”
진왕까지 서둘러 일어서자 강환장도 따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천관이 한 말, 다 기억했습니다. 내일 입궁해서 귀비 마마께 문안 올리고 명절 일을 보고할 테니 안심하세요.”
진왕이 뒤이어 태도를 드러내자 계 천관은 안도하며 자기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강환장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제가 조바심을 부렸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왕야. 왕야께서 알아들으셨다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계 천관은 장읍하고 엄숙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왕야, 어진 군주가 어진 것은 소인배를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하기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왕야.”
“예, 예. 기억하겠습니다.”
진왕이 재빨리 대답하자 계 천관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빨리 대답하다니, 못 들었거나 아예 귓등으로 들어 넘긴 것이다. 강환장은 묘하게 웃으며 계 천관을 바라봤다. 은근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맛이 있었다.
계 천관을 배웅한 진왕도 밖으로 나가자 강환장이 뒤를 따랐다.
“왕야, 계 천관의 말은 상대하실 것 없습니다. 왕야, 제 말을 들으십시오.”
“어? 아! 그렇지? 그렇겠지, 그래. 늦었는데 소화도 일단 돌아가라. 이야기는 내일 하자. 내일 해.”
진왕은 걸음을 서둘러 모르는 척하며 얼른 자리를 떴다.
강환장은 걸음을 멈췄다. 허둥지둥 걸음을 서두르는 진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이 큰일 앞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회피하는 습관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아니, 지금이나 예전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강환장이 느긋하게 나가서 몇 걸음 뗐을 때 계 천관의 사환이 옆에서 튀어나왔다.
“강 장사, 우리 노야께서 마차로 오시랍니다.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
강환장은 잠시 주저하다가 사환을 따라 어둠 속에 세운 마차 곁으로 다가갔다. 마차에 올라서 마차 안의 작은 불빛을 가리려 얼른 휘장을 내렸다.
계 천관은 손에 든 문서를 덮으며 매우 평온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강 장사, 자네가 양 구야 사안으로 첫 임무를 받아서 재능을 드러냈을 때, 나는 강 장사를 매우 좋게 보았네.”
강환장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치켜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안다. 일단 칭찬하고 설득할 생각이겠지. 밀고 당기려고. 좋게 보았느니, 기대가 크다니, 심지어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 있다고 털어놓으면서 일단 포섭해서 착실하게 몸 바쳐 일하게 하려는 것이지.
그런 일은 예전에 너무 많이 해서 이골이 날 지경이다.
“강남 사안 때는 더더욱 자네를 달리 봤네. 재능이 뛰어날뿐더러 품행도 나쁘지 않았어. 나라를 위한 마음, 정말 감탄하네.”
칭찬부터 하는 단계를 이미 끝낸 계 천관의 말투가 확 바뀌었다.
“강 장사가 이토록 출중하고 나라를 위한 일념뿐이라면 지금 국면도 똑똑히 꿰뚫어 보았을 걸세. 대왕야와 사왕야 모두 주군이 될 위인이 아니네. 대왕야는 말할 것도 없고 사왕야는 본성이…….”
계 천관은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본성을 따지면 사왕야는 대왕야보다 못하다고 부친이 말씀하신 적 있네.”
강환장은 살짝 얼떨떨해졌다. 뭔가 말이 어긋난 것 같은데?
“대왕야 혹은 사왕야가 즉위하게 되면, 우리에겐 큰 화가 닥칠 걸세. 천하 백성의 큰 재난이고. 황상에겐 황자가 모두 넷 있네. 오황자는 아직 어리고 몸이 허약하지. 설령 건강하다고 해도 긴 세월 별궁에 갇혀서 세상과 단절되어 지냈어. 여인의 손에 자랐으니 주군 감이 아니지. 자네와 나의 목숨, 가문의 앞날, 천하 백성을 생각해서라도 삼왕야께서 대통을 이어받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네.”
강환장은 조금 혼란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이런 말을 할 필요가 뭐가 있나? 굳이 말로 해야 아는가. 너도나도 아는 일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계 천관의 말투가 심각해졌다.
“소화, 왕야를 위한 일념이라는 걸 아네. 왕야는 천성이 순박하고 조용한 걸 좋아하시지. 자네는 왕야께서 나서는 걸 못 견디는 것이겠지. 이렇게 자칫하면 목숨이 오가는 큰일에 발을 내디뎌 화를 초래하는 것, 심지어 살신지화를 초래하는 것이 걱정되는 것일 테지. 하지만 왕야는 황자, 임씨네. 임씨 조상의 업적, 천하 만민을 위해서 몸을 사려서는 안 되네.”
계 천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화, 대국을 고려해야 하네. 자네와 나는 한마음 한뜻으로 왕야께서 이 중임을 짊어지도록 협력하고 도와야 하네.”
정신을 차린 강환장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내가 왕야를 그 의자에 앉힐 생각이 없는 줄로 아는 것이었군! 정말 가소롭군. 하긴.
내가 한 말을 곱씹어 보면 목숨을 아끼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망상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으로 보였겠군.
강환장이 실소하는 걸 똑똑히 본 계 천관은 매우 거슬렸다. 안색이 변하진 않았지만 눈빛이 서늘해졌다.
“안심하십시오. 그 점에 있어서는 천관의 생각이 제 생각입니다. 절대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천관께서 너무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연세에 마음가짐을 꽤 수양하셨을 텐데, 이토록 조급하게 굴다니, 정말 의외로군요.”
공수하며 예의를 갖추는 강환장의 태도에서는 깔보는 느낌이 은연중에 흘렀다. 계 천관의 안색이 퍼레졌다. 배 속 가득한 울화가 표정에 드러날 것 같았다. 잠시 후, 계 천관은 허허 웃고 또 웃다가 공수했다.
“강 장사의 가르침, 고맙네. 이 노인네 명심하지.”
“소생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강환장이 공수하며 인사했다. 계 천관이 분노한 걸 그 역시 알아차렸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이 곧 증명될 테니까.
대황자부, 매일 조회에 참석하는 대황자는 매우 일찍 일어나서 몹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조씨는 조회에 나가기 전에 대황자를 찾아가 방해할 엄두는 나지 않아서 조회를 끝내고 돌아오기만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은 조회가 끝나도 대황자가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 알아봤더니, 대황자가 관아를 한 바퀴 돌고 나간 후에 어디에 갔는지 모른다고 했다. 궁에서도 그가 입궁하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측비 조씨가 발을 구르고 있을 때, 정비 곽씨는 염불을 외웠다. 근심이 가득하고 가슴이 떨렸다. 초하루는 무사히 넘어가도 보름까지 넘기지 못할 형국이었다. 대왕야가 오전엔 시간이 없고, 점심때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저녁엔 분명 돌아올 것이다. 그가 돌아오면 자신이 조씨와 함께 찾아간다고 해도 조씨의 말을 믿고 조씨의 거처로 향할 것이 분명했다.
곽씨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밤새 악몽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조씨와 어제 일을 생각하니, 순간 차라리 깨지 않고 악몽을 계속 꾸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양쪽이 각자 생각을 품고 기다리는데 대황자가 아니라 입궁하라는 주 귀비의 전갈이 왔다. 두 사람은 서둘러 단장하고 함께 나가서 각자 마차를 타고 궁문 앞에서 내렸다.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대가 즉시 눈앞에서 터져 죽길 바라면서도 얼굴엔 그럴싸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양보하며 틈 없이 친밀한 자매처럼 굴면서 장녕궁으로 향했다.
장녕궁에 이미 와 있던 사황자 정비 정씨가 찻잔을 들고 살짝 허리를 숙이고서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화항 앞에 시립하고 있었다. 측비 손씨는 없었다. 어제 그렇게 큰일이 있었으니 그 핑계로 며칠은 몸조심하면서 보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