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한 아라
“그런 것이로군요!”
아라는 뭔가 깨닫는 표정이더니 금세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걸.
“그럼 사랑이 깊을수록 모질게 나무란다는 그 말은 어떻게 해석해요?”
사황자는 멈칫했고, 아라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전에 선생에게 금기서화를 배우고 시중드는 법을 배울 때요, 다다도 함께 배웠거든요. 제가 조금만 잘못해도, 정말 아주 작은 잘못이라도 하면 사부는 바로 혼을 내셨어요. 얼마나 혼을 내시는지 몰라요. 그런데 다다는 아무리 잘못해도 꾸중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잘해주셨는데요. 한 번도 타박하지 않으셨어요. 한번은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선생에게 왜 그렇게 편애하는지 따졌죠. 선생 말이, 연향루를 키워야 하는 사람은 저지 다다가 아니라고요. 다다는 뭐가 되든 상관없지만, 저는 물건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사황자의 안색이 아라의 말과 함께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러나 아라는 그래도 부족한 듯이 천진난만하면서도 요염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왕야와 대왕야처럼요. 대왕야가 뭘 잘못하면 황상과 마마께서 엄하게 꾸중하시죠? 장자잖아요. 가업을 이어야 하니까요. 사왕야는 그럴 필요가…….”
“꺼져라!”
아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황자가 얼굴이 퍼레져서 고함쳤다. 아라는 시원스럽기 짝이 없게 침상에서 굴러 내려와 벌거벗은 채 옷을 들고 바깥 칸으로 달려나갔다.
바깥 칸에서 대충 옷을 걸친 아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물러가겠다는 인사는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왕야!’ 하고 불렀지만, 부르자마자 안에서 꺼지라는 고함이 다시 들렸다.
아라는 치맛자락을 들고 날렵하게 방에서 나와 단숨에 중문으로 달려갔다. 중문엔 마차도 없고 어멈도 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아라는 혼자 돌아가기로 했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됐어! 기분이 아주 좋아!
아라는 신이 나서 저택에서 뛰어나와 경쾌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상방 안 사황자는 갈수록 기분이 엉망이 되었다.
어릴 때 형님과 오 각로(閣老)에게 사서를 배우던 때가 떠올랐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배울 때 오 각로는 형님만 지켜봤다.
(※ 사마광의 저서.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이전까지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통치학의 교과서)
자기는 듣든 말든, 알아듣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그 일을 이야기했고, 아버지가 오 각로에게 하는 말을 밖에서 엿들었다. 그땐 무슨 말을 나눴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깨달았다. 오 각로가 했던 말은 오늘 아라가 한 말과 거의 똑같았다. 아버지는 그때 뭐라고 했더라? 잊었다.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때도 제대로 듣지 못했었다.
나중에 오 각로가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자치통감≫이 싫었다. 회삽하고 난해한 데다가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뿐이었다. 그 뒤로 오 각로의 수업을 듣지 않았던 것 같다.
사황자는 얼떨떨해져서 멍하니 있었다. 정말로 아라가 말한 대로일까?
아라의 말은 확실히 도리에 맞았다. 근래 겨우 깨달은 도리였다. 첫째의 가장 큰 우세와 그의 가장 큰 열세가 모두 첫째가 나이가 많아서라고 고서강이 말했었다. 세상 사람들이 첫째를 당연하게 후계자로 받아들였고, 옹알이할 때부터 누군가는 의식적으로 누군가는 무의식적으로 모두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가르쳤다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첫째를 언제나 자기보다 엄격하게 가르쳤다. 지금은 더 엄격하고. 그렇다면 두 사람 눈엔 첫째야말로 임가를 지탱하고 온 제국을 이어받을 아들로 여기는 것일까.
사황자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차가워져만 갔다.
아라는 승리의 희열과 뿌듯함으로 턱을 치켜들고 거리를 걸었다. 동십자 거리를 지나다가 전당포로 들어가 금귀걸이로 은자 한 냥과 동전으로 바꿔 나와서는 가장 먼저 당호로를 사 먹었다. 그리고 곧 매실즙을 사서 마시자마자 기름이 줄줄 흐르고 구수한 냄새가 나는 양꼬치를 발견하고는 침이 꼴깍 넘어가서 꼬치 두 개를 사서 먹었다. 배가 두둑이 부른 것이 너무 만족스러웠다.
연향루에 거의 다 왔을 때 소라(酥螺: 밀가루를 돌돌 말아 튀긴 빵)를 파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 봉지를 샀다. 봉지를 들고 걸어가면서 먹으면서 연향루가 있는 골목으로 막 돌아섰을 때, 위봉낭이 팔짱을 끼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 고개를 갸웃하고 그녀를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깜짝 놀란 아라는 막 입에 넣은 소라가 바로 목구멍에 걸려서는 목을 길게 빼고 힘을 준 후에야 힘겹게 삼켜냈다.
“봉, 언…… 니……!”
아라는 목을 몇 번이나 길게 빼며 힘껏 침을 삼키고서야 드디어 소라를 완전히 넘겼다. 그제야 숨도 쉬어지고 말도 순조롭게 나왔다.
“봉낭 언니, 왜 여기에 있어요? 우연이네요.”
“우연?”
위봉낭은 팔을 내려놓고 슬렁슬렁 아라 앞으로 와서 품에 안은 소라 봉지를 뒤적였다.
“우연이 아닌데. 네가 그 집 대문에서 뛰어나오느라 검은 고양이를 놀라게 했을 때부터 줄곧 봤는데? 오는 내내 내가 너 대신 난봉꾼 여섯 무리를 내쫓아주고 도둑 둘을 쫓아줬는데, 그래도 우연이냐?”
아라는 침을 삼키다가 목이 멜 뻔했다.
“봉, 봉낭 언니. 언니…… 왜…… 말을 안 하고……. 나는, 그 뭐냐…….”
아라는 웅얼거렸다. 자기가 분명 뭘 잘못했음을 직감했지만, 뭘 잘못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봉낭이 사왕야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 리가 없지! 그것 말고 뭘 또 잘못했지?
위봉낭은 아라가 품에 안은 봉지를 뺏어서 소라를 입에 넣었다.
“춤을 출 듯이 걷더구나? 꽤 즐거운 모양이지? 엉? 자, 이야기해 보렴. 무슨 일로 그렇게 즐거운 거니? 사왕야가 널 저택으로 들인다든?”
아라는 위봉낭이 화도 내지 않고 소라도 가지고 가서 먹는 걸 보고 순간 안도해서 대답하기 전에 혀부터 찼다.
“쯧! 그런 일이 있었으면 울어야죠. 기뻐할 리가 있어요? 저는 그냥…….”
아라는 말을 다 하기 전에 정신부터 차렸다. 영 칠야가 사왕야를 잘 모시라고 분부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사왕야가 펄쩍 뛸 정도로 화를 돋우지 않았나. 영 칠야가 분부한 일은 조금도 잘못되면 안 된다고 봉낭 언니가 그랬다. 아까 얼마나 잘못했었나. 음, 그러니 사왕야 화를 돋운 건 절대로 말해선 안 돼!
“셈은 다 끝났어? 아직이야? 다 끝났으면 이어서 말하고.”
위봉낭은 소라 두 개를 연달아 먹고는 눈알을 굴리며 긴장한 얼굴로 계속해서 속셈을 굴리는 아라를 삐딱하게 바라봤다.
“그게, 그 뭐냐…….”
아라는 왼손을 휘두르고 또 오른손을 휘둘렀다.
“언니도 참. 셈할 게 뭐가 있어요. 나는 있는 대로 말해요. 사실 별거 아니에요. 정말로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라는 헛웃음 치며 위봉낭 곁을 돌아가려고 슬금슬금 움직였다. 위봉낭은 두어 개 남은 소라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는 아라를 따라갔다.
“잘 들어. 기회를 한 번 더 준다. 딱 한 번이야. 말할래, 말래?”
아라의 등골이 순간 뻣뻣해졌다. 그녀는 뻣뻣하게 빙글 돌아서 위봉낭을 마주 봤다. 그런데 눈은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흔들렸다.
“정말로…… 별것 없어요. 언니도 참. 나는…….”
“말하지 않겠다 이거지? 그럼 좋아.”
위봉낭이 소매를 말아 올리자, 아라는 순간 당황했다.
“언니, 언니! 아이고, 언니.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정말로…… 정말로 말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사실 별일도 아니에요. 그냥 한담을 나눴어요. 다 한담이었어요. 쓸모 있는 건 하나도 없었어요!”
“말해!”
위봉낭의 그 짧은 말에 살기를 느낀 아라는 순간 몸이 쭈그러들어서 곧바로 낱낱이 다 쏟아놓았다.
“정말로…… 다 한담이었어요. 사왕야가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매우 기분이 좋다고 하면서 기녀들은 다 시중을 잘 든다고, 저택엔 저처럼 눈치 빠르고 분위기를 아는 사람이 없다길래 제가 그게 다 제가 사왕야에게 마음이 있어서라고, 마음이 있으면 분위기를 맞추고, 마음이 없으면 분위기를 못 맞춘다고…….”
위봉낭의 눈이 저도 모르게 휘둥그레졌다.
이 계집애, 정말로 사고 치는 방법도 다양하네. 아라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황자 저택의 여인들은 모두 그에게 마음이 없다는 뜻 아닌가. 정말이지 사고 치는 재주 대단하구나!
“나중에 사왕야가 부모의 은혜 어쩌고 하면서 그 뭐냐…… 부모님이 자기를 매우 아낀다길래…….”
아라는 그녀와 사황자가 나눈 이야기를, 사황자는 뭐라고 했는지 그녀는 또 뭐라고 했는지 거의 한 글자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위봉낭은 아라를 노려보다가 한참 만에 겨우 숨을 내뱉었다.
“너 미쳤니?”
“내가 생각해도 미쳤던 것 같아요.”
아라는 목을 움츠렸다. 정말 미친 게 맞는 듯했다.
“돌아가.”
위봉낭이 굳은 얼굴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연향루 뒷문을 바라보며 턱짓했다.
“봉낭 언니!”
제가 한 일을 다 털어놓은 아라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냥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한 거예요. 맞아요, 하면 안 될 말이었죠. 그게…….”
“돌아가!”
위봉낭이 아라를 달랑 들어서 후각문으로 던진 다음 문을 닫고 돌아섰다. 아라는 문틈에 달라붙어서 위봉낭이 멀리 사라지는 걸 보고 돌아서 문에 기댄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은 후련하긴 후련하고 신도 났는데 이어서 위봉낭이 영 칠야에게 보고하고 나면 울 일만 남았으리라.
위봉낭이 정북후부로 돌아갔을 때, 영원은 이미 목욕하고 탁자에 앉아서 경을 베끼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위봉낭의 보고를 들은 영원은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웃다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를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라 그것이 화가 나니 사황자 속 터질 말을 골라서 한 모양이로군. 이번엔 꽤 영리하게 하는 말마다 정곡을 찔렀고.
“칠야, 분부를 다시 할까요? 전에 칠야께서 분부한 말이 있어서 오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위봉낭이 허리를 숙이고 분부를 기다리자 영원이 손을 내저었다.
“됐다. 아라는 생각도 짧고 뭘 감추지도 못한다. 그냥 한번 휘젓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건…….”
영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키는 대로 하게 두어라. 자주 일을 망치지만, 가끔 신통한 짓도 하는구나. 천 냥을 가져다주어라. 곧 새해이니 새 옷이라도 지어 입으라고 해라.”
“예.”
위봉낭은 은자를 받아서 아라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곧바로 돈을 가져다주었다.
어둠이 내린 후, 관아에서 나온 계 천관은 그 어두컴컴한 작은 골목으로 다시 들어갔다. 골목 끝에서 다루의 후원으로 들어가 같은 독채로 들어갔더니 진왕이 강환장을 데리고 벌써 와 있었다.
계 천관이 들어가자 강환장은 일어서서 예를 갖췄고, 진왕은 이번엔 일어서지 않고 앉은 채 엉덩이만 살짝 들어서 예를 표했다.
계 천관은 진왕에게 깊이 장읍하고 강환장에게 공수하며 답례했다. 그는 진왕의 아랫자리에 앉아서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말씀드릴 중요한 일이 있어 왕야를 모셨습니다.”
“말씀하세요, 계 천관.”
진왕이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기울였다. 강환장은 계 천관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차를 마셨다.
“왕야께서 명절 임무를 받으셨다고 무턱대고 일만 해선 안 됩니다. 솔직히 궁에서 명절을 보낸 건 이미 백 년 가까이 된 일입니다. 모든 규칙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지켜보든 말든 잘못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쪽으로는 신경 쓸 것 없고, 오로지 자주 궁에 드나들면서, 이번 임무를 한다는 명목으로 황상께 자주 보고드리고, 귀비께 자주 보고하세요. 황상과 귀비께서 왕야의 효심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이번 임무의 중점입니다.”
계 천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매우 알기 쉽고 명백하게 이야기했다. 명백하지 않으면 진왕이 알아듣지 못하거나 알아듣고도 못 알아들은 척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