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납팔의 술
“왕비, 어떡해요.”
도요가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해 보자.”
곽씨는 초조함으로 손을 쥐어짜며 방 안을 서성였다.
어떡하나. 대왕야가 오늘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이번 위기를 넘긴 건지 아닌지 조마조마하고 심하게 불안했다. 생각할수록 넘어가지 못한 듯했다. 거기에 조씨가 고자질까지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 모른다.
어떡하지? 조씨에게 봐달라고 해? 봐줄 리가 있나! 원하는 걸 주겠다고 약속해? 원하는 게 뭐가 있겠어. 원하는 건 바로 이 정비 자리인데…….
“왕비, 그러지 말고 중문에서 기다리세요. 적어도 조씨 혼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 막을 수 있잖아요.”
“맞아! 이상한 소리를 하게 둘 순 없지. 하더라도 내 앞에서 하라고 해.”
도요가 재빨리 두봉을 들고나왔고 두 사람은 다급하게 나가서 조씨가 대황자를 기다리는 난각으로 곧장 달려갔다.
난각 안, 한쪽엔 곽씨가, 다른 쪽엔 조씨가 앉아서 싸움닭처럼 서로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 노려본 지 한 시진 가까이 되었을 때 중문 어멈이 들어와 보고했다.
“왕비, 부인, 왕야께서 오늘 밤엔 바깥 서재에 주무시고 들어오지 않으신답니다.”
곽씨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고 조씨는 몹시 화난 얼굴로 벌떡 일어서서 곽씨를 향해 콧방귀를 뀌며 바람처럼 가버렸다.
곽씨는 가슴을 두드렸다. 오늘은 넘어갔다. 내일은……. 내일 일은 내일 이야기하자. 내 하루는 하루 버티면 하루 사는 삶인 것을.
자등 산장. 등화원 상방 창문에서 톡톡 소리가 났다. 당직인 수련이 얼른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가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창문에서 또 소리가 나자 수련이 힘껏 창문을 밀었다. 창밖에 있던 위봉낭이 화들짝 놀라며 상반신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뒤로 젖혔다가 순식간에 다시 똑바로 섰다.
“나다.”
수련이 목소리를 아주 작게 낮췄다.
“또 너니! 지금은 새벽이야! 삼경이라고! 왜 온 거야?”
“내가 또 온 건 아니고. 나는 볼일이 없다. 우리 나리가…….”
“낭자는 잠드셨어. 새벽이라고! 낭자가 주무실 땐 절대로 깨우면 안 돼. 이건 우리 태태가 하신 말씀이야. 돌아가.”
“낭자께 여쭤봐.”
위봉낭이 창문을 잡고 말했다.
“말했잖아. 낭자가 주무실 땐 절대로 깨우면 안 된다고. 깨우면 안 되는데 어떻게 여쭤? 너희 나리더러 나중에 오시라고 해. 이 시각에 이렇게 귀찮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수련이 위봉낭의 손을 떼어내려고 잡아당겼다.
“낭자 깨셨어. 가서 물어봐.”
위봉낭의 손을 수련이 떼어낼 턱이 있나.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봤어? 얼른 손 떼고 입 다물어. 우리 낭자 정말 깨시겠다.”
수련은 아까 창문을 열지 말아야 했다고 몹시 후회했다.
“숨결이 아까와 달라. 분명 깨셨어. 가서 여쭤봐. 너나 나나 일하는 사람이잖아. 너도 힘들겠지만, 나도 힘들다. 가서 한번 여쭤봐. 낭자가 주무신다고 만나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나도 돌아가서 보고할 수 있으니까.”
위봉낭은 지극히 나긋나긋 부드럽게 수련과 상의했다. 영 칠야를 따라 경성에 들어온 이래 갈수록 성격이 좋아진 셈이었다.
“알았어. 한 번 가 볼게. 낭자가 깨셨으면 여쭤는 볼게. 깨지 않았으면 이 손 치우는 거다. 창문 닫고 잘 거야.”
수련은 주저하다가 절충안을 찾았다.
“그렇게 해.”
위봉낭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낭자는 분명히 깼다. 그 정도도 착각할 정도라면 몇십 년 들인 공이 모두 수포가 되게.
이동은 정말 깨어있었다. 잠귀가 밝아서 위봉낭이 창을 두드릴 때 벌써 깼다. 수련은 살금살금 침상 가로 다가가 휘장 한 자락을 빼꼼 열고 울상을 지었다.
“낭자, 굳이 가서 여쭤보라고 해서요.”
“두꺼운 옷이랑 바닥 두꺼운 신발 가지고 오렴.”
이동이 일어나 앉았다. 이 시각에 찾아올 정도라면 분명 매우 중요한 일이리라. 아니면 특수한 상황이 생겼거나. 영원은 겉으로는 실없는 것처럼 굴어도 사실은 지극히 신중한 사람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으면 이 시각에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수련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촛불을 켜서 바닥에 두었다. 잠에서 깬 녹매가 들어와서 옷시중을 들고 머리를 올려주었다. 수련은 가장 두꺼운 털 두봉을 걸쳐주고 모자를 씌워주었다.
이동이 나가자 위봉낭이 깊숙이 장읍하고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데리고 월동문을 넘어갔다.
후원 화청 안, 영원이 한 발은 바닥에 디딘 채 다른 한 발은 난간에 올리고서 하늘의 초승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화청 중간의 돌 탁자에는 무언가 잔뜩 있는 듯했다.
영원은 이동이 온 걸 보고 난간에서 발을 내리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자고 있었습니까?”
“난 원래 일찍 자요.”
이동은 영원을 살폈다. 난간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들뜬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조금은 쓸쓸하고 적막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만나러 온 겁니다.”
겸연쩍은 듯한 태도에서는 은근히 미안함도 느껴졌다.
“오늘이 납팔이라 이야기 나눌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낭자 말고 도저히 사람이 없어서.”
납팔이 지나면 명절이 시작되고 출타한 사람들은 납팔 전후로 집으로 돌아가 명절을 보내게 된다.
이동은 마음이 약해져서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일찍 왔으면 우리 집 납팔 죽도 드셨을 텐데요. 지금은…….”
이동은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미 섣달 아흐레라서 납팔이 아니었다.
영원은 정말이지 조금만 잘해줘도 매우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몇 가지 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집안 법도는 납팔에 납팔 죽은 아침에 대충 먹으면 되고 저녁엔 술을 제대로 마셔야 합니다. 포도주를 가지고 왔는데, 같이 한 잔 하겠습니까?”
영원은 안으로 들어오는 이동에게 길을 비켜주었고 이동은 돌 탁자 옆 의자에 앉았다. 이 화청 안에 있던 돌의자는 진작 작고 정교한 팔걸이의자로 바꾸고 두꺼운 방석과 등받이를 두었다.
영원은 얼른 따라 들어가서 돌 탁자 위에 잔뜩 쌓인 기름종이 봉투를 하나씩 열어서 늘어놓았다. 이동이 고개를 내밀고 유심히 봤더니 썰어놓은 양고기 한 봉지, 졸임 돼지 허벅지 한 봉지, 졸임 닭 한 봉지, 양 백장(白腸: 쌀을 넣어 하얗게 만드는 순대) 한 봉지, 메추라기 튀김 한 봉지, 그리고 볶은 은행, 단 연근, 대추, 앵두 졸임 같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음식이 섞여 있었다. 뒤에 음식은 아마도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일 듯했다.
탁자 한가득 늘어놓은 음식 모두 식어서, 은행이나 단 연근은 그래도 괜찮은데 고기 종류는 하얀 기름이 둥둥 떠 있어서 보기만 해도 입맛이 떨어졌다.
“이걸, 먹으려고요?”
이동은 술을 꺼내고 또 어디서 꺼낸 건지 수정잔 두 개를 들고 있는 영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원은 고개를 내밀고 탁자 위의 물건을 훑어봤다.
“내가 골랐죠. 어때요? 다 맛있는 겁니다!”
“다 식었잖아요.”
이동은 콕 집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식은 것도 아니죠.”
영원이 얼굴을 들이밀고 보고는 저쪽으로 굴러간 돼지 허벅지 살을 입으로 쏙 넣었다.
“얼지 않았으면 식은 게 아니고, 설령 얼었다고 해도 괜찮아요. 입에 넣고 있으면 금방 녹습니다.”
이동은 고기를 집어 먹는 영원을 빤히 바라봤다. 느글느글해 보이는 졸임 허벅지살을 아주 맛있게 먹는 영원을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위봉낭은요?”
영원이 얼떨떨해하다가 손을 휘두르자 위봉낭이 귀신처럼 스르륵 이동 뒤에서 튀어나왔다.
“가서 녹매와 수련을 불러와.”
이동이 분부하자 위봉낭이 영원을 살피고는 그가 눈을 내리까는 걸 보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왜요? 입맛에 안 맞습니까?”
영원은 눈치가 아주 빠른 사람이었다.
“이 뜨락에 작은 주방이 있어요. 있을 건 다 있답니다. 녹매는 음식 솜씨가 그럭저럭 괜찮아요. 안주 몇 가지 준비하라고 할게요. 그리고 이 술.”
이동은 영원이 벌써 반 잔 따른 포도주를 가리켰다.
“이런 날씨에 이렇게 찬술은 못 마셔요. 수련에게 황주를 데워달라고 하려고요.”
“그럼 나도 따듯한 황주를 마셔야겠군요. 그 김에 이것들도 좀 데워주세요.”
영원이 전혀 체면 차리지 않고 탁자 위를 가리켰다.
“이 뜨락에 주방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챙겨오지 않았을 텐데.”
수련과 녹매가 금세 나타나서 탁자 위 먹을거리를 치워서 주방으로 들고 갔다. 수련은 다시 돌아와 탁자를 깨끗이 닦고는 위봉낭의 도움을 받아서 화로와 작은 홍니로를 들고 와서 화청 구석에 작은 찻상을 차렸다.
녹매는 곧 작은 홍동 솥을 올리고는 얇게 뜬 회, 양반와쟁사(凉拌萵箏絲: 상추채 무침), 무조림 같은 몇 가지 안주가 담긴 찬합, 뽀얗게 우린 양고기 탕도 올렸다.
수련은 은주전자에 담긴 황주를 들고 와서 생강 채와 당을 넣었다. 이동이 술을 데우는 작은 니로를 자기 옆에 두라고 가리켰다.
“여기에 놓아. 내가 데울 테니 너희는 돌아가.”
“술이 부족하다. 두 동이 더 가지고 오너라.”
영원이 얼른 따라 분부하자 수련이 뾰로통하게 흘겨보다가, 이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련도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위봉낭을 찾았다. 녹매와 함께 들어도 버거운 술동이였다. 수련이 돌아보는 걸 본 영원이 즉시 손을 들어 위봉낭에게 분부했다.
“같이 가서 술 가져오너라.”
녹매는 생강 채를 가늘게 한 접시 썰어놓고 당괴(糖塊: 덩어리 상태의 당)를 담은 작은 상자도 곁에 가져다주고 수련과 함께 돌아갔다.
영원은 냄새를 맡고 음식들을 훑어보면서 연신 감탄했다.
“낭자의 시녀들, 다 좋은 아이들이군. 분별도 있고 이렇게 음식 솜씨도 좋고. 잔이 좀 작으니 난 이걸 쓰겠습니다.”
영원은 수련이 가지고 온 작은 도자기 잔을 한쪽으로 밀어두고 자기가 가지고 온 수정 잔을 이동 앞에 놓았다. 이동은 술이 거의 데워진 걸 보고 주전자를 들어 잔을 채워주고 자기 잔도 반쯤 채웠다.
영원은 이동을 향해 잔을 들어 보이고는 고개를 젖혀 잔을 비웠다.
“좋다!”
그는 젓가락과 그릇을 들고 솥에서 고기를 잔뜩 꺼내서 후후 불면서 몇 입 만에 다 먹고는 다시 채우고 또 다 먹었다. 그러고는 술을 따라 달라는 듯 잔을 이동 앞으로 내밀었다.
영원은 고개 숙인 채 젓가락을 놀리다가 솥이 거의 바닥이 보이고서야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배를 두드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왜 굶은 거예요?”
이동은 조금 안쓰러운 듯 물었다.
“오늘…… 아, 어제군. 어젯밤에 큰일이 생겨서. 탕 한 그릇 더 마십시다.”
영원은 양고기 탕을 담아서 맛을 보더니, 마침맞게 식은 탕을 몇 입 마시고 하던 말을 이었다.
“어제 대황자가 갑자기 대상국사에 가더군요.”
이동은 계속 말하길 기다리며 그를 바라봤다. 영원은 술잔을 다시 내밀다가 은주전자가 빈 걸 보고 일어서서 술동이를 들어 뚜껑을 따서는 주전자에 부었다. 이동은 생강과 당을 넣고 다시 데웠다.
“대황자가 대상국사에 갔어요. 그리고요?”
“그리고는 돌아갔죠.”
이동이 참지 못하고 묻는 말에 영원이 멈칫하다가 깨달은 듯 웃었다.
“내가 말한 큰일이 바로 이겁니다. 대황자가 혼자 대상국사에 가서 한 시진 넘게 있다가 나온 거.”
이동은 어이없는 듯 영원을 바라보는데, 영원은 춤추는 불빛과 불 위에 반짝이는 은주전자를 바라봤다.
“내가 대황자를 1년 가까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스스로 사찰에 간 적이 없어요. 신귀 같은 건 믿지 않는 사람인데, 엊저녁에 왜 별안간 대상국사에 갔을까요? 게다가 한 시진 넘게? 사찰에서 다른 사람을 들이지 않고 혼자서 지장보살 앞에 한참 앉아 있었습니다. 왜 대상국사에 갔을까요? 왜 멍하니 지장보살 앞에 앉아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