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재수 옴 붙은 곽씨
정씨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나서서 곽씨와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손씨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감동해서 눈물을 홈치는 주 귀비를 바라보며 입가에 맴도는 말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여기서 길게 이야기해 봐야 귀비의 기분만 거스를 것이다. 됐다, 됐어. 이렇게 큰 기회를……. 됐다, 됐어!
손씨는 매우 마음 아파하며 원망 가득한 얼굴로 정씨를 노려봤다. 물어 버리고 싶었다. 정씨, 저 나쁜 년은 매번 이러지. 어떻게 이토록 파렴치하고 위선적일 수 있을까!
“이것 좀 봐라. 사왕야는 집안을 잘 다스린다고 내가 그러지 않았더냐. 손씨, 정씨, 모두 이렇게 잘 가르쳤구나. 얼마나 너그럽고 얼마나 선량하니. 얼마나 남을 위하느냐! 곽씨, 너는 무엇이냐! 멀쩡한 대가아를 네가 다 망쳐놓았구나! 내 정원에서 물을 뿌려? 됐다, 됐어.”
주 귀비가 모진 얼굴로 손을 저었다.
“손씨와 정씨가 널 탓하지 말라고 하니 나도 여기까지 하마. 대체 무슨 마음을 품고 그런 짓을. 애초에 내가 눈이 멀었구나. 어쩌다가 이런 며느리를 들었을까. 멀쩡한 대가아가 너 때문에 물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짓을 해? 심보가 어떻게……. 됐다. 그만하자. 돌아가서 잘 생각해라. 잘 들어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곽씨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주 귀비가 같은 말을 쳇바퀴 돌 듯이 족히 반 시진 가까이 반복하는 걸 들었다. 주 귀비는 입이 다 마를 정도로 호통치다가 이를 갈며 분부했다.
“뭘 아직 꿇고 있는 것이냐? 어서 돌아가라! 잠시도 더 너를 보고 싶지 않구나!”
곽씨는 일어서려다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뒤로 물러나서 이를 악물고 겨우 일어났다. 그녀는 다리를 덜덜 떨면서 무릎을 구부려 예를 올리고는 바늘로 찌르는 듯이 아픈 두 다리를 끌고 장녕궁에서 나가서 천천히 선덕문을 나와 왕부로 돌아갔다.
심복 시녀 도요가 마차에서 곽씨의 다리를 주무르며 나지막이 고했다.
“왕비, 제가 밖에서 정 왕비의 시녀 예주하고 이야기했는데 정 왕비가 꽃을 꺾어서 돌아올 때 입구에서 꽃병의 물을 부었답니다. 시녀가 다른 시녀의 치맛자락을 밟았는데 두 사람이 안고 있던 꽃병의 물이 다 쏟아졌대요. 우리보다 더 많이 쏟았을 거예요.”
“똑똑히 들은 것이냐?”
곽씨가 순간 허리를 세우고 물었다. 도요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예. 똑똑히 들었어요. 손씨가 돌아오기 전인데 예주 치맛자락이 홀딱 젖은 걸 제가 봤어요. 그래서 물었더니 그렇게 말한 거예요. 그 치맛자락, 물에 젖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어쩐지…….”
곽씨는 후회되고 화가 나서 마차 벽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정씨의 표정이 이상한 걸 봤었는데 그쪽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 어리석었구나. 정말로.
곽씨가 중문에서 마차에서 내렸을 때 조씨의 마차도 뒤따라 중문 안에 멈췄다. 조씨는 마차에서 내려서 근심 가득한 곽씨를 지나치며 콧방귀 뀌었다.
“대왕야 체면은 세워주지도 못하고 사고만 치기는. 흥! 쓸모없기는!”
곽씨는 휙 고개를 들고 분노한 눈으로 조씨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거처로 돌아온 곽씨는 화항에 앉았다. 마실 것도, 먹을 것은 더더욱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가을 처형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대황자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대황자의 성격이 얼마나 포악한지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올라 걷어차는 대황자의 발길에 걷어차여 죽을지도 모른다.
대황자는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고, 곽씨는 대황자를 본 순간 내심 살짝 안도하며 속으로 불경을 읊었다. 운이 돌이키지 못할 만큼 나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대황자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보다 훨씬 온화해 보였다. 부디 심하게 화를 내지 않기만 바랐다.
“왕야, 고할 일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어요.”
대황자가 묻기 전에 곽씨가 먼저 대황자 앞에 무릎 꿇고 오늘 장녕궁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마마께서는 손씨가 넘어진 것이 제가 물을 뿌려서라고 생각하세요. 왕야, 물을 뿌린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정씨예요. 손씨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제가 쏟은 물 때문에 넘어진 게 아니라고요. 손씨가 봤…… 손씨가 똑똑히 그렇게 말했어요. 자기가 넘어진 건 누가 일부러 물을 뿌려서라고요. 누군가 물을 일부러 뿌린 다음에 티 나지 않게 매끈하게 닦아 놓아서 넘어졌다고요. 손씨가 두 번이나 제가 아니라고 했지만…….”
거기까지 이야기한 곽씨는 대황자가 아직 걷어차지 않는 걸 보고 차츰 마음이 놓여서 말이 더 순조롭게 나왔다.
“손씨가 먼저 회임했으니, 아이가 태어나면 사왕야의 장자가 됩니다. 정씨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정씨는 손씨를 해치고 싶었던 거예요. 아이가 떨어지길 바라고요. 손씨가 똑똑히 말했습니다. 왕야, 제가 손씨를 해치는 게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손씨를 해쳤다가는 사왕야가 왕야를 원망하기밖에 더 하겠어요? 제가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왕야에게 무슨 이득이 있고요. 해롭기만 하고 이득은 하나도 없어요. 분명 정씨의 짓인데 마마께서…… 마마께서 잘못 생각하신 거라고 말씀드릴 순 없었어요. 제가 손씨를 해친 거라고 마마께서 단정하셔도 저는 변명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정말로 아니에요. 왕야…….”
곽씨는 대황자의 표정을 살피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웬일인지, 대황자의 얼굴은 전에 본 적 없이 평온했다.
“일어나시오. 울긴 왜 우나. 희한할 게 무어라고. 이런 일은 내가 당신보다 더 많이 겪었소. 됐소. 길게 이야기할 것 없소. 당신 잘못이 아닌 걸 알아.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지. 흥!”
대황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연신 콧방귀를 뀌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매우 날카로웠다.
“왕야?”
곽씨는 얼떨떨해졌다. 대왕야가 오늘은 너무나 이상했다.
“아무 일 없으시지요?”
“없소. 내가 무슨 일이 있겠소. 그저 확실히 알았을 뿐이요. 마음속에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마음이 기우셨군. 당신은 이만 가서 쉬시오. 나는 좀 나갔다 오겠소.”
대황자는 일어서서 곧장 밖으로 나갔다. 곽씨는 멍하니 방 안에서 서 있었다. 한참을 서 있어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왕야가 오늘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반 시진 후, 대황자가 대상국사에 갔다는 소식이 가장 먼저 영원의 귀에 들어왔다.
누구와 납팔 죽을 함께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나 고민하며 저택에 있던 영원은 유월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났다.
대황자의 성격은 황상과 비슷했다. 평소에 가는 곳이 정해져 있고 낯선 곳엔 거의 가지 않았다. 영원이 그를 지켜보기 시작한 이래 대상국사에 간 건 처음이었다.
“대왕야가 전에 간 적 없는 곳에 가면 곧바로 보고하라고 하셔서…….”
영원이 유월의 설명을 무질렀다.
“잘하였다! 눈을 떼지 말고 지켜봐라! 대상국사에서는 일각에 한 번 보고해라. 위봉낭을 불러라. 절대로 들켜선 안 된다. 무얼 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얼 봤는지, 표정은 어땠는지,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좋다. 어서 가라!”
영원의 모습에 유월은 순간 들떴지만 애써 들뜬 마음을 억누르고는 대답하고 물러나서 위봉낭을 불러 대상국사로 직행했다.
대상국사에서의 일은 일각마다 한 번씩 전해졌다.
사찰 안으로 들어간 대황자는 지객승 무지를 상대하지 않았고, 청공 큰스님이 맞이하러 나왔는데도 말을 나누지 않았고 함께 있지도 않았다.
대황자는 대웅보전에 들어가서 한 바퀴 돌고 관음전으로 향했다. 다시 나와서는 지장전에 들어갔고, 지장보살 앞에 일각 정도 서 있었다.
여전히 지장보살 앞에 앉은 대황자는 고개도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대황자는 지장보살 앞에 거의 한 시진 무릎 꿇고 있다가 그제야 일어서서 향을 달라고 했다. 지장보살 앞에 향을 피우고 반각 정도 웅얼거리며 기도하는데, 다소 격분한 듯한 표정이었다.
대황자는 대상국사에서 나와서 선덕문으로 향하더니, 선덕문 앞에서 반각 정도 서 있었다.
그리고 왕부로 돌아갔다.
대황자가 왕부로 돌아간 후, 영원은 방 안을 마구 서성거렸다. 흥분해서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대황자는 사찰 안에 발을 들인 적이 없지. 아니, 그건 아니지. 정확히는 스스로 원해서 사찰에 발을 들인 적이 없다고 해야 하지. 전에는 국가 대례가 있거나 효도 때문에 명을 받고 간 것이라면, 스스로 찾아간 건 이번이 처음이지.
왜 대상국사에 간 것일까?
세상의 평범한 사람이 언제 가장 신불에게 빌고 싶은지 아느냐고, 곤란하고 자책할 때라고 복백이 그랬었다. 대황자는 분명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대상국사에 간 이유가 곤란함 때문일까, 아니면 자책일까?
둘 다일까?
곤란함. 그가 얼마나 곤란한지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의 곤란함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렇지. 그동안 그의 곤란함을 온 세상 사람이 다 보았지만,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다. 혹은 자각하고 싶지 않았거나. 지금은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곤란함을 의식하고 곤란함을 마주했다. 그런 다음엔? 어떻게 할까?
나라면 어떻게 할까?
아니지, 나와 비교하면 안 되지. 그 무지렁이는 어떻게 할까?
영원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쉴 새 없이 두드리며 이리저리 서성였다.
어떻게 할까?
대황자의 성격으로는 분명 여기서 그만두고 운명에 순종할 리가 없다. 손 놓고 포기할 리도 없다.
그럼…… 상대를 없앨 결심을 한 것인가?
이미 죽이려 했었다. 어쩌면 한 번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번엔…….
그렇지. 지난번엔 아직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때가 아니었지. 내가 몰랐을 뿐, 어쩌면 그때 행동하기 전에도 이렇게 깊은 밤에 대상국사에 갔을지도 모른다.
대황자는 성격이 급하다. 결정을 내린 이상 며칠도 기다리지 못 하리라. 어수선한 연말연시라 분명 기회가 많다.
“유월!”
영원이 크게 부르자 유월이 들어왔다.
“들어라. 대왕야를 바짝 지켜봐라. 평소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바로 기별해라. 어느 때든 상관없다!”
영원의 심각하고 매서운 목소리에 유월은 가슴이 서늘해져서 공손히 대답했다.
대황자부, 측비 조씨는 대황자가 평온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저택에서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야말로 귀를 의심했다.
“똑똑히 본 것이냐? 그 천한 것이 무릎을 꿇었어? 울면서 이야기해? 오늘 일을 이야기했다고?”
“예. 소인이 일부러 가까이 가서 들었습니다. 두어 마디 들었는데 오늘 일을 이야기한 것이 맞습니다. 들키면 왕야가 크게 화를 낼까 봐, 두어 마디만 듣고 오늘 일임을 확신한 다음엔 곧바로 돌아왔습니다.”
어멈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왕야가 화를 내지 않았어? 말도 안 돼.”
대황자의 성격이 어떤지, 조씨는 곽씨보다 더 잘 안다.
“예. 줄곧 평온하셨어요. 나중엔…….”
어멈도 불가사의한 얼굴로 말을 멈췄다.
“심지어 웃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엔 왕부에서 나가셨고요. 왕비는 매우 기뻐 보였고요.”
“천한 것!”
조씨는 화가 나서 머리가 다 아팠다.
“분명 물을 쏟아서 손씨가 넘어진 건 말하지 않은 거야. 손씨 그것도 나쁜 년이지! 왕야가 화를 내지 않았다고? 흥. 뭐라고 말한 건지 아직 모르는걸. 이대로 넘어가게 둘 순 없지. 가 봐! 가서 왕야가 돌아오시면 즉시 보고……. 아니야, 됐어. 내가 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어. 그 천한 것이 무슨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왕야께 직접 말씀드려야 해. 왕야까지 해치려고. 없애진 못해도 껍질은 벗겨 놔야지!”
조씨는 두봉을 입고 시녀, 어멈을 거느리고 중문과 가장 가까운 난각으로 달려가서 대황자가 돌아오길 목을 빼고 기다렸다.
곽씨 그 천것의 껍질을 벗겨 버릴 것이다!
조씨가 심복이 있듯이 곽씨도 심복이 있었고, 조씨가 거처에선 나오기 무섭게 누군가 곽씨에게 보고했다. 조씨가 중문과 가장 가까운 난각에서 끝까지 기다릴 기세로 앉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곽씨는 조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자신이 멀쩡한 걸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왕야가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고자질해서 끝장내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