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물 뿌리기
곽씨는 하북 출신이고 하북에서 자라서 하북 말씨를 썼다. 대황자는 첫날 그 말투를 비웃었다. 측비 조씨는 소주 사람으로 대황자가 그녀의 나긋나긋한 말씨를 매우 좋아한 데다가 조씨는 체면이 깎이는 것도 감당하는 사람이라 대황자가 그녀의 시녀 수씨를 마음에 들어 하자 바로 수씨를 대황자의 침상으로 보냈다. 그 후로도 종종 수씨를 불러서 함께 대황자 시중을 들기도 했다. 그녀는 눈치가 빨라서 대황자의 총애를 받았고 대황자부의 모든 일에서 곽씨를 앞섰다.
조씨는 곽씨를 뒤따라가며, 곽씨가 주 귀비에게 타박받은 것을 어떻게 대황자에게 말할지 궁리하느라 바빴다.
매화 숲으로 들어가자마자 곽씨는 바로 마음에 드는 가지를 발견했지만 바로 꺾으라고 명령하지 못하고 웃음 띤 얼굴로 조씨를 바라봤다.
“자네가 보기엔 저 가지가 어떤가?”
“마마께서 형님이 직접 고르라고 하셨잖아요. 전 그냥 도우러 온 거예요. 제가 좋은지 아닌지 이야기하면 제가 형님 대신 결정을 내리는 거잖아요. 그럼 마마의 의지(懿旨: 황태후와 황후의 명령)를 거역하는 것이게요.”
곽씨가 재수 없는 꼴을 당하길 간절하게 바라는 조씨는 말이 도우러 나왔지, 발을 걸면 모를까, 조금도 도울 생각이 없었다.
곽씨는 재빨리 얼굴을 돌렸다. 눈물이 글썽였지만 흘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매화 가지를 자르라고 내시에게 분부하고는 눈을 감는 척, 그렁그렁한 눈물을 지웠다.
매화 가지를 꺾고 온실에서 활짝 핀 꽃을 골라서 채운 꽃병을 시녀와 내시에게 들리고 곽씨와 조씨는 장녕궁으로 돌아갔다.
장녕궁이 가까워졌을 때, 대황자 곽씨가 걸음을 늦추고 조씨에게 가까이 다가가 주변을 둘러보고 나직이 물었다.
“마마께서 자네는 안목이 좋다고 여러 번 칭찬했잖은가. 이 꽃들이 어떤가 봐주게.”
조씨는 곽씨를 삐딱하게 바라보며 코웃음 쳤다.
“형님, 그렇게 추켜세우지 말아요. 형님은 정비, 윗사람이에요. 제가 아무리 안목이 좋대도 형님만큼 좋겠어요. 감당하지 못할 말이네요.”
“우리가 왕부에서 나가면 남들은 똑같이 왕부 사람으로 본다네. 다 대왕야의 식솔로 여기지. 꽃이 좋아서 마마께서 기뻐하시면 대왕야도 체면이 서고, 우리 왕부도 체면이 서지만, 행여 꽃이 별로라서 마마께서 언짢아하면 대왕야도 언짢아하실 거고, 그럼 우리 왕부는…….”
“어머나!”
곽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씨가 손수건을 휘두르며 싸늘하게 무질렀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절 협박해요? 제가 우리 왕부의 얼굴, 대왕야의 얼굴이 될 주제가 되나요. 형님, 큰일 날 소리 하지 말아요.”
조씨는 말을 마치고 곽씨를 향해 소매를 휘두르고는 안쪽으로 물러나며 길을 비켜주었다.
“형님, 역시 앞장서는 게 좋겠어요. 나란히 걷는 건 법도에 맞지 않아요. 이렇게 큰 법도를 어기면 안 되죠.”
곽씨는 벌겋던 얼굴이 새하얘져서 다급하게 걸어 나갔다. 화가 나서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두 사람 뒤를 따르던 나이 든 내시 하나는 안쓰러운 듯 곽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곽씨의 시녀 도요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도요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곽씨를 따라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곽씨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공손하게 숙인 내시를 힐끔 돌아왔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내시들이 든 꽃병 중에서 가장 큰 홍매로 골라서 품에 끌어안았다.
주 귀비를 오래 모신 내시가 말하길 귀비는 아랫사람이 직접 효도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꽃을 직접 고르고 직접 가지를 꺾어서 직접 물을 담고 꽃을 꽂아 직접 안고 가서 주어야 한다고.
모퉁이만 돌면 장녕궁이 보일 때 곽씨는 조심스럽게 꽃병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겼다. 꽃병 자체도 무거운데 물까지 가득해서 곽씨가 안고 가기엔 조금 버거운 무게였다.
정원 계단 앞에 도착한 곽씨는 이제 거의 다 왔다 싶어서 살며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양손으로 꽃병을 들고 있어서 스스로 치맛자락을 잡을 수가 없었다. 도요가 서둘러 다가와서 치맛자락을 잡아주었다. 두 사람이 계단으로 오르려는데 도요가 뭘 밟았는지 벌렁 넘어지다가 곽씨와 부딪쳤다. 곽씨는 비틀거리면서도 꽃병을 단단히 잡았고 넘어지지도 꽃병을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다만 병 안에 든 물과 매화가 모두 바닥에 쏟아졌다.
도요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벌떡 일어나 매화 가지를 주웠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매화 가지는 무사했다. 매화 꽃잎이 서너 잎 떨어지긴 했지만 전혀 티 나지 않았다.
곽씨의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위험했지만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도요가 매화를 꽃병에 꽂고 다른 꽃병 물을 조금 옮겨 부은 후 곽씨는 다시 꽃병을 안고 조심스럽게 계단으로 올랐다.
사황자비 정씨는 대황자비 곽씨보다 먼저 돌아왔지만 사황자 측비 손씨는 몸이 무거워서 걸음이 느린 바람에 가장 늦게 장녕궁으로 돌아왔다.
손씨는 건장한 시녀를 붙들고 두봉을 싸맨 채 걸음걸음 느리게 걸었다. 장녕궁 입구에 도착했을 때, 시녀가 먼저 청석로 한쪽에 물이 뿌려져 있고 이미 얼음이 얼어서 반짝이는 걸 봤다. 매우 눈에 띄는지라 곧 손씨도 봤고 시녀를 붙잡은 채 조심스럽게 옆으로 피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손씨가 걸음을 내디뎠을 때 바닥이 이상할 정도로 미끄러웠다. 시녀가 꽥 고함치며 미끄러졌다. 두 다리가 계속 미끄러져서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고 손씨는 발아래가 미끄러운데 손은 지탱할 곳을 잃어서 날카롭게 고함치면서 시녀와 마찬가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고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죽 미끄러지며 상반신이 뒤로 기울어 벌렁 넘어졌다.
장녕궁 문 앞에 놀란 고함이 울려 퍼졌다.
장녕궁 안, 회임한 손씨가 넘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주 귀비는 태의를 부르라고 고함치며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어멈들이 이미 허둥대며 손씨를 부축해서 일으켰고, 달려온 주 귀비의 고함 속에 서둘러 정전 안으로 옮겼다.
손씨는 양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목소리 높여 울어댔다. 사황자비 정씨는 손씨의 하반신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피가 흐르는 걸 보고 싶었다. 반드시. 많이 흐를수록 좋다. 많이 흐를수록!
대황자비 곽씨는 주 귀비를 바짝 쫓아갔다. 주 귀비가 손씨가 실려 들어오는 걸 보고 돌아서서 정전으로 돌아가는데, 곽씨는 입구 쪽으로 다가가다가 자기가 들어오다가 넘어질 뻔해서 물을 쏟은 곳을 무심결에 바라봤다.
손씨가, 저기에서 쓰러진 걸까?
대황자 측비 조씨는 멍하니 정원 입구를 바라보는 곽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흥분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드디어 곽씨를 완전히 넘어뜨릴 기회가 왔다!
태의가 매우 빠르게 나타나서 진맥했다. 사황자 측비 손씨는 심하게 넘어진 게 맞지만 태맥은 여전히 안정적이었다. 주 귀비는 안도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손씨가 무사한 걸 확인한 태의가 안신탕을 처방해주고 물러갔다.
손씨는 더 심하게 울어댔다.
“다 제 잘못이에요. 회임하는 게 아니었어요. 제 잘못이에요. 마마의 홍복 덕분에 이번엔 무사히 넘어갔지만, 다음엔 어떻게 될지. 다음에는 피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마마, 차라리…… 마마께서 나서주세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배 속에 아이를 위해서랍니다. 사왕야의 혈육, 마마의 손자예요. 마마, 마마께서 나서주세요. 마마의 궁문 앞에 얼음이 얼다니요. 마마도 아시다시피, 저는 사왕야의 혈육을 품은 후로 혼자 걸은 적도 없어요. 길에 왜 얼음이 있었을까요? 어떻게 이렇게 미끄러질 수 있을까요? 마마…… 마마, 부디 확실히 조사해주세요.”
손씨는 침상에 엎드린 채 주 귀비를 향해 쉴 새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애절한 얼굴로 통곡하는 모습에 사황자비 정씨와 대황자 곽씨가 일제히 얼굴이 시퍼레졌다.
“무슨 허튼소리냐! 다음이라니! 응? 네 말이 맞다. 내 궁문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여봐라, 어떻게 된 일인지 가 보아라. 궁문 앞을 누가 관리한 것이냐? 소제를 어떻게 한 것이야!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 얼른 조사하고 찾아내면 즉시 때려죽여라!”
주 귀비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거처 안팎에 사람이 미끄러질 정도로 얼음이 얼 리가 있나. 누가 일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지. 장녕궁에서 이런 식으로 일하다니. 죽고 싶지 않고서야!
“마마, 마마의 궁에서 누가 감히 소홀히 일하겠어요. 누가 일부러 물을 길에 뿌린 걸 거예요. 그러고 끽소리 없이 감춘 바람에 손씨가 저 지경이 된 걸 거예요.”
주 귀비가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걸 본 대황자 측비 조씨가 서둘러 넘어진 이유를 밝히기 위해 얼른 나섰다. 곽씨는 달려가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 얼굴로 조씨를 노려봤다.
사황자비 정씨도 죽어라 조씨를 노려보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자기가 돌아오다가 꽃병 물을 입구에 부은 걸 어떻게 알았을까?
“알아봐라! 누가 물을 입구에서 부은 것이냐!”
주 귀비는 평생 살아오면서, 스무 살쯤엔 그래도 가끔은 생각이라는 걸 했지만 근래 십여 년 동안 안 그래도 많지 않은 생각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어서 머리가 진작 다 굳었다.
사황자비 정씨는 무심결에 뒷걸음치며 고개를 들다가 귀신 본 듯이 놀란 표정을 짓는 대황자비 곽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손수건을 비틀며 눈알을 굴리는 대황자 측비 조씨를 바라봤다. 머릿속이 환해졌다. 누군가 입구에 물을 뿌렸다고 조씨가 그랬다. 조씨가 가리킨 건 자신이 아니었다. 곽씨로구나! 분명 곽씨도 입구에 물을 부은 것이다! 조씨는 곽씨와 함께 꽃을 고르러 갔었지…….
“형님이 실수로 입구에 물을 뿌리신 거지요?”
사황자비 정씨가 곽씨를 빤히 보며 물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하나는 죽어야 끝날 듯하구나. 그럼 네가 죽어라!
“아니야. 난…….”
곽씨는 몹시 놀라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나 조씨가 그녀가 무사히 넘어가도록 둘 리가 없었다.
“형님, 물을 쏟았으면서 어떻게 마마 앞에서 거짓말을 하세요.”
사황자비 정씨는 매우 찔리고 조금 동정하는 마음으로 곽씨를 힐끔 보고는 시선을 피했다.
나는 스스로 지키려고 이러는 거야. 어쩔 수 없어.
곽씨는 털썩 무릎을 꿇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가 물을 쏟은 게 맞았다. 조씨가 봤고 많은 이가 봤다. 벗어날 가능성이 없고 해명할 길도 없었다.
화황 위에 앉은 손씨는 다급해졌다. 모처럼 이렇게 큰 기회를 잡았는데 정비 정씨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마마, 오는 길에 얼음이 있긴 했어요. 그리 크지 않았어요. 그건 형님이 실수로 흘린 물에 언 얼음이 맞을 거예요. 하지만 마마, 그 얼음은 매우 눈에 띄었어요. 저도 봤고, 시녀도 보고 멀리서 피했어요. 마마, 형님이 실수로 쏟은 물에 넘어진 게 아니에요. 제가 넘어진 건…….”
손씨는 두 눈을 정비 정씨에게서 떼지 않았고, 입도 다물었다. 너무나 명확한 태도였다.
곽씨는 한시름 놓았다. 살았다는 생각에 손씨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싶을 정도였다. 정씨는 입술을 깨물고 원망 가득한 얼굴로 손씨를 노려보며 속으로 욕을 퍼부어댔다. 아까 넘어졌을 때 새끼까지 같이 죽었어야지!
정씨는 악독한 눈으로 손씨를 노려보다가 별안간 웃었다.
“마마, 보세요. 손씨가 이렇게 선량하답니다. 우리 사왕야와 대왕야가 이 일로 멀어질까 걱정해서 저런답니다. 손씨, 지나친 생각이네. 대왕야와 사왕야는 동복 형제인데 이런 일로 멀어질 리가 있겠나. 마마, 그렇지요?”
“이러니 손씨가 먼저 회임했네요. 이렇게 선량하다니, 정말 보기 드문 일이네요.”
대황자 측비 조씨도 얼른 덧붙이며 웃는 듯 마는 듯 손씨를 바라봤다.
손씨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서 덩달아 거드는 조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혼란스러워하는 주 귀비만 바라보며 말했다.
“마마, 어느 곳에나 신령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간이 작아서 함부로 남을 모함하지 못해요. 제가 미끄러진 곳은 매끈하게 갈려 있었어요. 분명 누가 물을 뿌리고 반질반질하게 닦아 둔 거예요. 큰형님이 물을 쏟은 다음에 일부러 닦아두었겠어요? 대왕야 부엔 회임한 사람도 없는걸요. 마마, 저는…….”
정씨가 손씨의 말을 잘랐다.
“마마. 손씨는 역시 착하네요. 손씨와 아이 모두 무사하고, 손씨도 형님이 다치는 걸 바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손씨의 마음 씀씀이가 이리 곱네요. 마마, 저도 손씨와 같은 생각이에요. 저도 형님이 벌 받길 바라지 않아요. 사왕야가 알게 되어도 마마께서 형님을 지나치게 탓하는 걸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마마, 저도 손씨와 함께 이렇게 빌게요. 형님을 용서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