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며느리 넷
진왕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무슨 생각이 있겠소.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어릴 때부터 그저 평온하게 자라기만 바랐는걸. 지금은 전보다 조금 나아졌을 뿐인데, 내가 뭘 바라겠소. 어차피 형님과 넷째, 둘 중 한 명일 거라는 건 온 세상이 아는 사실 아니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겠소. 나는 아무 생각도 한 적 없소. 난 그런 야심이 없소.”
“왕야 말씀이 옳아요. 우린 그저 평온하기만 바랄 뿐이죠.”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소, 그렇지? 내가 무슨 야심이 있겠소. 어릴 때부터 글선생과 공부할 때도 조금만 거슬리면 형님은 모든 일을 다 내 탓으로 돌렸소. 한번은 벼루를 던졌지. 다행히 재빠르게 피해서 이마를 스쳐서 작게 흉만 지고 끝났지, 목숨에 위협은 없었소. 넷째도 그래. 어느 해 봄엔 목덜미로 벌레를 가득 집어넣었지. 나는 벌레를 제일 무서워해서 그 자리에서 혼절했소. 넷째는 내가 일부러 그런 거라고…….”
진왕은 이야기하다 보니 눈물이 나왔다. 왕비가 옆으로 다가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소……. 그분은 거의 매일 양빈 마마를 벌을 세웠어. 여름엔 땡볕 아래 무릎 꿇리고 겨울엔 수각에 무릎 꿇렸지. 넷째는 생모가 벌을 받는데 같이 겪지 않으면 불효라고 나도 꿇으라고 했소. 나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소. 어느 날 그들이 내 앞에 무릎 꿇는 날을…… 꿈에도……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소.”
진왕의 두서없는 말을 진왕비는 때론 알아듣고 때론 알아듣지 못했다. 대체 생각한 적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진왕비는 진왕의 뜻을 가늠하지 못해서 입을 함부로 열지 않았다. 잘못 짐작해서 잘못 설득했다가는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일단 잘 들어보고, 깨달은 다음에 이야기하자 싶었다.
“계 노승상이 우리 형제를 가르친 적이 있소.”
진왕의 말머리가 확 바뀌자 왕비는 무심결에 허리를 곧추세웠다.
“고모님께 역경(易經)을 가르친 적도 있지. 나중에 우리가 역경을 배울 때가 되었을 땐 흠천감이 와서 가르친 적이 있소. 역경을 논하려면 계 노승상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다고 흠천감이 하루는 그러더군. 계 노승상이 점괘를 잘 본다고도 했어.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했지. 계 천관은 그런 계 노승상의 아들이니 아비에게 배운 것이 많겠지. 계 천관도 점괘를 본 것일까?”
진왕은 갈망하는 눈으로 왕비를 바라봤다. 왕비는 어리둥절하게 듣다가 마지막 말에 어리둥절하던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역시 생각했었다. 그의 말은 생각은 했지만 감히 바라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그건…….”
계 천관이 점괘를 봤는지 아닌지 그녀가 어찌 알까. 점괘라는 걸 또 어떻게 전부 믿고. 진 왕비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왕야, 물어보지 않았나요?”
“물을 게 뭐가 있소. 나도 그냥 해 본 말이요.”
진왕이 재빨리 대답했다.
“감히 꿈꿔 본 적이 없소! 내 평생 감히 바랄 수 있는 건 그저 평온하게 늙어 죽는 것이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왕비가 속으로 셈하는데 진왕이 또 말머리를 바꿨다.
“황가의 혈통은 진귀하오. 황자를 죽인 선례가 없어. 그렇지? 황자를 죽였다는 말이 사서에 있던가? 기껏해야 감금하지. 당신, 사서를 읽었소? 내 기억엔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소. 사람을 시켜 알아봅시다! 여봐라!”
진왕비는 깜짝 놀라 서둘러 그를 말렸다.
“늦었습니다. 알아보더라도 내일 해요. 소문이 퍼지면 큰일 납니다.”
“아, 내가 어리석었군.”
진왕은 이마를 쳤다.
“내가 기억하기론 없소.”
“왕야, 대놓고 황자를 죽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마 없을 거예요. 하지만 역대 후계 쟁탈에 연루된 사람 중에 왕이 되지 못한 후에 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대놓고 사서에 올릴 필요 없이, 독으로 죽었든 백릉을 내렸든, 모두 병사로 치부합니다. 사서에도 급환으로 죽었다고만 기록되어요. 대놓고 말할 필요 없습니다.”
진왕비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군이 조금 주화입마한 듯이 보였다.
“정안 친왕이 바로 급환으로 죽었습니다.”
진왕비가 한마디 더 보탰다. 정안 친왕은 태자복까지 입었었던, 지금 황상의 형제였다. 선황이 붕어하던 날, 주 태후가 술 한 잔 하사한 후 다음 날 병으로 세상을 떠나 선황과 함께 황릉에 들어갔다.
진왕은 부르르 몸서리치고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피곤하군. 쉽시다.”
진왕은 침상에 누워 밤새 뒤척거리다가 별안간 일어나서 왕비를 힘껏 밀쳐 깨웠다. 그는 잠이 덜 깬 진씨를 눈을 반짝이며 바라봤다.
“계가는 천하 문인의 우두머리요. 그렇지? 전에 선생이 소위 민심이란 사실은 문인의 마음이라고 말했었소. 계가가 천하 문인의 우두머리라면, 계가의 마음이 향하는 곳에 세상 민심이 향하는 것 아니겠소. 이 말이 맞지요? 문인의 마음이 민심이라면, 계 천관이 나를 선택한 것은 내가 민심을, 천하 민심을 이미 얻은 것 아니오?”
진왕비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졌다. 희한할 정도로 밝은 진왕의 눈빛에 두려워졌다.
“왕야…….”
진왕비의 목소리에 무언가가 터진 듯이 진왕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표정은 당황스러워졌다.
“그냥 해 본 말이오! 다른 뜻은 없소. 그냥 떠올라서 아무렇게나 해 본 것이오.”
진왕은 그 말만 남기고 왕비가 대답하기 전에 왕비를 등지고 눕더니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왕비는 그를 흔들려고 손을 올리다가 다시 떨구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천천히 누웠다. 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다시 잠들지 못했다.
납팔이 지나면 곧 새해가 찾아온다. 근래 주 귀비는 갈수록 이런 새해를 맞이하는 분위기를 좋아했다. 납팔이 신춘의 시작인 만큼 그녀는 해가 갈수록 납팔을 중시했다.
납팔 당일 이른 아침 대황자비 곽씨가 측비 조씨를 데리고, 사황자비 정씨가 측비 손씨를 데리고 궁에 들어 납팔 죽을 먹으며 납팔을 보냈다.
주 귀비의 규칙에 의하면 납팔 죽 한 그릇만 먹고 바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두 아들의 며느리 넷은 아침 일찍부터 궁에 들어서 각자 일거리를 받았다. 청소하거나, 화초를 꾸미거나, 혹은 후원에 직접 가서 매화나 다른 꽃을 꺾거나, 어찌 됐든 그날 하루는 주 귀비의 뜻대로 평범한 가족처럼 새해를 보내야 했다. 보통 가문에서는 그렇다고 하니, 시어미인 그녀는 당연히 며느리 시중을 종일 만끽해야 했다.
주 귀비는 며느리 문제에서 자기는 지극히 공정히 했다고 생각했다. 대황자와 사황자의 정비는 황상과 함께 골랐으며 측비는 아들과 함께 골라서 두어 달 차이로 모두 왕부에 들였다. 정비가 측비를 괴롭힐까 봐 걱정이긴 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측비가 들어온 이래 내내 측비 편에 서서 굳건하게 그녀들을 지지하며 정비의 괴롭힘에 대항하도록 도와주었다.
정비가 감히 측비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고 수시로 그녀들을 뒤흔들었다. 네 사람 모두 그녀의 며느리며 모두 똑같다고 내내 강조했다.
며느리 넷이 오전 내내 바삐 움직인 끝에, 원래 먼지 한 톨 없이 화려하던 장녕궁을 여전히 먼지 한 톨 없이 화려하게 단장했다.
점심때, 주 귀비는 네 며느리를 데리고 섣달에 접어들어 처음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려고 황상과 두 황자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황상은 곧 왔다. 황상은 매일 오니까. 하지만 대황자와 사황자는 약속이나 한 듯이 관아에 볼일이 있어서 궁에서 식사하지 않는다고 기별했다.
매우 실망한 주 귀비는 점심을 먹고 시들시들 침상에 누웠다. 뭘 봐도 거슬렸다.
“꽃병은 누가 놓은 것이냐?”
주 귀비가 대전 구석에 놓인 화병을 가리키며 묻자 대황자비 곽씨가 눈을 질끈 감고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제 오후에 막 가지고 온 것입니다. 밤 동안 꽃을 피워 지금이 딱 좋을 때라서 며느리 생각엔…….”
“이야기하지 않았더냐. 오늘부터 새해이다. 화초를 다 새것으로 바꿔야 한다. 이건 보기 좋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길함, 불길함의 문제다!”
주 귀비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어쩐지 춘절 첫날부터 언짢은 일이 일어나더라니!
“얼른 바꿔라! 이리 게으르다니. 내 앞에서도 감히 게으름을 피우는데 저택에서는 어떨까. 대가아도 이리 소홀히 대하는 것이냐!”
대황자비 곽씨는 얼굴이 다 창백해졌다.
“제가 소홀했습니다. 얼른 바꾸겠습니다.”
“직접 가서 꺾어 와라. 좀 멀리 가더라도 가장 좋은 걸 골라오란 말이다. 조씨, 너도 가서 도와라! 정말이지!”
주 귀비는 싫다는 듯 곽씨를 노려봤다. 조씨는 얼른 일어나서 무릎을 구부리고 고소하다는 듯 곽씨를 삐딱하게 바라봤다.
손을 늘어뜨리고 공손하게 서 있던 사황자비 정씨가 이곳에서 아예 보이지도 않는 외전을 수시로 힐끔거렸다. 외전은 그녀가 청소했는데 꽃을 바꾸지 않았다.
정씨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주 귀비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지 않게 나가서 꽃을 바꿀 수 있을까 궁리했다. 아이를 가져서, 오늘은 일거리를 맡지 않은 사황자 측비 손씨가 그녀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마마, 외전의 꽃은 바꿨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바로 가 볼게요.”
“넌 회임했으니 쉬어라. 외전의 꽃도 바꾸지 않았느냐?”
주 귀비가 화난 눈으로 사황자비 정씨를 노려보자, 정씨가 몸을 낮추며 다급하게 말했다.
“바꾸긴 했는데 전부 바꾸진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얼른 가 보겠습니다.”
주 귀비가 그러라는 듯 대답하자, 정씨는 서둘러 외전으로 물러났다. 주 귀비가 분부할 것도 없이 꽃병을 들고나오라고 시키고 직접 후원으로 꽃을 꺾으러 갔다.
정씨까지 나가고 나니, 주 귀비 앞엔 회임한 지 서너 개월밖에 안 됐는데 열심히 배를 앞으로 내미는 측비 손씨밖에 남지 않았다. 손씨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주 귀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 하다니……. 좋은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얼른 핑계를 대고 나가야만 해!
“마마, 밖에 분재를 다 바꿨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하나씩 보고 올까요? 송구영신인데 화분을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지요.”
드디어 핑곗거리를 찾은 손씨는 주 귀비가 힐끔 배를 바라보자 얼른 손사래 쳤다.
“괜찮습니다. 곧 넉 달이라 이제 안정됐습니다. 매일 걷는 게 좋다고 태의도 그랬답니다. 아이에게도 좋고 낳을 때도 순조롭고요.”
“음. 가 봐라. 자세히 보고. 오늘은 추우니 뜰로는 가지 말고 회랑만 보아라. 뜰의 꽃은 사람을 불러 들고 오라고 해서 보고.”
주 귀비는 회임한 손씨, 정확히는 손씨 배 속의 아이를 매우 신경 썼다.
주 귀비의 전 안과 전 밖의 모든 화분은 어제 바꾼 것이지만, 이왕 살펴보러 간 이상 사황자 측비 정씨는 당연히 하나하나 찍으며 새로운 것으로 바꾸라고 분부했다. 대전 안에 있는 꽃은 대황자비와 사황자비가 손수 고르러 갔으니, 정씨도 오래 고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전 밖의 화분을 바꿀 분재를 고르러 시녀를 데리고 장녕궁에서 나갔다.
대황자비 곽씨는 경성 사람이 아니었다. 네 며느리 중에 사황자 측비 손씨 말고 모두 경성 사람이 아니었다. 며느리를 고를 때 주 귀비와 모친 조 노부인의 의견이 일치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훗날 외척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아들에게 혼란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세가의 며느리는 들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수국공과 주 추밀부사도 매우 찬성했다. 고귀하고 권세 높은 가문의 외척은 그들 주가 하나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