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나는 나뿐
“자등 산장에 소유라는 어린 찬모가 있어요.”
이동은 차를 내리며 소유 이야기를 꺼냈다.
“소유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밑에서 음식을 배웠어요. 재능이 있었죠. 열 살 되기 전에 음식을 그럴싸하게 차려냈어요. 열일고여덟 때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바로 떠났어요. 소유는 어머니 뒤를 이어 반루에 들어가서 찬모가 되었고요. 1년에 백 냥 넘게 은자를 벌었어요.”
복안 장공주는 시선을 돌려 이동을 바라봤다.
“소유는 정혼했었어요. 청매죽마였던 이웃이죠. 나중에 사내 쪽에서 혼인을 파기했어요. 소유는 평범하지 않은 여인이에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 평생 혼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아이도 싫고, 사내 시중드는 것도 싫대요. 집안일도 싫고. 시부모 앞에서 법도를 지키며 사는 것도 잃고, 집안 어르신 환심 사려고 입바른 말 하는 건 더더욱 싫대요. 매일매일 맛있는 것 하면서 바쁘게 보내고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일이 끝나면 흥겹게 같이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그러다가 지치면 방으로 돌아가서 바로 곯아떨어지고. 그런 나날이 제일 즐겁대요. 그렇게 평생 살겠대요.”
이동은 차를 내려서 장공주 앞에 놓았다.
“처음엔 그래도 괜찮았어요. 오지랖 넓은 사람들이 와서 혼담을 들이밀긴 했지만 거절하면 그만이었어요. 더 나중에 스물이 넘자 별별 말이 다 나왔죠. 반루 사람은 그래도 괜찮았어요. 마음이 동한 사람도 기껏해야 물건을 보내고 잘 보이려고 애쓴 정도라서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는데 밖의 사람들이 간이 컸죠. 한 번은 어느 무뢰배가 세상에, 소유 거처에 숨어 있었어요. 몸부터 가지고 혼인하려고요.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머니가 소유를 집에 들여서 제 음식과 간식을 맡겼어요.”
장공주는 천천히 차를 홀짝였고 이동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고 계속했다.
“소유가 저택에 들어온 지 2, 3년 되었어요. 재미있게 살고요. 우리 집안 시녀 중에 소유처럼 혼인하고 싶어 하지 않은 아이가 두엇 있어요. 어머니는 혼인을 강요하지 않아요. 혼인하고 싶지 않으면 말라고요. 소유가 자기는 평생 이가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어머니가 계실 땐 어머니 밑에 있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엔 제 밑에서 평생 저를 모시겠다고요.
소유가 아직 반루에 있었다면, 결국은 강제로 혼인했겠죠. 팔자려니 하고요. 팔자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진작 죽었을 거예요. 어머니가 그녀를 보호하고 이가가 평생 머물 곳을 준 거예요.”
복안 장공주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영원 곁에 무술 실력이 매우 뛰어난 시녀가 있어요. 위봉낭이라고. 그녀도 평생 혼인하지 않겠다고 뜻을 품었대요. 영 칠야 곁에 있지 않았더라도 감히 혼인을 강요하지 못했을 거예요. 무술이 뛰어나서 그녀를 이길 사내가 몇 안 되거든요. 보세요, 속세에서도 이래요. 혼인하고 싶지 않으면 의지할 곳이 있어야 해요. 보호해 줄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스스로 지킬 힘이 있거나.”
복안 장공주는 등받이에 기대서 초점 없는 눈으로 반쯤 열린 창문을 바라봤다. 이동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고요한 방 안엔 은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만 들렸다.
“소유의 담벼락은 자등 산장 하나면 충분하겠지만, 나는?”
복안 장공주는 완전히 식어 빠진 찻잔을 살며시 찻상에 내려놓았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맑고 깨끗했다. 이동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
“이 경성? 소유는 너와 네 어머니가 보호하지만, 이 세상에서 누가 날 보호할 수 있을까?”
복안 장공주는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나는 나뿐이야. 스스로 지켜야 해.”
이동은 잔을 가져와 식은 차를 버리고 새로운 잔을 꺼내 물기를 닦고 찻가루를 넣고 차를 내렸다.
“나 임염진은 태어날 때부터 비범했어. 나는 아버지가 가장 아낀 자식이고 이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공주야. 이런 내가 왜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안 돼?”
복안 장공주는 찻상을 탁 내리쳤다. 상에 놓인 찻잔이 흔들리고 이동이 잡고 있던 은주전자가 흔들려서 찻상에 물이 쏟아졌다. 복안 장공주는 상을 내리치고는 벌써 일어나서 성큼 창 앞으로 다가 창을 밀었다. 이동은 몸을 돌리고 잠시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수건을 가지고 와서 찻상을 정리했다.
복안 장공주는 잠시 서 있다가 돌아서서 다시 차를 내리는 이동을 냉랭하게 바라봤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은데 바람이 멈추지 않아. 그자들, 내가 자기들처럼 툭하면 억지 쓰는 여인네처럼 난리를 부릴 줄 아나 봐?”
순간 등 뒤가 서늘해진 이동은 뒤를 돌았다. 창문이 열린 걸 보고 일어서서 닫으러 갔다.
“나는 말을 못 할 때부터 아버지 품에 안겨서 정치를 배웠어. 이 몸이 배운 건 제왕의 길이라고!”
창문을 닫던 이동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아까보다 더 으슬으슬했다.
영원의 말이 맞았다. 장공주는 고양이 무리의 스라소니였다. 지금 이 스라소니가 고양이 노릇을 그만두려 한다. 맹수를 풀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걸까?
이동은 복안 장공주를 돌아봤다.
“뭘 봐? 네가 바라는 거 아니었니?”
복안 장공주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요즘 문 이야가 한가해요.”
“필요 없어.”
복안 장공주는 잔을 들고 차를 홀짝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그를 쓸 때가 되지 않았어.”
섣달은 해가 매우 빨리 진다. 계 천관이 관아에서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 있었다. 그가 마차에 오른 후, 잠시 달려가던 마차가 모퉁이를 돌아 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차에서 내린 계 천관은 골목 끝까지 걸어간 다음 각문을 열고 어느 다루 후원으로 들어갔다.
후원과 가장 가까운 독채 안, 강환장이 진왕과 함께 막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계 천관이 들어오자, 막 자리에 앉았던 진왕이 서둘러 일어나서 공수했다. 계 천관은 지극히 공손한 모습으로 깊이 장읍했다. 강환장은 진왕보다 늦게 일어나 계 천관에게 깊이 장읍하고, 무시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을 감추고 몸을 일으켜서 계 천관을 자기보다 상석으로 안내했다.
계 천관은 앉기도 전에 본론을 꺼냈다.
“인사치레는 하지 않겠습니다. 예부에서 지금 섣달과 정월의 각종 대례를 준비 중입니다. 궁 안에 제조(祭竈: 조왕신에게 드리는 제사)부터 섣달그믐의 대나희(大儺戱: 섣달그믐에 악귀를 쫓아내는 행사, 연극), 연야반(年夜飯: 섣달그믐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는 음식), 그리고 그믐 밤샘 등 갖가지 사항은, 예년엔 사왕야가 맡았습니다. 올해 황상께서 교제(郊祭: 천자가 성밖 교외에서 상제上帝에 지내는 제사)를 맡아서 하라고 낙점하셔서 올해는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대왕야는 이런 일을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저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계 천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두 사람을 살폈다. 진왕은 살짝 흥분한 듯했고 강환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왕야는 항상 칩거하며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셨지요. 조정 대신, 그리고 지방 관리 모두 왕야를 잘 모릅니다. 지금부터는 왕야도 임무를 맡으셔야 합니다. 하나하나 잘 처리하고 조정 대신과 지방 관리에게 왕야의 출중한 재능, 고결한 품행을 알려야 합니다.”
계 천관의 완곡한 말에 진왕은 얼떨떨해하다가 뒤늦게 반응했다.
“천관 정말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왕야는 황자입니다. 진인사대천명 해야지요.”
진왕이 말로 묻지 않았지만 계 천관은 그의 물음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대놓고 대답하진 않았다. 성공할 수 있을지 아닐지 모를 일이었다. 성공한 국면이 되기 전에 아무도 그런 일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
“아.”
진왕은 낙담한 듯했다. 계 천관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다시 떴다.
“왕야, 그런 건 생각하지 마시고 일단 눈앞에 일을 하나하나 하시면 됩니다. 예부 쪽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임무가 내려오면, 강 장사, 자네도 수고해야 하네. 왕야를 보좌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일을 깔끔하게 잘 해내야 하네.”
강환장은 살짝 허리를 구부리면서 시선은 진왕에게 향했다. 진왕은 그를 보지 않고 조마조마한 듯 우물쭈물 말했다.
“계 천관, 수고가 많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계 천관이 일어나 진왕을 향해 장읍하자 진왕도 서둘러 일어섰다. 배웅하려고 걸음을 떼는데 강환장이 옷자락을 잡았다. 진왕은 걸음을 멈추고 강환장을 바라봤다. 뿌리치고 나가서 배웅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계 천관이 어느새 밖으로 나갔다.
강환장은 쏜살처럼 문 쪽으로 달려가 휘장을 젖히고 내다봤다. 계 천관이 멀리 간 걸 보고야 휘장을 내리고 돌아와서 나지막이 진왕에게 물었다.
“왕야, 이 일을 하실 겁니까?”
“쉬운 일 아니냐. 넷째나 형님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궁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건 집안일이기도 하니 누군가는 해야지.”
진왕은 모호하게 말했다. 마음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왕야, 이건 그냥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게 시작입니다. 이번 일을 맡게 되면…….”
강환장은 말을 멈췄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왕야, 저는 불변(不變)으로 변화를 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대책이라고 여깁니다. 대왕야와 사왕야의 분쟁이 끝으로 치닫는 시기에 이런 수를 두는 건 현명하지 않습니다.”
“음. 그렇긴 하지.”
진왕은 마음이 조금 뜬 듯했다. 듣고 싶은 말이긴 하지만 또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계 천관이 말을 꺼내지 않았나. 호의로 해준 말을 단번에 거절한다면…….”
진왕이 난처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왕야, 이건 큰일입니다. 마음이 약해서 정할 일이 아닙니다. 계 천관의 체면을 생각하다가 왕야가 위험해질 필요 없습니다. 제가 계 천관하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왕야는 아직 드러날 때가 아니라고요. 아직 하늘이 내린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요.”
“그것도 좋겠지. 그것도 좋아. 소화, 잘 이야기해라. 계 천관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 내가 거절하는 건 아니라고 해. 어쨌든 소화가 알아서 계 천관에게 잘 이야기하고 절대로 언짢게 해서는 안 된다.”
진왕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당부하고는 강환장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와서 각자 저택으로 돌아갔다.
왕부로 돌아간 진왕은 턱을 괴고 생각하다가 진왕비의 거처로 달려갔다. 마침 식사 중이던 진왕비는 그가 들어오자 식사를 했는지 묻고는 아직 식사 전이라고 하자 먹다 만 음식을 물리고 새로 상을 들였다.
진왕은 근심이 가득해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탕만 반쯤 마시고 쌀밥은 두어 입 먹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서자 왕비도 재빨리 내려놓고 상을 내가라고 손을 휘두르고는 따라가서 차를 올렸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요?”
진왕의 근심 가득한 표정에 왕비가 곁에 앉아서 나긋나긋 물었다. 진왕이 시녀와 어멈을 힐끔 보자 왕비가 뜻을 알아듣고 모두를 물렸다. 진왕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오늘 계 천관이 한 말을 전했다.
“보잘것없는 작은 임무 아닌가. 궁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일 뿐인데. 넷째는 일이 있고 형님은 이런 사소한 일에 관여하지 않아. 황실의 새해맞이를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그렇지 않소? 계 천관은 다른 뜻도 없는데 소화가 생각이 많아서는. 나를 위해서라는 건 알지. 쓸데없는 화를 부를까 봐 걱정하는 것이라는 걸 알지. 큰형님과 넷째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사람이 많으니까. 휴!”
진왕은 주절주절 쓸데없는 말만 해댔다. 쓸모 있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왕비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손수건을 천천히 잡아당기다가, 한참 만에 신중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일이 확실히…….”
왕비는 말문을 열다가 말고 다시 멈췄다.
“큰일이니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친 게 아니에요. 왕야, 계 천관이 임무를 맡고 두각을 드러내라고 하는 건 앞으로 나아가라는 거고, 강 장사의 뜻은 일단 준비하고 가만히 기다리자는 뜻이지요. 대왕야와 사왕야가 사달이 난 때이니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왕야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한 걸음 나아가서 시도해 보실 건가요, 아니면 새우 등 터질 일도 없도록 망상을 품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실 생각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