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스라소니와 고양이
다음 날, 이동, 이신, 문 이야에겐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들어오지 않았다. 문 이야는 초조해 보이는 이동을 위로했다.
“낭자, 걱정하지 마세요. 무소식이 희소식입니다. 소식이 있으면 더 안 좋습니다. 장공주는 분명 무사합니다. 제 생각엔 오늘내일 안엔 분명 보림암 밖 별원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렇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이신도 문 이야를 따라 간곡하게 위로했다. 그는 위로에 서툰 사람이었다.
“난 괜찮아요.”
이동은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미소가 조금 억지스러웠다. 무슨 일이 생기고 말고가 두려운 게 아니었다. 장공주의 성격이 걱정이었다. 궁에서 심하게 강요받은 울화를 지난번처럼 스스로에게 풀까 봐 걱정이었다.
걱정 외에 자책과 망연한 마음도 들었다. 내가 장공주를 도운 건지 해롭게 한 건지…….
“낭자.”
문 이야는 이동을 보다가 고개를 들고 이신을 바라봤다.
“낭자에게 할 말이 있네.”
“이야, 말씀하세요.”
이동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요 며칠 대야와 함께 줄곧 장공주의 혼사 문제를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시정, 항간 이야기는 할 것 없습니다. 백성들은 장공주가 혼인하지 않는 건 미친 짓이라고 여길 테니까요. 대상국사 일대, 그리고 국자감 일대의 서생은 모두 장공주가 주가의 협박 때문에 혼인하지 않는 것으로 여깁니다. 주가가 마음에 드는 상대를 강요하거나, 장공주가 마다하는 사람을 강요해서 그런다고 생각합니다.”
문 이야의 목소리는 낮았고, 이동은 말이 없었다. 그녀도 짐작한 내용이었다. 지난 생에 장공주가 세상을 떠난 지 아주 오랜 후에도 사람들은 때때로 그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다들 장공주가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했다고 말했다. 양 태후가 골라준 부군이 너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아서라고. 예전엔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적어도 이 일에서 양 태후는 억울했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양 태후가 누굴 골랐든, 장공주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혼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신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계 공자는 장공주가 혼인하지 않는 일만 거론하면 매우 자책하더구나. 고모인 계 황후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일로 황상의 불공평함을 원망하는 마음에 혼인하려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더구나. 장공주는 혼인을 거부하는 것으로 싸운다고 생각하더라.”
이동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문 이야가 이동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보세요. 저마다 생각이 다르지만, 장공주가 혼인하고 싶지 않아서 혼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번엔 위험하긴 해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앞으로는 또 모릅니다. 낭자, 장공주를 설득하세요. 세상 사람을 적으로 만들면 온몸이 부서지는 것 말고 다른 결과는 없습니다.”
“예, 알겠어요.”
이동의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났다.
거처로 돌아간 이동이 자리에 앉자마자, 창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낭자!”
이동이 수련을 시켜 창을 열자 위봉낭이 고개를 내밀고 이동을 바라봤다.
“들어가지 않고 말씀만 전하겠습니다. 우리 나리가 전해 달라십니다. 주육을 만나서 물어봤는데 장공주께선 줄곧 장녕궁에 계신답니다. 조 노부인이 매일매일 궁에 들어갔다가 늦게 돌아왔는데 오늘은 안색이 매우 안 좋더랍니다. 걱정하지 말고 마음 놓으시랍니다. 며칠 안에 출궁해서 보림암으로 돌아갈 것 같답니다.”
“알겠어. 고마워. 칠야에게도 고맙고.”
이동은 마음이 놓였다. 조 노부인이 매일 입궁한 일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는 소식은 그녀가 수소문하기 어려웠다.
“별말씀을요.”
위봉낭은 예의 갖춰 말하고는 창문을 닫았다.
사흘 후 오후, 복안 장공주의 마차가 겨우 선덕문에서 나와 성 밖 보림암으로 직행했다.
소식을 들은 이동은 다급하게 뒤를 따라 보림암으로 향했다. 복안 장공주의 마차는 곧장 별원으로 향했고 이동은 멀리서 따라갔다. 마차가 별원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야 대교에게 분부해서 자등 산장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이동은 후원에 향안(香案: 제사 때 초나 향을 올리는 상)을 놓고 하늘을 향해 감사 기도를 올렸다. 막 일어서는데 뒤에서 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세요. 내가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듯이 아무 일 없었지요?”
이동이 후다닥 돌아보자, 영원이 손에 종이봉투를 들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왜 또 오셨나요.”
“장공주는 어떻습니까? 아무 일 없지요?”
영원은 저기로 가자는 듯 이동 뒤에 보이는 화청을 가리켰다.
“만나지 않았어요.”
이동은 이제 장공주에 관한 일은 한마디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영원도 조금 알겠다는 표정으로 봉투를 화청 중간 돌 탁자에 올려놓고 열어서 이동 앞으로 내밀었다.
“생강 와사당입니다. 내가 직접 사 온 겁니다.”
“난 이거 안 좋아해요.”
“낭자 시녀, 녹매던가? 매일 사러 가는 걸 봤습니다. 분명 좋아할 텐데요? 조금 전에 만든 거라 맛있습니다. 먹어 봐요. 성에서 나올 때 산 거라 지금 먹으면 딱 좋습니다.”
영원은 ‘나를 속이지는 못하지.’ 하는 듯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이동은 그가 앞으로 밀어준 당과를 내려다보다가 그쪽으로 밀었다.
“수련하고 애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난 좋아하지 않아요.”
“하나만 들어요. 생강은 한기를 쫓습니다. 아까 꽤 오래 달 보고 빌었잖습니까. 하나 먹으면 추위가 가실 겁니다.”
영원은 팔꿈치를 탁자 위에 올린 채 양손으로 봉투를 들어 올려서는 이동 앞으로 내밀었다.
“하나만 먹어요. 딱 하나만.”
“안 먹는다고요.”
영원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이동은 난처해졌다.
“추위 쫓으려고 먹어요. 게다가 정말 맛있는 당과입니다. 하나만요. 딱 하나만.”
영원이 다시 봉투를 내밀자 이동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당과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영원은 활짝 웃으며 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자기도 하나 입에 넣었다.
“역시 맛있군. 생강 향도 좋고. 하나만 먹으면 몸이 따듯해집니다.”
“장공주가 잘 있는지 물으려고 온 건가요?”
“아뇨. 장공주가 안 좋을 일이 뭐가 있어서.”
영원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손으로 이마를 쳤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서 오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해명해야 할 것 같아서.”
이동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틀고 그를 바라봤다. 무얼 해명하겠다는 건지. 장공주 혼인을 강요하도록 수국공부에 손을 쓴 일?
해명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말입니다.”
영원은 엄숙한 얼굴로 자기를 가리켰다.
“꽤 악랄하고 독한 사람입니다. 북삼로에서 다들 나를 도적 중 도적이라고 하더군요. 그게 다 내가 도적보다 악랄하고 독해서겠죠.”
이동은 영원을 바라봤다. 말문을 이렇게 여는 걸 보니 장공주 문제를 해명하는 게 아닌 듯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내 손에 얼마나 많은 도적과 관외 야만인이 죽었는지, 나도 모를 지경입니다. 하나 한 가지, 난 여인과 아이는 죽이지 않아요. 도적 소탕하러 갈 때도 여인과 아이가 있으면 여인이 아이를 데리고 달아나게 해줍니다.”
“그럼 위봉낭 같은 여인은요?”
이동이 툭 물었다. 위봉낭은 보통 사내보다 무공이 뛰어나지 않나?
영원은 화청 밖을 힐끔 봤다.
“위봉낭의 아비는 북삼로에서 손꼽히는 도적 두목이었습니다. 수하에 사람이 삼백 넘었고요. 교활하고 영특해서 남들은 토끼굴을 세 곳 판다는 데 그자는 네 곳을 팠습니다. 두 곳은 다 아는 곳이고 두 곳은 감춰진 곳이었죠. 거의 2년 동안 그놈을 지켜보다가 겨우 소굴 네 곳을 태워버렸습니다. 그와 수하 삼백 명을 모두 내쫓았는데, 그 삼백 명 중에 절반이 가족이 있었습니다. 다 풀어줬습니다. 거기에 위봉낭도 있었지요. 말, 건량을 가져가게 했어요. 은자도 조금 주었어요. 한 사람당 다섯 냥.”
“말을…….”
이동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영원이 눈썹을 까딱이며 빙긋 웃었다.
“위봉낭보다 똑똑하군요. 그때 위봉낭이 나서서 자기가 아비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그래도 풀어주겠냐고 묻더군요. 못할 게 무엇입니까.”
영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풀어주었죠. 그런데 안 갔습니다. 여인과 아이들도 하늘이 무너진 듯 울고. 나중에 위 두목이 항복했습니다.”
영원이 단순하게 설명하는 말에 이동이 눈살을 살며시 찌푸렸다. 너무 쉽게 묘사했지만, 그 과정은 분명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으리라.
“위봉낭 같은 여인도 나는 여인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장공주는 여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원의 화제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돌아와서 이동은 한순간 반응하지 못하고 그를 노려봤다.
“장공주가 여인이 아니라고요?”
그럼 뭐라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인가요.”
“스라소니 본 적 있지요? 고양이처럼 생겨서 지극히 흉맹스럽습니다. 여인이 고양이라면 장공주는 스라소니입니다. 고양이 속에 섞여서 고양이처럼 살지만 사실 고양이가 아닙니다.”
영원의 비유에 이동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빤히 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 두 사람은 언제나 사실, 속마음을 말했잖습니까. 난 장공주가 혼인하지 않는 게 말입니다, 고양이는 옆에 두고 기를 수 있지만, 스라소니를 재미로 기르는 사람은 없잖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낭자,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그렇게 보고 있으니 내가, 나는…….”
“그 말은, 장공주를 여인으로 보지 않으니 손을 쓸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죠?”
이동이 매우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했다.
영원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내가 어찌 감히. 내가 왜 장공주에게 손을 씁니다. 내가 뭐 하러 스라소니 같은 능구렁이를……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 뭐냐. 내 말은 낭자는 장공주와 말 통하는 사람 아닙니까. 낭자는 영리한 사람이니까 장공주에게 말해 보세요. 여인이 아닌데, 사람들이 여인이라고 여기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스라소니는 스라소니, 고양이가 될 수 없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이동은 아무런 말 없이 영원을 노려봤다. 이 당과를 들고 온 데엔 이유가 있을 줄 알았다. 커다란 미끼였다.
이동의 시선을 마주한 영원은 순식간에 슬쩍 눈을 피했다.
“그 스라소니에게 자기는 고양이가 아님을 알리는 거, 그게 당신이 바라는 거죠? 둘러치나 메어치나 매한가지죠.”
이동이 일어서서 영원을 상대하지도 않고 곧장 돌아가자 영원이 뒤를 따랐다.
“아이고! 또 이런다. 매번 이렇게 가버리더라.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예, 됐습니다. 시간도 늦었고, 이만 갑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영원은 텅 빈 월동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음 날 이동이 평소보다 일각 먼저 당도했을 때 복안 장공주도 이미 와 있었다. 회색 비단에 회서 안감을 댄 치마를 입고 짙은 도홍색 웃옷을 걸친 장공주는 양손을 팔걸이에 걸치고 다리를 찻상에 올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동은 그녀 앞에 가서 유심히 살폈다. 조금 초췌해서 그렇지, 평온해 보이긴 했다.
“잘 넘어갔나요?“
이동은 복안 장공주 앞에 앉아서 물었다.
“응.”
이동은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복안 장공주를 잠시 바라보다가 찻상 가깝게 의자를 옮겨서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