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54화 (254/463)

254화: 지객승 무지

문 이야가 경모하는 얼굴로 장공주 이야기를 했다.

“장공주는 원래 평범하지 않은 여인이네. 태어날 때부터 평범하지 않았고, 자랄 때도 황상께서 친히 가르친 평범하지 않은 아이였네. 고금 이래 몇이나 그런 사람이 있었나?”

“평범하지 않지요. 다만…….”

이신은 더 말하지 않고 문 이야의 말을 기다렸다.

“장공주는 학문이며 군사 전력이며 세간의 대다수 사내보다 뛰어나네. 나보다 뛰어나지. 지나치게 총명한 사람은 세상일을 너무 달관하는 법이지. 그래서 마도(魔道)……나 불도에 빠지기 쉽네. 장공주도 아마도 그런 것이겠지. 세상일을 거의 다 달관했을 것일세. 좋은 사내를 만나 자식을 기르고, 부창부수 은애하는 그런 세월은 아마도 그녀에겐 부귀영화처럼 부질없는 것이라 거들떠볼 가치도 없이 느껴지겠지. 사람마다 뜻이 다르네. 장공주의 뜻은 아마도 은거한 서생들처럼 홀로 세상을 누비며 꽃 피는 소리 바람 이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일 걸세.”

이신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대충 이해했습니다. 다만…….”

이신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생각하는 듯 말을 멈췄다.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모두 뜻대로 살겠습니까. 장공주는 선황의 깊은 총애를 받았고 황상이 즉위한 후에도 조정과 백성 모두 황상이 즉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장공주와 동복형제였기 때문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장공주 때문에 선황께서 황위를 물려준 것입니다. 장공주가 평생 행복하고 평온하게 살도록요.

이야의 말씀대로 혼인하고 싶지 않고 보림암 같은 곳에서 차를 마시고 꽃구경하며 경을 듣고 서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장공주의 바람이겠지만, 세간에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야처럼, 장공주가 유유자적 즐겁게 산다는 걸 알아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장공주가 이렇게 지내면 세상 모든 이가, 저도 그랬듯이 장공주가 혼인하지 않은 데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황상이 각박하게 굴거나, 누군가 계산속을 부려서 그런 것으로요. 황상은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에게 각박한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문 이야는 침묵했고 이신도 입을 다물었다가 한참 만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도 저쪽도 어려운 국면입니다. 혼인으로 장공주를 압박하는 건 이야의 말씀대로 가련한 일이지만, 장공주의 뜻을 들어주면 세상 사람이 황상을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장공주가 혼인하지 않으면 황상은 오명을 써야 하니 말이지요.”

그 말에 문 이야는 한숨을 쉬었고 이신도 따라 쉬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한숨을 몇 번 내쉬다가 이신이 눈썹을 까딱이며 천천히 말했다.

“이런 일은 말입니다. 어느 모로도 손윗사람인 황상께서 짊어져야 하는 일이겠지요. 잘못이 없어도요. 일단 손윗사람이고, 또 하나는 어차피 황상께서 붕어한 후 사서에 기록할 실덕한 점 중에 장공주 일은 언급할 가치도 없을 테니까요.”

문 이야가 잔을 내려놓고 껄껄 웃었다.

“그러게 말일세. 실덕한 곳이 쇠털처럼 많아서 장공주 일은 말할 것도 없지.”

이신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한참 웃다가 문 이야가 계속 본론을 말했다.

“자네가 여 공자를 만나서 떠보는 게 좋겠네. 그리고 계 공자도. 조 노부인이 혼인을 압박하는 이 상황을 백 노부인에게 전하는 게 좋아.”

“예. 마침 문장도 잘 풀리지 않으니 여 대랑과 소계를 불러서 문장을 보이며 가르침을 청해 봐야겠습니다.”

이신은 곧바로 붓을 들어 청첩 두 장을 써서 청평을 불러 여염과 계소영에게 보냈다.

청평이 나간 뒤 영해가 들어오자 문 이야가 낭자는 돌아왔는지부터 물었다.

“아룁니다, 이야. 낭자는 힐수방에 가셨습니다.”

문 이야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는 성에 거의 들어오지 않으니 대상국사에 가서 참예하고 힐수방에 간다면 누가 본대도 의심할 거리가 없었다.

“대상국사 시줏돈 문제로 낭자께서 절 부르셨습니다. 소인더러 무지 법사와 함께 금액을 맞추라고 하셨습니다. 또 올해 대상국사 납팔 죽에 드는 은자를 이가에서 시주하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대상국사와 관련된 일은 모두 소인이 총괄하라고도 하셨습니다.”

(※납팔臘八: 음력 섣달 초파일. 석가모니가 성불한 날. 사찰에서는 법회가 열리고 민간에서는 납팔 죽을 먹는 풍습이 있다.)

영해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들고 이신을 바라봤다.

“전에는 누가 했지?”

“만 어멈과 손 어멈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당부하셨습니다.”

영해가 정말로 보고하려는 부분은 바로 그 당부였다.

“소인더러 무지 법사와 친분을 잘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무지 법사는 지객승 생활을 십여 년 동안 했고 경성 각 가문에서 기원할 일이 있거나 연등 달기, 속업, 속죄할 일이 있으면 모두 그의 손을 거친다고요.”

영해가 이신과 문 이야를 힐끔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의 놀란 기색이 갈수록 짙어지는 걸 보고 일단 두 사람이 곱씹을 시간을 주려고 뒤에 할 말을 잠시 멈췄다.

“낭자가 또 뭐라고 하셨더냐?”

문 이야가 눈빛을 빛내며 다급하게 물었다.

“무지 법사가 술을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강남 도화주를요. 무지 법사가 다도에도 정통하고 백차를 제일 좋아한다고도 하셨습니다.”

영해는 두 사람을 살피며 말했다. 처음에 낭자의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매우 놀랐다. 아는 일이 많다고 자부하는데, 이런 이야기는 거의 알지 못했다. 대상국사의 지객승인 무지는 경성에서 어느 정도는 큰 인물이라 할 만한데, 그런 무지가 이런 애호가 있다는 걸 조금도 듣지 못했었다.

문 이야는 눈을 가늘게 떴고, 이신은 놀란 듯이 문 이야를 보며 입을 뻐끔거리다가 영해를 돌아보며 분부했다.

“낭자가 분부한 심부름이니 반드시 신경 써서 해야 한다.”

“예.”

영해가 공손하게 물러난 후 이신은 문 이야를 바라봤고 문 이야는 의미심장하게 그를 바라봤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다가 문 이야가 검지를 입술에 댔다.

“일단 지켜보게. 보기만 하고 입을 댈 일이 아닌 것 같네.”

“이야, 조금 두렵습니다. 행여…….”

이신은 근심이 가득해졌다. 귀신이니 요괴니, 별 해괴한 생각이 들었다.

“두려워할 것 없네. 이가는 대대로 선행을 베푼 가문이네. 하늘은 공평하네.”

문 이야의 단호한 모습에 이신은 살짝 안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척하면 척, 같이 일어서서 난각을 나가 호숫가에 난 길을 따라 산책하면서 경성의 옛일을 이야기했다.

저녁 무렵, 이신은 문장에 관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 여염, 계소영을 만나러 갔고, 문 이야는 효암사 근처, 내시들이 자주 가는 주루, 찻집으로 향했다.

이동은 이가 저택으로 돌아와서 탕을 조금 마시고 화항에 기대서 책을 읽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오늘 반나절 돌아다녔는데 소식이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문 이야와 오라버니 쪽에도 분명 소식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성격도 좋지 않은데……. 휴, 괜찮겠지. 장공주는 영특한 사람이니까 성질을 부려야 할 때, 아닌 때를 알아.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늦지 않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장공주가 사람을 고르지 않는 이상 보림암 밖 별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면? 그렇다고 누군가를 고르게 되면…… 더더욱 영원히 보림암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이동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할수록 더 조바심이 났다.

“낭자, 그 위 낭자가…….”

수련이 휘장을 열고 들어와서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위봉낭이 수련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예요. 우리 칠야가 오셨어요. 하실 말씀이 있대요.”

이동이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옷 준비해줘.”

주가가 장공주를 이리 핍박하는 건 어쩌면 영원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뭔가 아는 거야!

수련이 서둘러 옷을 안고 와서 재빠르게 이동의 옷을 입히고 머리를 말아 올리고 두봉을 걸쳐주었다. 막 입구로 가는데 위봉낭이 문턱을 밟고 뒤돌아봤다.

“밖에 바람 붑니다. 추워요. 두봉 모자를 쓰세요.”

뒤를 따르던 수련이 후다닥 까치발을 들고 모자를 씌웠다. 이동은 모자 깃을 꽉 여민 다음에 위봉낭을 따라 나갔다.

이가의 경성 저택은 그리 크지 않았고 이동의 거처엔 화원이 없어서 자등 산장처럼 영원을 만나는 게 편하지는 않았다.

“우리 칠야는 서쪽 문 곁 문간방에 계십니다. 어떻게 할까요?”

“거기서 만나면 돼.”

서쪽 문은 장 태태가 이동과 함께 있으려고 자등 산장으로 옮긴 이래 자물쇠를 채운 후에 다시 열지 않았다. 당직도 없어서 문간방 두 채 모두 비어 있었다.

서쪽 문은 이동의 거처와 제일 가깝고 외지고 조용한 곳이라서 남이 알면 안 되는 만남을 하기 좋은 곳이긴 했다.

이동이 다가가자 영원이 문간방에서 나왔다. 이동은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이야기해요.”

달빛이 흐린 밤이라서 문간방은 코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안으로 들어갔더니 눈앞이 캄캄했다. 이동보다 시력이 좋은 영원이 그녀가 의자를 감지할 수 있는 곳에 옮겨주었다.

“앉아요. 닦아서 깨끗합니다.”

“여기 문간방 두 곳을 닫아두긴 했지만 매일 청소해요.”

이동이 대답했다. 이 방 안의 물건은 닦지 않아도 깨끗했다.

어둠 속에서, 영원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의자 옮기는 소리만 들렸다. 은연중에 그가 맞은편에 앉는 게 느껴졌다. 매우 가까운 듯했다.

“장공주가 오늘 아침에 궁으로 소환되었어요.”

이동은 본론에 돌입했다.

“들었습니다.”

“수국공부에서 혼인을 강요해요. 당신이 손 쓴 건가요?”

이동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영원은 그녀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내가 수국공부엔 손이 닿지 않아요. 주 육소야에게 몇 마디 했을 뿐입니다. 장공주가 내년에도 혼인하지 않고 후년이 되면 서른 넘어서 혼인하는 거라고요.”

이동이 허리를 세웠다. 역시 그와 관련된 일이고 자기와 관련된 일이었다, 역시나…….

잘하는 걸까 잘못하는 걸까. 그녀가 손을 댄 바람에, 영원이 사주한 바람에 금을 삼키는 그 비극이 앞당겨진다면 어떻게 하지.

“장공주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이동이 꼿꼿이 앉아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모습에 영원은 조마조마해져서 저도 모르게 나긋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당신이 뭘 알아요.”

이동의 목소리가 은근히 다급하고 날카로웠다. 살짝 귀띔했을 뿐인데, 장공주가 자신의 의중과 달리 앞으로 나가거나 아니면 낙담해서 죽음으로 회피해버리면 어쩌나.

“내 말 들어요.”

영원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차분함이 지나칠 정도라고 평소에 생각해 왔는데 이번엔 왜 이렇게 초조하게 구는 걸까. 그는 의외라고 생각하는 가운데 이유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

“사람을 골라 혼인하라고 궁으로 소환한 걸 겁니다. 장공주는 곧 서른이고 장공주가 열댓 살 때부터 태후께서 사람을 골라주었어요. 이런 일엔 익숙합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하지만 이번엔 예전과 달라!

이동은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후회됐다. 장공주의 약점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묘하게 영원을 신뢰하는 마음이 들었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게 이상했다. 게다가 그 신뢰가 지나쳤다.

그는 큰일을 하려는 사람이다. 온갖 나쁜 수단도 가리지 않아야 하는 큰일. 일, 사람,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려 들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제 몸이 부서질 테니까.

그는 잘못이 없다. 그를 믿는 게 아니었다.

영원은 이동의 숨결이 예전과 달라지기라도 한 듯, 그녀가 거리를 두고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궁 안은 나도 방법이 없습니다. 돕지 않는 게 아니라…….”

그녀가 왜 갑자기 변한 건지 알지 못한 채 영원은 직감적으로 무심결에 해명했다.

“됐어요.”

이동이 짧게 대답했다. 그가 방법을 찾으려고 하면 더 엉망이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여차하면 사람을 골라 혼인하면 되지요. 그러면 됩니다.”

영원은 더 불안해져서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려고 했지만, 이동은 그의 농담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곧바로 일어서 문간방에서 나와서 거의 달리듯이 돌아갔다.

영원은 곧바로 뒤따라 나와서 몇 걸음 쫓아가다가 금세 어둠 속에 사라지는 이동을 멍하니 보면서 한참을 서 있었다. 불안이 조금씩 짙어졌다. 오늘 밤하늘처럼 짙어졌다.

각문으로 나간 영원은 말도 타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발치의 청석 바닥을 바라보며 골목으로 나갔다. 그는 아직도 조금 떠들썩한 거리를 바라보다가 위봉낭을 바라봤다.

“주육이 어디 있는지, 잠들었는지 알아 봐라.”

“예.”

위봉낭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영원은 조금 허전한 마음으로 고개를 떨구고는 바람에 흔들리는 대홍빛 등롱 아래를 걸었다.

등불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 수시로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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