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세속과 탈속
이동이 얼떨떨해 있는데 대상국사 주지 청공 큰스님이 들어왔다.
“이 낭자, 어떤 점괘를 뽑았습니까?”
이동이 서둘러 돌아서서 예를 갖추고 빈 첨대를 청공 큰스님에게 건넸다.
“큰스님, 이것 좀 보세요. 이상해요. 혹시 이거…….”
청공 큰스님은 생각이 많은 듯 첨대를 받았다.
“이것이었군요. 몇십 년 만에 이 점대가 나왔군요.”
이동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첨통 안에 빈 첨대가 있었다는 건, 전생까지 포함해서 몇십 년 만에 처음 안 사실이었다.
“다들 이 첨통 안에 첨대가 200개 있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201개입니다. 201번째 첨대가 바로 이것이지요. 다른 첨통엔 다 200개뿐입니다. 이 점괘는 답이 없습니다. 낭자가 물음을 구한 일이 어쩌면 인과 변화가 지나치게 복잡하게 뒤엉켰거나, 불조께서 가르침 주기 적당치 않은 것이겠지요. 혹은 삼계(三界) 오행(五行)을 넘은 일이거나, 또 어쩌면, 왜인지 아무도 몰라서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청공 큰스님이 온화하게 하는 말에 이동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목이 바짝 말랐다.
“큰스님, 큰스님처럼 수행을 오래 하신 분도 전혀 모른단 말씀이신가요? 큰스님…… 뭔가 아는 게 있으신가요?”
청공 큰스님의 미소가 더 온화해졌다.
“불조도 모르는 일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점괘를 볼 수 없지만 나쁜 건 아닙니다. 예측하지 못한다는 건 하기 나름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낭자는 복과 은혜를 받은 분이니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하늘이 도우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큰스님.”
이동은 놀라움과 당황함을 애써 누르며 청공 큰스님에게 예를 갖추고 뒷걸음쳐서 다급하게 지장전에서 나갔다.
청공 큰스님은 이동의 뒷모습, 그리고 손에 쥔 빈 첨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침에 점괘가 괴상하더라니, 이 빈 첨대 때문이었구나. 하지만 왜 이 점대가 나왔을까?
청공 큰스님은 첨통을 돌아보다가 첨대를 들고 돌아섰다. 그렇게 몇 발짝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거무스레한 첨통을 바라보며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돌아섰다. 대전 밖으로 나가자 찬 바람이 불었다. 청공 큰스님은 첨대를 쥔 채 찬 바람 속에 서 있다가 한참 만에 돌연 다시 돌아가서 빈 첨대를 다시 첨통 안에 넣었다.
하늘이 정한 천도이니 그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대상국사 앞 제당의 작은 방에 이동이 상석에 앉고 수련과 녹매가 아래 함께 앉아서 풍성하고 맛있는 공양을 먹었다. 막 공양을 물리고 차를 올리는데, 밖에서 무지의 웃음 섞인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낭자, 계십니까?”
“들어오세요.”
이동이 일어서자 녹매가 재빨리 휘장을 걷었다. 안으로 들어온 무지는 합장하고 세 사람 모두를 향해 예를 갖췄다.
“공양이 입맛에 맞으셨는지요? 혹시 안 좋은 점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이 낭자의 가르침을 얻는 건 주방 사형들의 큰 복입니다.”
“오랜만에 먹었는데 법사님들의 솜씨가 더욱 느셨어요. 조금도 문제가 없었답니다.”
추켜올리는 이동의 칭찬에 무지는 웃으며 감사했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요. 좋게 말씀해주시는군요. 사형 대신 감사 인사드립니다.”
인사치레를 서로 주고받은 다음 무지가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댁의 어멈이 하는 말이, 이 낭자와 태태, 그리고 대야가 올해는 성 밖 장원에서 새해를 맞이한다고 하던데, 올해 기복 법회는 성 밖에서 하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저희 사찰에서 하십니까? 낭자도 아시다시피 연말엔 법회가 많지만 낭자 댁의 법회는 저희 사찰에서 가장 중요한 법회입니다. 정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승과 사형들은 일찍 준비하고 싶습니다. 낭자와 태태를 위해 복을 기원할 수 있는 건 저희뿐만 아니라 사부에게도 영광인 일입니다.”
“성 밖에서 법회를 하든 안 하든 대상국사 법회는 당연히 해야지요. 어머니가 안 그래도 오늘내일 사람을 보내 상의한다고 하셨어요. 올해도 어김없이 법사와 여러 스님께 수고 끼쳐야겠습니다.”
무지의 생각을 읽은 이동은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무지를 보고 있으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지 스님은 경성의 진정한 만사통이었다. 어느 집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어떤 말 못 할 일이 있는지, 응어리가 있는지, 모르는 게 없었다. 그는 입이 무거운 편이 아니었고, 이전 생엔 영해와 사이가 좋아서 영해가 그에게서 쓸 만한 소식을 꽤 많이 얻었었다. 이번에도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이동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올해는 오라버니가 집으로 돌아왔으니 관례보다 은자를 더 보태겠다고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오라버니의 관사 영해라는 사람을 보낼게요. 많이 가르쳐 주세요.”
이가가 올해 시줏돈을 줄이지 않고 더 많이 낼 거라는 걸 알아들은 무지는 순간 기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한참 더 덕담한 후 공손하게 물러갔다.
이동은 수련, 녹매를 데리고 대상국사에서 나가서 시킬 일이 있으니 영해를 보내 달라고 이신에게 전하라고 어멈을 보냈다.
경성으로 온 문 이야는 우선 육부 관아로 향했다. 육부 관아 앞을 한 바퀴 돌고는 선덕문 밖으로 가서 잠시 돌아봤다. 그러고 밤새 떠들썩함이 사그라들고 조금 조용해진 와자 몇 군데를 돌아보고 마지막에 금명지를 둘러본 뒤에 청풍루로 향했다. 독채에 가지 않고 대당에 앉아서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심부름꾼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다음 영상지(迎祥池)로 가서 방생하는 걸 지켜봤다. 그렇게 경성을 거의 한 바퀴 돈 후에야 느긋하게 이가 저택으로 돌아갔다. 마침 저택에 있던 이신은 호숫가 난각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린 채 글을 짓고 있었다.
문 이야가 들어가 고개를 내밀고 이신이 반쯤 쓴 문장을 바라보자, 이신은 그제야 문 이야를 발견했다.
“이야군요. 어찌 오셨습니까?”
“대낭자도 오셨네. 대상국사에서 참예 중이시네.”
한 바퀴 도느라 지친 문 이야는 털썩 주저앉았고, 사환 청평이 서둘러 차를 끓여서 건넸다.
“압니다. 아동이 영해를 불러갔습니다. 연말에 시주하고 선행을 베푸는 일이라고요. 이야는 무슨 일로 성에 오셨습니까?”
이신이 붓을 씻으며 물었다. 오늘은 글이 막히니 그만 쓰자 싶었다. 이야와 아동이 함께 성으로 들어오다니, 분명 일이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이신은 차를 마시는 문 이야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문 이야는 어제 수국공부 조 노부인이 보림암에 청첩을 잔뜩 두고 온 일, 그리고 복안 장공주가 이른 아침부터 궁으로 소환된 일을 이야기했다.
“이 일 때문에 낭자가 걱정하는 걸세.”
“걱정은 왜요? 주가가 장공주에게 안 좋은 일을 할까 봐요?”
이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는 일이었다. 굳이 그런 짓을 왜.
“그건 아니네. 낭자는 귀비와 황상이 장공주를 억지로 혼인시킬까 봐 걱정하는 거네.”
이신은 어리둥절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혼인이라는 게 나쁜 일이 아닌데 무슨 위험한 일이 있다는 걸까.
“그 일에 무언가 현묘한 이치가 있는 겁니까? 이야, 알려주십시오.”
이유가 떠오르지 않은 이신이 공수하며 가르침을 청하자, 문 이야가 의문 가득한 이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없네. 장공주가 혼인하고 싶지 않고, 억지로 가는 건 더더욱 싫어한다, 이게 다네.”
“여인인 장공주의 일을 우리가 논의하는 건 법도에 맞지 않지만, 장공주가 혼인하지 않으려는 덴 이유가 있겠지요? 아동이 아는 겁니까?”
이신이 문 이야 곁에 가서 앉으며 물었다.
“나도 예전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거네. 장공주가 혼인하기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왜 혼인하기 싫은지를 생각했겠지. 쥐락펴락 당할까 봐? 아니면 혼인에 음모가 있을까 걱정해서? 아니면 주가가 끼어든 게 화가 나서? 또 아니면 황상에게 불만이 있어서? 생각할 만한 이유가 참 많았겠지.”
이신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아니란 말입니까? 이유가 없다면 멀쩡히 왜 혼인하지 않으려 하겠습니까. 혼인하지 않는 여인이 어디 있습니까.”
“음, 자네 말이 옳네. 하지만 난 지금은 장공주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네. 혼인하지 않는 건, 그냥 혼인하고 싶지 않아서이네. 이유 같은 건 없어. 그냥 혼인하고 싶지 않은 것이네.”
말장난 같은 문 이야의 말에 이신이 실소를 터뜨렸다.
“혼인하고 싶어 안달 난 규수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이런 건 또……. 이야,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신은 말을 다 하기 전에 깨달은 바가 있는 듯이 문 이야를 향해 공수했다. 문 이야가 쥐 새끼 같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면 나도, 내가 그렇네. 나는 혼인하고 싶지 않아.”
“그건 문가에 일어난 비극 때문이지요? 혼담이 오간 적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이야가 직접 점찍은 낭자였다면서요.”
이신은 조금도 체면 차리지 않고 문 이야의 말을 반박했고, 문 이야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내 이야기는 하지 말고, 큰 주방의 소유 낭자, 자네 아는가?”
이신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소유에게 꽤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음식 솜씨가 좋고 성격이 강해서 그에게 몇 번 대든 적이 있었다.
“소유 낭자는 아무런 일도 없지만 혼인하고 싶지 않아 하네. 소유 낭자가…….”
“선생!”
이신이 천천히 문 이야의 말을 잘랐다.
“소유 낭자와 어미의 일은 제게 말씀하셨었습니다. 시집의 불인, 불의에 마음을 다쳐 혼인하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아무런 일이 없는 게 아닙니다.”
문 이야는 이신을 흘겨보다가 일어서서 직접 차를 따라서 홀짝이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는 넘어가고, 소유의 일은 예전에 다 지나간 일이네. 됐네, 됐어. 소유는 됐고, 낭자를 모시는 청국이 한번은…….”
“혼인하면 좋은 점이 뭐가 있냐고 했다는 것 말입니까? 선생이 술에 취해서 밤늦게까지 한탄한 걸 제가 아직 기억하는걸요.”
이신이 참지 못하고 웃자, 문 이야도 허허 웃었다.
“내가 말이 참 많았군.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 내 잠시 생각해 보겠네.”
문 이야가 고개를 들고 잠시 생각하다가 서안을 살며시 내리쳤다.
“있군! 은거하는 서생이 있다고 치세. 세상을 뒤흔들 재주가 뻔히 있는 사람이 벼슬길에 오르기 싫다고 하네. 부귀영화고 권세고 다 필요 없다고 하고. 소박한 옷, 평범한 음식, 비 가릴 집 하나 있으면 된다며 세상을 느긋하게 누비는 그런 서생이 있다고 치면, 자네는 어떨 것 같은가. 세상 도리에 맞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나?”
이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장공주가 그런 서생이 되고 싶답니까?”
“비슷하네. 누군가는 부귀영화를 원하고, 누군가는 공을 세우길 원하네. 누군가는 이름이 세상에 남길 바라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속박되는 것 없이 세상을 자유롭게 누비길 바라네. 사내도 그렇고 여인도 그렇네. 세상에 거의 모든 여인이 좋은 사내를 만나서 혼인해서 내조하고 아이를 잘 기르며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지만, 그렇지 않은 평범하지 않은 여인도 있네. 장공주처럼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