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52화 (252/463)

252화: 내용 없는 점괘

“밖에서 기다려.”

이동은 강환장의 태도에 돌아서서 수련에게 분부했다. 수련은 대답하지 못하고 이동과 강환장을 번갈아 봤다.

“괜찮아. 가 봐.”

이동이 다시 분부하자 수련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예. 그럼 전…… 차, 차를 내올게요!”

강환장은 난각에서 물러가는 수련을 힐끔 바라봤다. 명 짧은 저 시녀를 기억했다.

“할 말이 뭔가요. 말해요.”

이동은 앉을 생각이 없는 듯 의자 옆에 서 있었고, 강환장도 앉을 생각 없는 듯 이동을 직시했다.

“곡씨와의 혼약, 당신이 짠 판인가?”

“아니에요.”

이동은 지극히 간결하고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강환장은 멈칫하다가 곧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렇지. 당신은 거짓말이 제일 능숙하지. 몇십 년 전부터 그랬어. 당신이 한 짓이 분명한데 감히 이렇게 나를 빤히 바라보며 아니라고 하는군!”

이동의 눈빛이 아득해지고 피로함이 묻어났다. 그녀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맞는데 아니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해명할 의욕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와 단 한 글자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하는 건 더더욱 싫고. 눈을 마주치는 것도 싫었다.

그는 이미 그녀가 내버린, 앞으로 영원히 다시 보지 않길 바라는 물건이었다.

“할 말이 남았나요?”

이동이 냉담하게 다시 물었다.

“물론이지. 대답해 보시오. 나, 강환장이 당신에게 뭘 잘못했소? 강가가 당신에게 뭘 잘못했지?”

강환장은 분노로 속이 끓었다. 다 이 여인 때문이다. 이 여인이 자신의 이번 생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순조롭게 높이 날 수 있었던 이번 생을. 다 이 여인 때문이다. 환생한 후에 모든 걸음이 힘겹고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것도 모두 이 여인 때문이다. 이 여인이 날 해치려고 했기에!

이동은 소리 없이 웃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답할 수도 없고.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는 정말로 자신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고 의리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웃음이 나지 않는 웃긴 소리였다.

“강 세자, 무슨 말씀이세요. 강가와 곡가의 혼약이 먼저 있었어요. 영존(令尊)이 친히 정한 혼약이에요. 곡 낭자는 부친이 돌아가시고 모친이 병들었으니 이치로든 정으로든 강가는 그 혼약을 다시 지켜야죠. 곡 낭자는 서생 가문 출신이니 분명 당신과 금슬 좋고 원만하게 살아가겠죠.”

강환장이 차갑게 웃었다.

“다른 사람 없고 당신과 나뿐이니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당신이 내 정체를 알고, 나도 당신의 정체를 아는데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할 것 있소? 곡씨 일이 당신이 짠 판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이지? 부부로 몇십 년 살았는데 이렇게 악랄한 줄은 정말 몰랐군!”

이동은 길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강 세자, 볼일 없으면 이만 돌아가세요. 섣달이라 상인 가문은 1년 장부를 조사하느라 매우 바쁘답니다. 장부가 쌓여 있어요.”

“대답하시오. 곡씨를 어디서 찾아낸 것이오?”

강환장은 이동의 말을 못 들은 듯이 계속 따져 물었다.

“곡씨의 내력은 돌아가서 곡씨에게 물으세요. 아, 그 곡씨가 날 찾아왔었네요.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엔 강가 사당에 날 들여주겠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강가에 사줬던 장원, 점포를 달라고 하더군요. 난 거절했어요. 강가는 청고한 가문이라 그런 아도물을 제일 무시하니까요. 강 세자,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세요. 곡씨의 내력, 곡가와 강가의 혼약은 돌아가서 영존에게 제대로 물어보시고요.”

이동은 강환장이 넌덜머리 났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서슬 퍼런 태도를 보였다. 세상이 뒤바뀌어 예전이 아닌데도 여전히 이렇게 고집스럽게 굴다니. 지금도 몇십 년 전처럼 위세 부려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이렇게 빙빙 돌리기만 할 것이오?”

강환장은 무심결에 두 주먹을 움켜쥐고 이동을 노려봤다. 너무나 화가 났다. 몇십 년 동안 뿌리 깊게 박힌 생각이 있어서 자신이 무시무시한 착각을 키우고 있음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켕기는 게 있어서 이러는 것이다. 찔리는 게 있으니 내가 두려울 것이다. 나는 이 여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나는 이 여인의 하늘이다. 유일한 하늘!

“강 세자, 당신과 나는 이미 부부라는 명분이 사라졌어요. 오늘 당신을 만난 건, 부부였던 관계를 생각해서예요. 오늘 만남으로 마지막 도리는 다했어요. 남녀가 유별합니다. 돌아가세요.”

이동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강환장이 성큼 다가와 앞을 가로막았다. 이동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들고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직시했다.

“강 세자, 오늘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오늘의 당신도 예전의 당신이 아니고요. 나는 정신 차리고 지금을 살고 있어요. 그런데 강 세자는 어제와 오늘을 구별 못 하고 혼란 속에 사는군요. 그 점만으로도 당신은 나와 천지 차이가 나는 겁니다.”

이동은 그 말을 남기고 강환장을 밀치고 난각에서 나와 곧장 사라졌다.

강환장은 이동에게 밀려 비틀거렸다. 마음속에 무언가도 밀려난 기분이었다. 밀려서 소리도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 강환장은 남쪽 창에 기댔다. 마음이 텅 빈 느낌이었다. 온몸에 감각이 없는 나무 인형 같았다.

등화원으로 돌아간 이동은 만 어멈을 불러 장공주가 입궁한 일을 말해주고 어서 경성으로 들어가서 무슨 소식이 없는지 힐수방에 가 보라고 분부했다.

복안 장공주를 잘 모르는 만 어멈은 장공주가 입궁한 것이 무슨 문제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동의 표정이 평소와 다른 걸 보고 걱정이 되어서 얼른 마차를 준비해 경성으로 향했다.

이동은 두봉을 걸치고 나와서 회랑에서 서성거렸다. 서성거릴수록 혼란스럽고 걱정스러웠다. 곁에서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수련에게 어서 짐을 챙기라고 명령했다. 경성으로 들어가서 며칠 머물 생각이었다.

수련은 서둘러 청국과 시녀들을 불러 짐을 챙겼다. 이동은 정원에 가서 장 태태에게 경성으로 가는 일을 이야기했다.

장 태태는 장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가 보아라. 사람을 여럿 데리고 가고. 쓸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휴. 오늘 입궁한 일은 분명 어제 청첩과 관련 있는 일이겠지. 정말 집집마다 어려운 일이 있구나. 장공주의 어려운 일은 예전에 네가 겪은 것보다 훨씬 어렵구나.”

이동이 물러나서 발을 내려놓기도 전에 장 태태가 등 뒤에서 물었다.

“나도 함께 갈까? 내가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니.”

“괜찮아요. 오라버니도 있잖아요. 어머니랑 같이 들어가면 너무 눈에 띌 거예요. 오히려 안 좋아요. 어차피 가까우니까, 어머니가 필요하면 사람을 보낼게요.”

“그러려무나. 그럼 가 보아라. 참, 이야와 함께 가라.”

“응, 그럴 생각이었어요.”

이동은 정원에서 나와서 문 이야를 찾아갔다. 문 이야는 이야기를 듣고 우선 물었다.

“강환장이 뭐라고 하던가요?”

“곡씨 일, 내가 짠 판이냐고요. 그리고 자기가 나한테 뭘 잘못했냐고요.”

이동은 지극히 간단하게 대답했다.

“음, 첫 번째 물음은 똑똑한 거고, 두 번째 물음은 어리석군요.”

평가까지 하는 걸 보니 문 이야는 그리 초조해하지 않는 듯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장공주는 괜찮을 겁니다. 적어도 지금은요.”

이동은 무심결에 한시름 놓았다. 문 이야를 향한 믿음은 뼈에 새긴 듯이 강했다.

문 이야는 이동이 안도하는 모습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낭자, 지나치게 신경 써서 혼란스러운 겁니다. 장공주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건 몰라도 태의원, 승록사(僧錄司: 승려를 감독하던 관직명) 두 부분은 꽉 쥐고 있습니다. 십여 년 동안 쥐고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궁에서 일어난 일도 훤히 꿰고 계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일이 생기더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너무 초조했어요.”

이동은 금세 알아듣고 조금 부끄러워졌다.

“신경 쓰는 만큼 흐트러지는 법이지요. 인지상정입니다. 일단 진정하세요. 초조해하지 마시고요. 먼저 가세요. 저는 천천히 가겠습니다. 강환장이 막 돌아갔는데 낭자가 급하게 가느라 그를 따라잡으면 어쩝니까.”

문 이야가 웃으며 말했다.

“말씀대로 할게요.”

확실히 마음이 한결 진정된 이동은 살짝 무릎을 구부리며 대답했다.

문 이야는 그녀가 뜨락 밖으로 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여복과 두 사환에게 짐을 챙기고 마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동은 시간을 좀 끌다가 느긋하게 성으로 들어갔다. 오시쯤이라 수련이 경성 이택(李宅)으로 가서 식사할 건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먹을 건지 물었다. 이동은 그물창을 통해 사람이 바글바글, 새해 분위기가 넘치는 거리를 바라봤다.

“대상국사에 가서 공양 먹자. 너랑 녹매가 같이 가면 돼. 청국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택으로 가라고 해.”

수련이 분부를 전하자 대교는 마차를 몰고 모퉁이를 돌아 인파를 따라 서서히 대상국사로 향했다. 나머지 마차 두 대는 이택으로 곧장 향했다.

오늘은 초이틀이라 대상국사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다. 이동과 함께 나온 어멈이 향객에게 공양을 제공하는 재당(齋堂)으로 가서 공양을 예약하고, 수련과 녹매는 이동을 따라 산문 안으로 들어가 참예했다.

막 대웅보전으로 들어서는데 무지가 불상 뒤에서 나오다가 이동을 보고는 서둘러 다가와 예를 갖췄다.

“이 낭자, 오랜만입니다. 어쩐지, 소승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까치가 울더라니 이 낭자가 오셨군요.”

이동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각 사찰에 큰돈을 시주했고, 대상국사는 성안에서 가장 향불이 왕성한 사찰이니 이가 식구 모두 큰돈을 시주했다.

이동은 혼인하기 전에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함께 자주 다녔고, 지금도 사찰 안에는 두 사람이 달아준 그녀의 연등이 달려 있었다.

“평안하시지요?”

이동은 예를 갖췄다. 무지를 보고 있으니 말 못 할 감정이 치솟았다. 젊었을 때 지객승이던 그의 모습을 이미 잊고 살았다. 지금 이렇게 보고 있어도 붉은 가사를 걸치고 온화하고 무해한 미소를 띠며 누굴 만나도 살짝 허리를 숙이던 겸손하기 짝이 없는 그때 모습이 떠올랐다.

“이 낭자 인당(印堂: 미간)이 밝은 것이 안색이 매우 좋군요. 정말 기쁩니다. 소승, 태태를 오래 못 뵈었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무지가 이동을 살펴보면서 말 속에 다른 뜻이 있는 듯 말을 건넸다. 그의 기쁨과 관심, 모두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어서 이동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어머니는 잘 지내세요. 연말 장부 때문에 바빠서 못 오셨어요.”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노태태부터 태태, 그리고 낭자까지 타고난 복과 은혜를 받으신 분입니다. 선행을 이가처럼 진심으로 베푸는 집안은 본 적 없습니다. 낭자는 앞으로 분명 큰 복을 얻고 장수하실 겁니다. 다 이루실 겁니다.”

“덕담 감사합니다.”

이동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낭자, 점심 드셨나요? 안 드셨으면 공양을 준비할까요?”

“법사께 수고 끼치지 않아도 됩니다. 벌써 준비했어요. 전부터 대상국사의 공양을 먹고 싶었거든요. 점괘 뽑으러 관음전에 가려고요.”

점괘를 뽑는다는 이동의 말에 무지가 얼른 웃으며 말했다.

“낭자, 점괘 뽑으시려거든 지장전으로 가세요. 얼마 전에 사부께서 점괘를 봤는데, 지장보살이 이번 달엔 가장 영험하다고 합니다.”

대상국사엔 언제부터 전해진 건지 모를 자단목 첨통(籤筒: 점괘가 적힌 첨대를 담는 통)이 있었다. 대상국사의 보물 중 하나로 봐도 좋을 영험하기로 유명한 첨통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윗대 큰스님이 그 첨통과 똑같은 첨통을 여러 개 만들어서 각 대전 안에 두었는데, 진짜 영험한 그 첨통은 매달 큰스님이 직접 점괘를 보고 친히 장소를 바꿨다. 이번 달엔 관음전에 있었다면 다음 달엔 가남보살 앞에 있을 수도 있었다. 어디로 옮겼는지는 비밀인데 무지가 그 비밀을 종종 대상국사의 큰 전주에게 흘리곤 했다. 아무래도 돈을 쓴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이동은 웃으며 무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대전에서 나와 대전 옆 지장전으로 향했다.

이동은 지장보살 앞에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향을 피우고 절하면서 한참을 기도했다. 복안 장공주가 순조롭게 뜻을 이뤄서 이번 어려움을 무사히 지나치길, 그리고 몇 년 뒤에 일어날 생사가 걸린 큰 겁도 무사히 넘기고 그 후로 하늘을 훨훨 날게 해달라고.

이동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서 까치발을 들고 높이 놓인 첨통에서 첨대 하나를 뽑았다. 그런데 첨대에 글자가 한 자도 없었다. 재빨리 뒤집어 봐도 역시나 글자 하나 없어서 이동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빈 첨대를 바라봤다. 꽝인가? 첨통 안에 어째서 이런 꽝이 있을 수 있지? 보살 앞에서 장난치는 사람도 다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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