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크나큰 인과
강환장이 느릿느릿, 또박또박하는 말에 무지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허허 웃었다. 친분도 없는 사이에 어떻게 이런 말을. 또 이런 말을 해서 무얼 한다고.
“이씨입니다. 이씨가 판 함정입니다. 자기 대신 곡씨를 들이밀고, 수녕백부 세습을 없앴습니다.”
강환장은 무지를 빤히 바라봤고, 무지는 갈수록 난감해져서 눈빛을 피했다.
“아미타불. 강 장사는 영리한 분입니다. 소승의 말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입니다. 과거는 모두 흘러갔습니다. 모든 것은 인과가 있습니다. 앞을 보십시오.”
“이씨의 함정이라는 말, 믿지 못하시겠지요?”
강환장은 무지가 뭐라고 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었다.
“하지만 난 압니다. 이씨입니다. 이씨는 열여덟이 아닙니다. 이씨는…….”
강환장의 말이 뚝 그쳤다가 계속됐다.
“보기엔 열여덟아홉 같아도 천년 수행한 여우가 열여덟 낭자의 거죽을 쓴 것입니다. 젊은 사람의 거죽을 쓴 것뿐입니다.”
“아미타불. 불문 정토에서 요괴라니요. 강 장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곡 부인 같은 현숙한 아내가 계시지 않습니까. 앞을 보십시오.”
무지는 모호하게 설득인 듯 아닌 듯 늘어놓았다.
강 장사, 이런 모습은 조금 추태를 보이는 듯하군. 곡씨가 온유하고 아름답고 예를 아는 좋은 여인이라던데. 게다가 서생 가문 출신이고. 혼수만 빼면 곳곳이 이씨보다 낫다던데…….
그렇지. 이가가 강가의 은자, 점포, 장원을 모두 거둬갔지. 수녕백부도 차용문서를 썼고. 휴. 영웅도 푼돈 앞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더니, 부유했다가 궁핍해지는 것이 제일 괴로운 일이지.
“황량몽, 혼백을 되돌린다는 것, 들어보셨습니까?”
강환장이 빤히 보며 묻는 말에 무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다 이야기로 세상 사람을 설득하는 가설입니다. 그런 일이 정말로 있겠습니까!”
강환장은 실망하지 않고 그렇냐고 대답했다. 처음 찾아와서 이런 말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그가 얻은 기이한 기회는 나중 일이었다.
“그럼 가설이라고 치지요. 법사, 누군가 혼백이 돌아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예전과 똑같겠지요? 변화가 없어야 마땅하겠지요?”
그것은 강환장의 가장 큰, 하지만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없는 두려움이었다.
“아미타불. 이런 가설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무지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말을 이었다.
“인생 만물, 모두 인과에 따라 윤회합니다. 정말로 혼백이 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크나큰 인과가 있어서겠지요. 그런 크나큰 인과라면 예전과 같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소승의 수행이 얕아서 그냥 해 보는 말입니다. 정말로 혼백이 돌아온다면, 그야말로 하늘을 거스르는 큰일 아닙니까. 그런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무지는 강환장의 얼굴이 갈수록 창백해지고 심지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걸 보고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강 장사가 오늘 심하게 이상하군.
“가르침 감사합니다, 법사. 소생…… 큰 깨우침을 얻은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강환장은 일어서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서 급하게 걷다가 돌연 뒤돌아서 더 다급하게 무지 앞으로 들이닥쳐서 그를 붙들었다.
“양 구야가 어느 댁 낭자와 혼인했습니까? 어느, 어느 댁입니까?”
“고양이 사료를 파는 오가 낭자입니다.”
무지는 놀라서 뒷걸음치고 싶었지만 강환장이 붙들고 있어서 꿈쩍할 수 없이 얼른 대답했다.
강환장은 훅 숨을 내뱉더니 순간 안색이 한결 좋아져서 무지를 향해 공수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단숨에 멀리 걸어간 강환장은 저 멀리 수녕백부 지붕이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늦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을 내뱉고 나니 순간 온몸이 쑤시고 다리가 떨려서 겨우 걸음을 옮겨 길가의 차 점포로 가서 차를 한 그릇 달라고 했다.
환생은 크나큰 인과고, 크나큰 인과인 이상 예전과 다를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큰 인과라고 해도 제왕의 재목, 진룡(眞龍)이 바뀌는 그런 큰일은 바꿀 수 없지! 그건 하늘의 섭리다!
대국이 바뀌지 않는 한, 다른 건 예전과 다르다고 한들 다 사소한 것이라 연연할 필요가 없다!
강환장은 차를 홀짝였다. 위가 따듯해지는 것이 마음이 차차 편안해지고 정신이 돌아왔다.
그동안 너무 방심했다. 이씨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중에 그녀도 자기처럼 혼백이 돌아온 걸 알았을 땐 그녀를 너무 믿었다. 그녀를 미워하긴 했지만, 남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강가 며느리, 자신의 부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더 하면 안 된다.
강환장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또 스멀스멀 피어나는 분노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억눌렀다.
무지의 말이 맞다. 다 지나갔다. 다시 삼 개월 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과거는 과거일 뿐, 이제 앞을 봐야 한다.
계 천관의 말이 맞다. 그의 집, 수녕백부는 더는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된다. 더는 웃음거리가 되면 안 된다.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
그 생각이 미치자, 머릿속이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머릿속이 밝아지면서 가슴은 칼로 베는 것 같았다.
예전엔 수십 년 동안 후택 일에 관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집안일, 서무, 묻지도 듣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 수십 년 동안 그의 수녕백부, 나중의 수녕왕부는 질서정연하고 안팎이 엄밀하며 종복 모두 예를 알고 사리에 밝았다. 경성에서 손꼽히는 집안이었다.
이 모든 것이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이치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수녕백부를 다스리는 일이 이토록 까다롭고 골치 아픈 일이었구나.
그의 소홀함은 예전의 예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리고 은자도.
강환장은 마시다 만 차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분명 은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씨와 혼인했을 터. 그런데 언제부터 은자를 아도물로 여기고 자신의 생활에서 파내서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물건으로 여기기 시작했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의 수십 년 동안 은자가 얼마든 그저 입만 열면 그만이었다. 언제부터 은자를 멸시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강환장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고통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무 소홀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잘못을 했다. 이씨의 이상함을 가벼이 생각해선 안 됐다. 고씨를 예전보다 빨리 집으로 들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바람에 예전과 달라졌다. 이씨를 집에서 내보내는 게 아니었다. 그 바람에 그 여인에게 기회가 생겼다. 은자를 무시해선 더더욱 안 됐다. 고가에게 10만 냥을 쉽게 내준 바람에 그가 황당무계하고 도덕 없는 사람이라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되어 버렸다.
“나리, 괜찮으시지요?”
강환장이 양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본 차박사가 조마조마한 듯 다가와서 툭 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네.”
강환장이 고개를 들었다. 차박사를 향해 웃어 보이고 싶었지만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할 일이 있어서 그러네. 괜찮네.”
“그럼 다행입니다.”
강환장이 별일이 없어 보이자 차박사는 안도하며 웃음 띤 얼굴로 돌아갔다.
강환장은 그릇을 들어 천천히 차를 머금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소홀했던 것과 잘못을 다시 떠올리면 안 된다. 앞을 봐야 한다. 지금을 잘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계 천관이…….
계 천관이 진왕을 보좌하려 한다!
그 생각에 분노만 치밀었다. 진왕야는 하늘이 정한 진명 천자다!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니 계 천관, 혹은 다른 누가 보좌할 필요가 없다. 계 천관이 허투루 나섰다가 큰일을 망칠지도 모른다.
설령 일을 망치지 않더라도, 이런 때에 계 천관이 진왕에게 의탁하다니. 그럼 자신은 어쩌나. 계 천관과 계가가 있는데 자신이 어찌 천자의 제일 신하,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그 자리에 오르나.
자신은 계 천관하고 비교할 수 없고 강가는 계가와 비교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차분히 생각해야만 한다.
강환장은 차를 다 마시고 잠시 더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쑤시는 다리를 끌고 수녕백부로 돌아갔다.
강환장이 대문으로 들어온 순간 곡 대내내는 기별을 듣고 다급하게 맞이하러 나갔고, 진 부인의 정원으로 향한 길목에서 강환장을 따라잡았다. 강환장은 조금 겁먹은 듯하면서도 용감하게 시선을 마주하는 곡씨를 돌아보고는 한참 가만히 있다가 돌아서서 싸늘하게 말했다.
“어머니께 문안 올리러 같이 갑시다.”
곡 대내내는 멈칫하다가 곧 매우 기뻐하며 다급한 걸음으로 뒤쫓았다. 그렇게 강환장 뒤에 살짝 떨어져서 정원으로 들어갔다.
진 부인은 아들과 나란히 문안을 올리는 곡 대내의 모습에 속이 터질 듯했다.
“누가 들어오라고 했느냐? 이 천것, 이 문을 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저것을 내보내라!”
아들이 있으니 진 부인은 당당해졌다. 강환장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 곡씨는 아버지께서 직접 고르고 직접 정한 며느리입니다. 예부의 판결서, 황상의 친필 윤허도 있습니다. 천것이라니요. 이 문을 넘지 말라니요. 아버지 체면에 먹칠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황상의 성지를 거역하는 겁니까.”
진 부인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강환장을 바라보며 입을 뻐끔 또 뻐끔대다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아예 손수건을 휘두르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불쌍한 내 신세야.”
강환장은 모친의 울음소리에 짜증이 몰려와서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오 어멈은?”
강환장은 진 부인 비위를 가장 잘 맞추는 오 어멈부터 찾았다.
“오 어멈은 일가가 속량해서 저택에서 나갔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봉운이 할 수 없이 눈 딱 감고 대답했다.
“저택에서 나가?”
강환장은 아연했다. 이 저택에서 오 어멈이 하나라고 하면 둘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없는데. 거의 또 하나의 안주인이라고 해도 다름없는 오 어멈이 속량해서 저택에서 나가?
“언제 간 것이냐?”
봉운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한 달 하고 보름 전이에요. 폐병에 걸렸대요. 전염되는 병이라서 부인께서 더는 저택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오 어멈이 청해서, 부인께서 거간꾼을 불러서 오 어멈 일가의 몸값을 계산하고 270냥을 받고 저택에서 풀어주셨어요.”
강환장은 목소리가 낮아졌다 커졌다, 팔자가 사납다고 울어대는 진 부인이 돌연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 사람이 나를 낳고 기른 친어머니인가? 정말로 이 여인이 나를 낳은 것인가?
이러니 세상을 떠난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지. 살아있던 세월엔 어땠었지? 이런 모습이었었나? 이씨는 이런 걸 어찌 견뎠지? 아니, 예전엔 너그럽고 기품 넘치셨는데…….
강환장은 고개를 저었다. 더 물을 것도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고 싶지 않았다. 더 보고 싶지도 않아서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진 부인을 향해 장읍하고 돌아서서 나왔다.
곡 대내내는 예를 갖추지도 않고 강환장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강환장은 변함없이 노티 나는 솜옷을 입은 고 이낭과 청서를 발견했다. 두 사람이 불룩한 배를 내밀고 회랑에 서서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