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배부른 한 끼
계 천관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잘 듣게. 과거는 다 지나갔네. 거론할 것 없어. 곡씨가 들어온 일은 기회일세. 자네가 다시 시작할 기회. 곡씨를 잘 대하고, 자네 내택 문제를 잘 처리하게. 부부가 화목하고 처첩이 잘 지내고, 안팎이 유별하고 위아래 질서가 생기면 자네 명성, 수녕백부의 명성도 차차 돌아올 걸세. 예전의 모든 것은, 이씨가 떠났으니 그 잘못도 그 여인과 함께 보내버리게.”
계 천관의 마지막 말은 매우 모호했지만, 의미심장했다.
강환장은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이씨가 떠나고 곡씨가 들어온 다음에 강가의 모든 것이 좋아지면, 예전의 모든 안 좋은 것을 모두 이씨 탓으로 돌릴 수 있다. 며느리를 잘못 들여서, 나쁜 며느리가 집안을 뒤집은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정말로 나를 위한 말이었군!
하지만 왜? 경성을 떠났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강환장은 말도 못 하게 괴로워졌다. 예전엔 경성에서 아무리 멀어져도 경성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은 기껏해야 보름, 한 달이면 상세하게 그의 귀에 들어왔다. 경성을 아무리 오래 벗어나 있어도 경성에 돌아오기 전엔 그가 떠나있던 시간에 경성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은 일의 크기를 막론하고 누군가가 상세하고 소상하게 그에게 알렸다.
예전을 떠올린 강환장은 다시 마음을 칼로 베는 듯했다.
“명심하게. 자네는 진왕부 장사네. 자네가 잘한다고 진왕이 잘한단 소리를 듣진 않겠지만, 자네가 잘못하면 진왕은 반드시 연루되네. 진왕을 위해 생각해야 하네.”
계 천관의 그 말에 매서운 한기가 느껴졌다. 강환장은 움찔하다가 곧 확연하게 깨달았다.
그랬구나. 그래서 여기서 나를 기다렸어. 이런 말들을 하며 깨우쳐 준 것이, 그래, 나처럼 진왕의 휘하로 의탁했구나.
하지만 진왕이 미래의 황상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이가가 강가를 위해 마련해준 재산을 다 거둬갔다고?”
강환장이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 천관이 돈 문제를 물었다. 강환장은 재빨리 생각을 거두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몇십만 냥짜리 차용문서도 썼다고 들었네만.”
계 천관은 싫다는 듯 강환장을 힐끔 보고는 계속 물었다.
휴, 이자가 벌써 진왕부 장사가 된 게 아니라면, 진왕 곁에 아무도 없는 게 아니라면……. 휴.
진왕을 위해 민심을 모으려면 천금시마골, 이런 인물이라도 거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금시마골千金市馬骨: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거금을 주고서 말 뼈다귀라도 산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
아무리 강환장이 엉망이라도, 그가 일찍 진왕을 따른 점을 봐서라도 서둘러 그를 일으켜야 했다. 진왕이 추종자를 아끼고 보호한다는 명성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도. 그런 게 아니었다면 강환장처럼 인품이 저열하고 파렴치한 인간은 진작 땅끝으로 멀리 보내버렸으리라.
“예.”
강환장은 차용증 이야기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전에 어머니였나 아니면 곡씨가 얼핏 이야기했던 것 같았다. 이씨가 잃은 혼수, 그리고 이가가 예전에 강가 대신 저택을 되찾아온 은자에 대한 차용증이었다.
“자네 부친이 세습 수녕백에서 수녕백으로 강등되었으니 녹봉도 반으로 줄었네. 자네 세자 녹봉도 그렇고. 휴. 자네 저택에 안 그래도 저택을 운영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런 어려움이 있는 것도 당연하지.”
강환장은 낭패스러웠다. 몇십 년 동안 돈을 안중에 두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와 그의 강가엔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넘쳤고, 그는 무언가의 가격을 묻는 것조차 껄끄러워했었다. 지금은, 반년 동안 시달리면서 은자라는 두 글자를 겨우 입에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계 천관이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강가의 궁핍함과 어려움을 말하니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난처했다.
“봄쯤에 황상께서 경성과 주변의 하도를 묵 승상가 소칠에게 처리를 맡겼었네. 하지만 그때는 황상께서 아랫사람을 단련하려고 한 일이라 사실 제대로 한 게 아니네. 공부에서 요 며칠 하도 관리할 적당한 인선을 고르고 있어서 자네를 추천했네. 겨우내 고생하게.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자네 집안 형편도 풀릴 걸세.”
계 천관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그렇게 말했다. 이런 일, 이런 말은 사실 그의 도덕심을 위배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매우 거북하고 고통스러웠다.
강환장으로서는 너무나 의외였다.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곧 반응했다.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내게 고마워할 것 없네. 진왕을 위해서네.”
계 천관은 얼굴을 더 찌푸리며 성가신 듯 대답했다.
“됐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세. 일 잘하게. 그리고 자네 집안일, 명심하게. 더는 추문이 생겨서는 안 되네. 자, 됐네.”
계 천관이 손을 휘두르자 강환장은 낭패스러운 모습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길가에 서서 마차가 멀리 사라지는 걸 바라볼 때까지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뺨을 맞고 마차에서 내몰린 기분이었다.
한참 만에 드디어 평정을 찾은 강환장이 진왕부 대문 앞에 묶어둔 그의 유일한 말 곁으로 다가갔을 때, 말은 있는데 독산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독산이 없으니 직접 고삐를 풀었다. 그런데 말이 기분이 안 좋은지, 그가 다가가자 말발굽을 휙 걷어차더니 그를 향해 콧김을 내뿜었다. 강환장은 연신 뒤로 물러났다. 슬픔이 치밀었다. 말까지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건가.
“세자야! 나오셨습니까? 이제 돌아갑니까? 오늘은 왜 이리 빨리 나오셨습니까? 막 들어가셨는데…….”
독산이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비릿한 양고기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어디에 갔었느냐?”
강환장은 너무 슬픈 나머지 성질도 죽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양 잡탕 한 그릇 하고 왔습니다. 왕야와 말씀 나누시면 반 시진에서 한 시진은 걸리니까 시간이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세자야, 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나오셨습니까?”
강환장이 화를 내지 않자 독산은 안도하고 고삐를 풀면서 강환장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침에 뭘 먹었기에 배가 그리 고프단 거냐.”
강환장은 말에 오르면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물었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생각이 많아지니까.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독산이 말을 끌고 가면서 불평했다.
“아무것도 못 먹었습니다. 큰 주방 말이, 대내내가 새로 정한 규칙이랍니다. 저택에 살지 않는 사람은 아침은 자기 집에서 먹고 오라고요. 배불리 먹고 저택으로 들어와서 일하랍니다.”
강환장은 멍하니 듣기만 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곡씨, 그리고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를 정도로 혼란한 수녕백부, 또 이씨 문제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독산에게 말을 건 것인데 독산이 입을 열자마자 곡씨 이야기를 꺼냈으니…….
“그리고 월전도요.”
안 그래도 원망에 속이 터질 것 같은 독산은 기회가 생기자 열심히 불평을 늘어놨다.
“제가 세자야를 모시고 강남에 간 일, 이번 달까지 총 넉 달 치 월전을 못 받았습니다. 장방에 갔더니, 대내내가 월전을 받는 사람은 모두 대내내를 찾아가 받으라는 새 규칙을 정했답니다. 그래서 대내내를 찾아갔지요. 세자야께서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병이 나서 쓰러진 건 분명 제가 잘 모시지 못해서 세자야의 몸이 상한 거라고, 제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1년 치 월전을 깎는답니다!”
독산은 말을 할수록 화가 나서 고삐를 힘껏 휘둘렀고, 그 바람에 말이 춤을 추듯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비틀거렸다. 강환장은 허리를 숙여 독산의 손에서 고삐를 당겨왔다. 독산의 이야기를 듣는데 웬걸 마음이 평안하기만 했다. 남의 집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예전 대내내가 계실 땐 얼마나 좋았습니까. 소인, 대교와 세자야를 모시고 나올 때마다 대교는 번번이 간식을 싸 들고나왔습니다. 동전 꾸러미와 쇄은도요. 예전 대내내 댁의 규칙이랍니다. 일하다가 배곯을까 봐 간식을 준비해 준다고요. 참 맛있었지요. 대교가 그러는데, 예전 대내내는 아랫사람들이 먹는 것으로 각박하게 구는 법이 절대로 없답니다. 지금 우리 대내내 좀 보세요. 아침값도 아끼잖습니까. 이럴 바엔 저도 저택에 살렵니다. 그럼 이불 한 채 값이라도 아끼겠지요.”
독산이 투덜거리며 쉴 새 없이 불평하는 말이 강환장의 귓등을 스쳤다가 다시 두둥실 돌아와서 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대내내와 예전 대내내…….
“성 밖으로 가자. 자등 산장에 간다.”
강환장이 별안간 분부하자 독산이 펄쩍 뛰었다.
“세자야, 어딜 가신다고요? 자등…… 거긴 이가 장원 아닙니까? 대내내…… 아니, 소인 말은 이, 이 낭자 말입니다. 이 낭자는 우리 집안과 연을 끊었습니다. 세자야…….”
“자등 산장으로 간다!”
강환장의 목소리가 매서워졌고, 독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세자야, 못 갑니다. 말이 배를 곯았습니다. 며칠 전에 돌아오자마자 소인, 대내내를 찾아가 보고했습니다. 말은 검은콩을 먹어야 하니 검은콩을 얻어 오려고요. 그런데 대내내 말씀이 세자야가 병이 들어 출타하지도 않는데 일도 안 하는 말을 뭐 하러 검은콩을 먹이냐고 했습니다. 세자야 병이 다 나아서 말을 써야 할 때 먹이라고요. 오늘 나리가 일찍 출타하셔서 미처 검은콩을 받아오지 못했습니다. 며칠 동안 풀만 먹고 배 불리 먹은 적이 없는데 그럴 기운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 밖으로 나가시려면 일단 돌아가서 말부터 배 불리 먹이고…….”
말 위에 탄 강환장의 귀에 독산의 목소리가 맴돌고 맴돌다가 마지막엔 한 끼 배불리 먹인다는 말만 남았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라.”
강환장이 말에서 내리자 독산이 깜짝 놀랐다.
“세자야? 괜찮으세요? 나리도 배고프십니까?”
“말 끌고 돌아가거라. 난 혼자 좀 걷고 싶다.”
강환장이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대상국사의 추녀가 보였다.
“대상국사에 다녀오마. 먼저 돌아가라. 마중 올 것 없다.”
어리둥절해진 독산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환장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다가 분부대로 우선 말을 끌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강환장은 대상국사를 바라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는, 곧 사찰 문 안으로 들어가서야 걸음을 늦췄다. 빙그레 미소 짓는 미륵불 앞으로 다가가서 뒷짐 지고 한참을 올려다보다가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대상국사 안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향불이 왕성했다. 강환장은 경건한 표정의 인파를 뚫고 대전 곁 회랑을 따라 사찰 후원으로 직행했다.
후원에 들어간 강환장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미승을 향해 공수하며 물었다.
“작은 스님, 무지 법사, 계십니까?”
“계십니다. 저 방에 계십니다.”
사미승은 합장하고 답례한 다음 저쪽 승방을 가리켰다. 강환장은 사미승에게 감사 인사하고 승방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무지 법사, 계십니까?”
“누구십니까?”
서둘러 밖으로 나온 무지는 강환장인 걸 보고 손에 옷과 바늘을 든 채 얼른 합장하며 예를 올렸다.
“강 장사셨군요. 강남에서 돌아오셨습니까? 방 안이 누추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소승 얼른 옷을 꿰매고 나오겠습니다. 금방 됩니다. 객청으로 모시겠습니다.”
강환장이 뒤로 물러나서 잠시 기다리자 무지가 직철 허리띠를 두르며 방 안에서 나와서 서쪽 객청으로 안내했다.
“강 장사, 고생하셨습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무지는 강환장에게 차를 내려주고 자기 것도 내린 다음 강환장을 바라봤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서 체면치레로도 좋아 보인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강환장은 착잡하게 무지를 바라봤다. 무지와 십여 년 친분이 있어서 못 할 말이 없다는 걸 자신은 알지만 무지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번 생엔 처음으로 무지를 찾아온 것이었다.
너무 슬프고 괴로워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찾아왔다. 다시 돌아온 근래 1년이 얼마나 힘들고 각박한지 이야기하고 싶고, 이씨, 엉망이 된 집안, 지금의 난처함, 괴로움, 미래의 망연함과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친분이 없는데 어떻게 털어놓으랴.
“우리 집안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강환장의 말에 무지는 매우 난감해졌다. 모른다고 하자니, 그렇게 큰일을 온 경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대상국사의 지객승이 모른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들었다고 하자니, 이어서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조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무지가 은근히 둘러서 말했다.
“나와 곡씨는 혼약을 맺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적이 없어요. 누군가 내가 경성에 없는 틈에 강가를 함정에 빠뜨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