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48화 (248/463)

248화: 강가 며느리

곡 대내내는 일어서서 궤짝의 자물쇠를 열어서 신줏단지처럼 모시던 혼서를 꺼내 강환장에게 건넸다. 강환장은 열어서 슬쩍 훑어보고는 화가 나서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 혼서는 정말로 그의 부친의 경박하기 짝이 없는 못난 글씨가 맞았다.

글씨를 이 정도까지 모방하다니. 이씨, 내가 만만하게 봤군!

강환장은 초점 없는 눈으로 혼서를 바라봤다.

내가 그녀를 얕잡아 봤구나. 예전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무 얕잡아 봤어!

그 여인은 영리하기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다들 그 여인의 장사 수완이 빈틈 하나 없다고 칭찬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이 역겹고 이씨가 더 미워졌다. 강가는 학자 가문인데 장사를 빈틈 하나 없이 한다니, 너무 부끄러웠다.

장사를 빈틈없이 하는 사람이 계산속을 부려 누군가를 모해한다면 무시무시하기는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가 이신 그 미친개에게 돌연 등을 물려서 서북으로 가게 되었을 때, 문 이야가 같이 가겠다고 하면서 한마디 한 적 있었다. 뭐라고 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부인이 이 병을 견뎌내기만 한다면 경성은 걱정할 것 없다고. 경성엔 부인만 있으면 된다고. 부인이 견디지 못하면 그와 자기의 운도 거기까지라고. 강가 역시 그렇고. 그래서 자기가 경성에 있든 말든 상관없다고.

그런 것들을 다 깜빡했다. 너무 방심했다. 이씨가 강가를 떠날 생각이었을 줄은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했다. 강가를 무너뜨리고 그를 무너뜨리려고 하다니. 어떻게. 자신과 강가가 잘못한 것이 뭐가 있다고. 설마 그저 자식 하나 때문에? 자식을 낳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자신의 자식이면 그녀의 자식 아닌가?

설마…… 아니, 그걸 알 리가 없다. 게다가 그게 다 내 탓도 아니지!

이씨가 영리하고 유능한 사람인 걸 어찌 잊었을까. 경계해야 한다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니.

강환장은 생각할수록 혼란스럽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변하는 듯했다. 모든 것이 변했다. 이런 변화에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갑자기 방향을 잃은 기분이었다.

내가 예전의 강환장인가? 강가가 예전의 강가일 수 있는가? 진왕이 예전의 황상일까? 그리고 내일, 모레, 글피, 무수한 나날이 예전과 같을까? 그럴 수 있을까?

“부군?”

강환장이 망연하게 혼서를 보며 정신 나간 듯이 슬퍼하다가 화를 내는 얼빠진 모습에 곡 대내내는 저도 모르게 그를 부르고 또 불렀다.

“나가라!”

정신을 차린 강환장은 혼서를 바닥에 내던지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부군!”

곡 대내내는 조금 화가 났다. 자신은 그의 아내, 일심동체의 아내인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대할 수가 있나.

“나가라! 꺼져!”

강환장이 다시 한번 매섭게 고함치자 곡 대내내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콧방귀를 뀌고 돌아서서 나갔다.

“춘연!”

강환장이 바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르자, 춘연은 마음이 쓰라려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세자야가 아직 날 기억하셔…….

“세자야가 부르시잖니. 귀먹었어? 어서 들어가!”

벌써 문밖으로 나간 곡 대내내는 비녀를 뽑아서 춘연의 목을 와락 찌른 다음 다시 제 머리에 꽂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노련한 동작이었다. 춘연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신음했다. 아파서 눈물이 그대로 흘러내리면서, 강환장이 춘연, 하고 부르던 소리에 가슴 가득 퍼졌던 포근함이 싹 사라졌다. 안으로 들어간 춘연은 침상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예를 갖추고 공손하게 섰다.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 옷차림으로는 정말이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세자야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추미는? 어째서 안 보이지?”

강환장은 우선 추미부터 물었다.

“만 어멈이 혼수를 가져가려고 왔을 때, 추미가 자기도 혼수라고, 발 달린 혼수라고 따라갔어요. 동유와 하섬도 갔어요.”

추미, 동유와 하섬이 다 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춘연은 슬픔이 몰려와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만 어멈이 혼수를 가지러 왔다고? 다 가지고 갔다고?”

춘연의 눈물에 강환장은 그 슬픔이 전염이라도 된 듯 말 못 하게 슬프고 괴로워졌다.

“예, 그리고 이가 대야도요. 이낭자가 가지고 갔던 경대, 고 이낭이 가지고 갔던 장식장, 그리고 큰 홍동 향로, 그리고……. 만 어멈이 싹 다 가지고 갔어요. 부인 거처에 있던 것들도 다 가지고 갔어요. 세자야,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고개를 들어 강환장을 바라보는 춘연의 얼굴에 눈물이 작은 강물처럼 흘렀다.

“괜찮다. 이제 괜찮아진다. 앞으로는 다 괜찮아져.”

강환장은 들을수록 마음이 아팠다. 춘연의 노티 나는 두꺼운 솜옷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눈이 시리고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잘못한 게 뭐가 있어서. 왜 이렇게까지 원망하는 것일까.

강가는 그 여인의 집 아닌가. 그 여인은 자신과 함께 같은 지붕 아래 몇십 년을 살았다. 그 여인은 강가에서 몇십 년 동안 산 강가 며느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대체 뭘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무시한 건 맞다. 하지만 무시는 했지만, 강가의 안주인이 되게 해주었다. 그 안주인 자리에서 몇십 년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뭘 더 바라는 걸까?

이해할 수 없다. 물어봐야겠다. 얼굴 보고 물어봐야겠어. 내가 뭘 잘못했는지!

강환장은 젊고 바탕도 좋은 데다가 이번엔 집에서 병이 났고 곡 대내내가 그보다 더 마음 쓸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하게 살피면서 의원, 약, 음식 모두 면밀하게 준비했기에 사나흘 만에 깔끔하게 나았다.

병이 나은 강환장은 우선 진왕부로 가서 진왕을 만났다. 진왕은 담담하게, 거리를 둔 건 아니지만 절대로 친밀하다고 할 수 없는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강환장이 경성을 떠나기 전과 태도가 확연하게 달렸다.

강환장은 정신을 바짝 집중해서 강남에 다녀온 모든 일을 자세히 보고하려고 했는데 웬걸, 몇 마디 하자마자 진왕이 그의 말을 잘랐다.

“소화, 고생했다. 막 몸이 회복했고, 이건 큰일도 아니다. 게다가 강남 일을 내게 보고할 필요도 없고. 소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일단 돌아가라. 음, 이틀 더 쉬다가 오는 게 좋겠다. 난 볼일이 있으니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쫓겨나듯이 밖으로 나온 강환장은 진왕부 문 앞에서 한참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경성에 없던 몇 달 동안 무슨 일이 생겼나?

“강 장사, 우리 주인께서 마차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십니다.”

우직해 보이는 사환 하나가 강환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장읍하고 공손하게 청했다.

“너희 주인이 누구시냐?”

강환장은 사환이 가리키는 대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세운 마차를 바라봤다. 소박하고 단순한 마차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우리 주인의 성은 ‘계’자입니다.”

사환이 다시 하는 말에 강환장이 멈칫하다가 곧 알아들었다. 경성에 계씨는 많지 않았다.

휘장을 젖히고 마차에 올랐더니, 역시나 계 천관이 정좌하고 있었다.

“왜 그러나? 뭘 멍하니 서 있는가?”

편안해 보이는 계 천관은 말은 더 편안하게 했다.

“아닙니다. 큰 병에서 막 회복한지라 정신이 조금 없습니다.”

강환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와 진왕이 멀어진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몇십 년 동안 뼈에 새긴 경각심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병에 걸리지. 큰일도 아닐세. 자넨 젊으니 금세 회복할 걸세. 집안은 어떠한가?”

계 천관은 무언가 알아내려는 눈빛으로 강환장을 유심히 살폈다.

“아버님과 어머님 모두 건강하십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계 천관.”

강환장이 깍듯하면서도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곡 부인은 만났는가?”

대놓고 묻는 계 천관의 모습에 강환장은 놀란 듯이 그를 바라봤고, 계 천관도 강환장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자네 부친의 성격, 성품은 온 경성 사람이 다 아니 그 이야기는 할 것 없고. 자네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기로 소문 난 사람인데, 처 문제에서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었나.”

강환장은 입을 뻐끔댔다. 곡씨와의 혼약은 가짜고 이씨가 짠 계략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곡씨가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의 혼사는 예부의 판결에 따른 것이고, 그 판결서에는 황상의 친필 비준도 있었다. 혼약이 가짜라는 말은 대불경 한 일로, 대불경은 중죄였다. 수녕백의 세습이 사라진 마당에 대불경 죄를 저지르면 수녕백 세 글자도 지키지 못한다.

“혼인하자마자 첩을 들인 데다가 한 번에 여럿 들인 건 그럴 수 있네. 젊은 사람이 여인을 아끼는 일이 드문 것도 아니고. 풍류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이씨의 봉호는 어찌 끝까지 미룬 것인가. 봉호를 청하는 상주는 왜 올리지 않았는가.”

강환장은 대답할 말이 없어서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원래 계획은 이씨의 봉호를 두어 해 미루다가 나중에 처리하려고 했다. 아직 진왕 밑에서 활약한 것도 없어서 수녕백부를 주목하는 사람이 없고, 그가 이씨에게 봉호를 주든 말든 유의할 사람이 없었다. 두어 해 기다렸다가, 진왕이 태자가 되면 공을 세워서 그때 이씨와 고씨의 봉호를 함께 청할 생각이었다.

이씨가 이런 판을 짜서 자기를 해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씨의 봉호를 청하지 않은 일이 이렇게 해명할 수 없는 잘못이 되다니.

“봉호는 직접 청할 수도 있고, 예부에서 품계를 따라 직접 내릴 수도 있네. 곡씨의 부인 칭호는 예부에서 직접 내린 걸세. 아직 모르는 것인가?”

계 천관이 강환장을 바라보는 시선에 불만이 한층 늘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몸져누웠습니다.”

강환장은 무심결에 변명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는 계 천관의 눈빛이 갈수록 엄격해졌다.

“이런저런 뜬소문이 들리더군. 자네가 한사코 아내로 맞이하려던 사람이 자네 외사촌 고씨라지? 이미 고씨를 첩으로 들이지 않았나. 뭘 더 바라는 건가?”

강환장은 고개를 번쩍 들고 계 천관을 빤히 봤다. 무슨 뜻이지? 내 집안일에 왜 입을 대는 것이야. 제가 뭐라고…….

강환장은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또 정신이 나갔군. 지금은 지금이다. 지금은 예전이 아니다. 그는 아직 진왕부 말단 장사이고, 진왕은 아직 제 앞가림하기 바쁜 황자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천관으로 불리는 계 상서였다. 온 천하 서생의 수령으로 불리는 계 노승상의 외아들, 강남 계가의 가주!

“강가의 집안일이니, 그래, 내가 이러쿵저러쿵할 일이 아니지.”

계 천관은 강환장이 눈을 부릅떴다가 금세 고개를 숙인 의미를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말로는 이러쿵저러쿵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첫 부인인 이씨와 혼인한 것이 2월이지? 지금까지 수녕백부에 얼마나 많은 웃음거리가 생겼나. 강가 두 낭자가 올케를 밀어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네. 수십 년 살면서 이런 이야기는 또 처음 들었네. 고씨가 들어왔을 때 고가에 10만 냥을 주다니. 대체 그게 뭔가. 수녕백부가 궁핍한 걸 온 경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네. 이씨가 자네 집으로 들어간 지 두어 달 만에 감히 10만 냥이라는 큰돈을 첩의 친정에 내주다니. 미쳤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네.”

계 천관은 평온하고 담담한 말투로 하는 말이 하나하나 칼처럼 매서웠다.

“그러더니 이씨의 혼수를 가로채고 이씨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이젠 자네와 자네 아비가 은자 때문에 혼약을 파기하고 따로 혼인한 일이 밝혀졌네.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남았나? 또 무슨 일로 경성의 웃음거리가 될 셈인가? 자네 명성을 어떻게 망칠 작정인가. 수녕백부의 명성은? 대체 어떤 지경이 되어야 만족할 텐가? 곡씨도 이씨에게 했던 것처럼 곧바로 의절할 것인가? 고씨를 수녕백부의 안주인으로 만들 건가? 이 말, 자네 입으로 한 말이지?”

계 천관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감춰진 무수한 인과를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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