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현실이란 뼈아픈 것
청국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우는 추미를 바라봤다. 문 이야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추미는 영리한 사람이다. 첫째, 오라비가 지금은 도가 일을 모른대도 조만간 알게 될 일인데, 도가 낭자와 혼인하는 것과 추미와 혼인하는 것은 천지 차이인데 나중에 후회할지 아닐지 어찌 알겠나. 설령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도 수시로 떠올릴 것이다. 부부 사이가 좋을 땐 몰라도 사이가 틀어지면 원망이 생길지도 모른다.
둘째, 추미가 이미 청백하지 않은 몸이라는 걸 영 노장궤가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도 그녀와 혼인하려 할까? 설령 혼인하더라도 거북함이 남지 않을까?
“추미 언니, 언니 오라버니는 좋은 사람이잖아요. 정도 의리도 있는데 뭐 하러…….”
하섬이 막 설득하는데 추미가 말을 잘랐다.
“넌 몰라!”
추미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가 정도 의리도 있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나는…… 내가 오라버니 앞길을 망칠 수 없는 거야! 도가 낭자와 혼인하면…… 나랑 혼인하는 거랑 같겠니? 나와 혼인하면…… 나는…… 아무것도 없고 몸도 더러운데. 오라버니가 정과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서…… 나도 정과 의리를 보여야 해. 혼인 안 해. 할 수 없어. 안 돼.”
“그럼 언니는 앞으로 어떻…….”
하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국이 팔꿈치로 쿡 찔렀다.
“입 좀 다물어!”
하섬은 나머지 말을 삼켰다.
“울어라. 시원하게 울어라. 시원하게 울고 나면 다 괜찮아진다.”
문 이야의 말에 추미는 눈물을 닦았다.
“안 울어요. 이미 시원하게 울었어요. 지금도 우는 게 아니라, 그냥 눈물이…… 눈물을 조금 흘린 거예요. 왜 울겠어요.”
“그럼 됐다. 자, 한잔해라. 우리 추미는 정도 깊고 의리도 있고, 착한 아이다.”
문 이야가 추미를 향해 잔을 들자 청국이 얼른 추미의 잔을 채워주었다. 추미는 잔을 들고 문 이야를 향해 들어 보이고는 단숨에 비웠다.
“호주가 뭐가 좋다고 돌아가니. 여기서 얼마나 즐거워! 자자, 언니랑 한잔 마시자.”
소유도 잔을 들어 추미에게 권했고 추미는 마찬가지로 단숨에 비웠다. 청국도 웃으며 말했다.
“언니, 가면 안 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울다가 눈이 멀지도 몰라.”
“나도! 추미 언니, 난 언니가 제일 좋아. 언니가 가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 언니가 가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섬도 청국을 따라 잔을 들었다. 거절하지 않고 술을 마신 추미는 금세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화항에 엎어졌다. 소유와 청국은 그녀를 잘 눕히고 얇은 이불을 덮어 주었고, 세 사람은 다시 자리에 앉아 술을 데웠다. 문 이야가 주전자를 받아서 소유, 청국과 하섬 세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자, 너희 셋도 한잔하자. 여인으로 사는 건 쉽지 않지. 너희처럼 올곧은 아이들도 참 드물다.”
“이야, 지금 저희 칭찬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욕하는 건가요?”
소유가 웃으며 술을 마셨다. 문 이야는 술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할 말이 있다. 속마음을 터놓고 하는 말이다. 다들 명심해라. 내가 하는 말을 잘 명심하면 평생 이렇게 오늘처럼 먹고 마시고 순탄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씀하세요, 이야.”
청국이 문 이야의 잔을 채워주었다.
“태태 밑에서 열심히 일해라. 정말로 부득이한 때가 아니면 절대로 이가를 떠나지 말아라. 설사 부득이한 때가 와도 웬만하면 이가를 떠나지 말아라.”
“첫째, 열심히 일하고 이가를 떠나지 말아라. 명심할게요. 이야, 계속하세요.”
소유가 기억했다는 듯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둘째, 태태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는 낭자를 따라라. 낭자가 어디로 가든 너희들도 따라가라. 너희들은 낭자의 시녀, 낭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응? 이가를 떠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낭자가 나중에 혼인하면요? 다시 배가 시녀로 가요? 낭자가 혹시……. 대야도 이가 사람 아닌가요?”
하섬은 머리가 좀 어질거렸다.
“대야는 이가 사람이지. 하지만 대야는 혼인해야 하고 혼인하면 이가 안채는 대내내가 관리해야잖아. 대내내도 이가 사람이지만, 대내내는 태태, 낭자와 분명 다를 거야. 내 말은, 대내내의 법도는 태태와 낭자와 분명 다를 거란 말이지. 게다가 우리는 낭자의 시녀잖아. 어쨌든 난 몰라. 난 평생 다른 덴 절대로 안 가고 낭자 곁에 있을 거야.”
청국은 옥쟁반에 구슬 굴러가듯 빠르고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문 이야가 감탄하는 얼굴로 손뼉 치며 칭찬했다.
“영리하구나! 이러니 네 낭자를 모시는 대시녀가 된 것이지. 이렇게 똑똑히 알다니. 정말이지 대단하구나.”
하섬이 낭자의 재가 이야기를 꺼내자 소유는 근심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이야, 우리 낭자가 앞으로 다시 혼인할까요? 가끔은 낭자 대신 생각해 보는데 생각할수록 어렵네요. 이야, 솔직하게 말할 테니 웃지 마세요. 저는 글도 모르고 식견도 좁아요. 저는 그냥 낭자가 좋아요. 온 세상 낭자 중에 우리 낭자가 최고예요. 저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내라야 우리 낭자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소유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가 처음에 강가 대야 같은 인간쓰레기하고 혼인했잖아요. 다시 혼인하려면 재가가 되는 건데. 저는 아무래도 낭자가 혼인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낭자한테 어울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건…….”
문 이야는 눈을 가늘게 뜨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소유의 말이 맞다. 하지만 일단 두고 보자. 내 생각엔 혼인하든 말든, 어쨌든 낭자는 갈수록 좋은 사내와 혼인할 것이다.”
청국이 문 이야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갈수록 좋은 사내와 혼인해? 이게 무슨 말이야. 낭자더러 몇 번 혼인하라는 거야.
경성을 떠나기 전에 병으로 쓰러졌던 강환장은 경성으로 돌아와서 또 쓰러졌다.
참으로 공교롭게 쓰러지는 강환장을 바로 붙잡은 곡 대내내는 그대로 자기 거처로 그를 데리고 갔다. 곡 대내내의 거처가 바로 강환장의 곡란원이었다.
강환장의 곡란원은 온 수녕백부에서 진 부인의 정원을 제외하고 가장 크고 좋은 뜨락이었다. 사실 진 부인의 정원도 강환장의 곡란원보단 작았다. 물론 곡 대내내가 곡란원에 묵는 건 곡란원이 가장 크고 좋은 곳이라서가 아니라 강환장이 묵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강환장과 정식으로 혼인한 부인으로서 당연히 강환장의 거처에 묵어야 했다.
이동이 묵었던 청휘원은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혔다.
지금 수녕백부에서 조금이라도 괜찮은 시녀는 진 부인의 정원과 두 낭자를 모시는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곡란원에서 곡 대내내 곁을 맴돌았다.
고 이낭과 청서의 시녀는……. 노비가 무슨 시녀가 필요한가. 춘연은 곧바로 대내내의 시녀 중 하나로 들어왔고 낮엔 잠시도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이다가 밤엔 곡 대내내의 침상 아래 요를 깔고 부르면 수시로 시중들었다.
곡 대내내의 곡란원엔 일꾼도 충분하고 말도 잘 들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보살핌받은 강환장은 다음 날 아침 열이 꽤 내리고 정신도 맑아졌다.
강환장은 마찬가지로 남색 솜옷으로 온몸을 두른 춘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현숙한 가운데 벌써 질투를 드러내는 곡 대내내를 바라보며 허약한 목소리로 방 안 가득한 시녀들에게 나가라고 분부했다. 방 안 가득한 시녀들은 곡 대내내를 바라보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고, 곡 대내내가 손을 휘두르자 큰 사면을 받은 것처럼 금세 싹 사라졌다.
강환장은 가늘게 눈을 뜨고 곡 대내내를 바라봤다. 강환장의 매서운 시선에 곡 대내내는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두려움을 억지로 누르고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려 매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넌 누구냐? 누구 사주를 받은 것이냐? 무슨 생각이야? 말해라!”
분노한 강환장은 미약하게나마 위세를 보였고, 곡 대내내는 무심결에 뒷걸음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쿵쿵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아무리 해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부군,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해라!”
강환장이 버럭 고함치느라 갑자기 힘을 쓰면서 기침이 격렬하게 터져나왔고, 그는 침상 자락을 붙잡고 죽을 듯이 콜록거렸다. 맹렬한 기침 소리에 강환장의 기세가 꺾이면서, 곡 대내내는 그제야 한숨 돌리고 마음과 정신이 되돌아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강환장의 모습에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려고 걸음을 내디뎠지만 더 앞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강환장을 건드릴 용기는 더더욱 나지 않았지만, 곡 대내내는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았다. 옆으로 살짝 옮겨서 침상 머리맡 의자에 앉더니 강환장의 기침이 조금 잦아들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군,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저는 부군의 아내, 강남 곡씨랍니다. 제 아비와 부군의 아버지가 직접 우리 혼사를 맺어주셨어요. 안타깝게도 제 아비가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아버님이 기억력이 안 좋았던 모양이에요. 다행히 심하게 어긋나진 않았네요.”
강환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바보인 줄 알고? 내가 태어나던 해 부친이 작위를 계승했다. 일개 가난한 거인이 당당한 수녕백과 연을 맺는다? 솔직히 말해라. 누가 사주한 것이냐? 이씨? 이신?”
곡 대내내의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계속해서 고집했다.
“부군, 열이 심해서 이상해졌나 봐요. 이 혼약은 우리 부모님이 결정하신 거예요. 사주라니요. 예부의 판결서에 황상의 친필도 있는걸요. 다 틀렸단 말인가요? 황상도 틀렸단 말씀인가요? 너무 우스운 일 아닌가요?”
“이씨냐?”
강환장은 곡 대내내를 죽어라 노려보며 다시 캐물었다.
“이씨는 나가고 싶지 않았겠죠. 하지만 그건 그 여인이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황상께서 친히 비준하신 일인데, 가고 싶어도 가야 하고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죠.”
곡 대내내는 아예 강환장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대답했다.
“대답해 봐라. 이 혼약을 언제 알게 되었느냐? 어떻게 알게 된 것이야? 혼서는?”
강환장은 뒤로 기대 숨을 고르면서 분노를 억누르고 처음부터 다시 물었다.
“줄곧 아버지의 옛 물건 상자에 있었어요. 어머니는 제가 멀리 가는 게 싫어서 그 사실을 감추고 말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어머니 병이 심해져서 어쩔 수 없이 혼서를 제게 주고 충성스러운 종복과 함께 저를 경성으로 보내셨어요.”
수녕백부로 들어온 이래, 심지어 그보다 훨씬 전부터 곡 대내내는 세상없는 좋은 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수상하다고 은근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봐도 자신에겐 해로운 것이 전혀 없었다. 해로운 것이 없으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밝힐 필요는 더더욱 없고.
강환장이 혼서를 물으니, 그녀는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반사적으로 깨달았다.
“네 어미는? 혼서는?”
강환장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이런 혼인은 없었다고 단호하게 확신한다. 하지만 이 함정의 시작이 어디일까? 이씨는 어디에서 눈앞의 이 여인을 구해왔을까? 어떻게 아버지가 이 혼사를 인정하게 했을까?
“어머니 병이 너무 심해서 태평부에서 요양할 수밖에 없었어요. 안 그래도 어머니를 모시고 오면 안 될지 부군께 여쭤보려던 참이었어요. 어머니에겐 자식이라곤 저 하나뿐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곡 대내내는 얼른 얼굴을 가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홀했다. 태평부에 두고 온 어머니 일을 까맣게 잊었다. 그때 병이 심하게 들었으니 지금쯤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죽었으면 좋지. 하지만 만일…….
곡 대내내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좋다. 바로 사람을 보내 네 어미를 데리고 오마.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물어봐야겠다!”
강환장은 한 번에 승낙했다. 마침 확실히 물어보고 싶은 참이었다.
“혼서는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