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커다란 이상
영원이 내는 꾀는 언제나 책임질 생각 없이 지르기만 했다.
“안 돼! 황상이 선황 앞에서 맹세했다니까! 복안 장공주를 잘 돌보겠다고, 절대로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장공주가 승낙하지 않았는데 황상이 성지를 내리면, 장공주의 뜻을 저버린 것인데? 그럼 황상이 자기가 한 맹세를 어긴 셈이 되게? 절대로 안 되지.”
주육은 단호하게 잘랐다.
황상이 성지를 내려서 될 일이었다면 복안 장공주도 진작 혼인했지!
“그럼 귀비께서 분부하면 되지. 우리 형제끼리 하는 말이라 거리낌 없이 있는 대로 말하마. 오늘의 귀비가 장차 태후 아니냐. 귀비께서 하는 말을 장공주가 들어야지 어째.”
영원이 다시 무책임한 꾀를 내자, 주육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듣긴 뭘 들어! 장공주는 고모님을 안중에 두지도 않는걸. 어릴 때, 태후가 아직 살아 계실 때 장공주도 궁에서 살았잖아. 장공주는 고모님과 황상 앞에서도 말다툼했는걸. 고모님은 번번이 이기지 못했어.”
“그땐 태후도 계셨고, 대왕야와 사왕야도 어렸을 때인데 지금과 비교할 수 있나. 장공주는 영리한 사람이라며? 영리한 사람이면 분명 똑똑히 알겠지. 내 생각엔 말이다, 지금은 귀비 마마 앞에서 싫다는 말도 못 할 것이다.”
영원이 삐딱하게 보며 하는 말에 주육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형님 말이 맞아. 지금은 예전과 다르지. 사왕야가 태자가 되면 고모님은 곧바로 황…….”
주육은 이번엔 재빠르게 반응해서, 황후라는 말을 내뱉기 전에 혓바닥을 씹으며 다시 집어삼켰다.
“네 할머님에게 귀띔하는 게 좋을 거다. 황가엔 법도가 많으니 연말에 혼처를 정하고 서둘러야 내년 연말 전에 장공주가 혼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은 주육이 툭 내뱉을 뻔한 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이 말했고 주육은 살짝 안도했다.
“그건 그렇지. 예부 규칙만 봐도 번잡하고 세세해서 1년도 부족하지. 휴. 해마다 새해에 할머님은 조상님 앞에 향을 피우고 장공주가 생각을 바꿔서 순탄하게 혼인하길 비는데 말이지.”
겨울이 된 후, 문 이야는 이가의 경성 장원을 하나씩 돌아다니며 물건과 장부를 맞추고 농작물을 확인하고 장두와 내년 계획을 상의했다. 장 태태는 원래 이신을 보내려고 했는데 이신은 새해가 되면 춘시를 봐야 하니 문 이야가 자기가 제일 잘하는 일이라며 자원해서 맡게 된 것이다.
이 일거리가 매우 좋은 문 이야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장원으로 달려갔다. 장원에 도착해서 이것저것 다 둘러본 후엔 밭머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농사꾼, 장두와 잎담배를 피우면서 농작물에 관해 이야기하며 하루하루를 유쾌하게 보냈다.
이날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가 되어서야 장원에서 나왔고 자등 산장에 돌아갔을 때는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배가 등가죽에 붙은 문 이야는 중문에서 내려서 노련하게 큰 주방으로 직행했다.
장 태태는 엄격할 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엄했고, 풀어줄 일은 지극히 너그럽고 통 크게 풀어 주었다. 예를 들면 소유의 자매 모임이 그랬다.
큰 주방에 있는 곁채에선 사흘돌이로 모임이 열렸다. 문 이야는 자등 산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일등 시녀부터 가장 낮은 허드렛일 하는 시녀까지, 그 곁채의 작은 탁자에 둘러앉아 통쾌하게 먹고 마시고 이야기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먹고 마시는 모임의 큰 주인은 장 태태요, 작은 주인은 소유였다. 소유가 작은 주인인 이유는 먹거리를 소유가 다 만들어서이고, 장 태태가 큰 주인인 이유는 모든 먹거리와 술을 모두 큰 주방 창고에서 바로 꺼내오기 때문이었다. 소유는 힘, 장 태태는 돈을 댄 셈이었다.
문 이야가 한번은 이 일에 관해서 만 어멈에게 물었었는데 만 어멈은 그가 잘 몰라서 이상한 것도 많은 거라고 놀렸다. 큰 주방 서쪽 곁채 화원 뒤에 있는 작은 주방에서 이런 모임을 갖기도 한다고 했다. 태태가 이런 모임을 매우 좋게 생각해서, 지치고 힘들 때, 서러운 일이 있을 때, 답답할 때, 혹은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말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서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면서 풀면 못 풀 일이 없다고 했단다. 다만 한 가지, 일이 있는 사람은 술을 못 마시게 했다. 다음 날 당두나 심부름이 있는 사람도 술을 마시지 못하고.
문 이야는 곰곰히 생각하고는 매우 감탄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엄격과 관용의 결합 아닌가. 어린 시녀들은 물론이고 자신조차도 큰 주방 곁채에서 시녀들과 모여 앉아 웃고 떠들며 얼큰하게 취했을 때의 포근함과 여유가 주는 즐거움을 떠올리면 언제나 마음이 따듯해지고 미소가 피어났다. 자등 산장은 집 같은 곳이고 그 작은 곁채는 그 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반년 조금 넘었지만, 그는 자등 산장, 이가를 이미 집처럼 여기고 있었다. 외출했다가 돌아간다고 생각만 하면 먹이를 물고 새끼에게 돌아가는 제비처럼 마음이 다급해졌다.
큰 주방으로 들어간 문 이야는 고개를 들고 등불이 환한 서쪽 곁채를 바라보며 걸음을 서둘렀다.
“소유 낭자, 먹을 것 있는가?”
문 이야는 곁채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부터 높였다. 소유가 휘장을 열고 문 이야를 안으로 모셨다.
“오셨어요? 왜 또 이리 늦으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막 쇄과자를 올렸어요. 이제 시작이에요. 이야가 드실 음식 몇 가지 더 가지고 올게요.”
방 안에 있던 추미, 청국과 하섬이 얼른 일어나서 의자를 옮기고 젓가락을 놓았다. 문 이야는 즐겁게 손을 비비며 전용 자리인 화항 가장자리에 앉았다. 우선 잔부터 들고 추미가 술을 따라주자 향기를 맡으면서 흡족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고개를 젖혀 한입에 털어놓고 잔을 내려놓고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캬, 좋구나! 이 술에 귤피를 넣은 게지?”
“당도 넣었고요. 하섬이 단 술을 좋아해요. 저도 당 넣은 술이 달달해서 좋고요.”
청국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쩐지 술맛이 여러 가지 섞인 것 같더라니. 태태의 좋은 술을 네 녀석들이 다 망쳤구나.”
문 이야는 아까운 표정이었다.
“따로 데워드릴게요.”
추미가 화항에서 내려가려고 하자 문 이야가 다급하게 말렸다.
“됐다, 됐다. 이거 마시면 된다. 망치긴 했지만 맛은 꽤 좋구나. 이거면 된다. 저건 무슨 탕이냐? 죽순 뼈탕? 좋다, 좋아. 그거로 하자. 추운 기운 가시게 나도 한 그릇 다오.”
문 이야가 탕을 반쯤 비웠을 때 소유가 찬합을 들고 들어와서 접시를 잔뜩 늘어놓았다. 향유 다진 마늘, 오향 나귀 고기, 야들야들하게 삶은 매운 양족발, 마지막엔 아이 주먹만 한 꽝꽝 언 게살 완자를 쇄과자에 넣었다.
“술 따라라, 술 따라.”
문 이야는 검지를 까닥이며 두어 입 만에 탕을 비웠다. 하섬이 따듯한 황주를 따라주자 문 이야는 고기를 욱여넣고는 따듯한 황주를 마셨다. 오향 나귀 고기도 한 입 먹고 또 뜨거운 술을 마시고, 한 손에 양족발을 들고 뜯으며 웅얼웅얼 네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는…… 너희가 알아서……. 난 신경 쓰지 말아라.”
추미는 술 한 주전자를 새로 채우고 생강 채, 귤피와 당을 넣었다. 다들 이미 익숙해져서, 가끔 술잔을 채워주는 것 말고는 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네 사람은 쇄과자의 채소를 느긋하게 먹었다. 다들 야금야금 먹으면서 술을 홀짝이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추미는 문 이야보다 더 호탕하게 고개를 젖히고 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추미가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문 이야는 연신 잔을 비우는 추미의 모습에, 쉴 새 없이 고기를 욱여넣던 동작을 잠시 멈추고 소유를 바라봤다.
“아니에요. 상관하지 마세요.”
아니라고 말하는 소유의 말투와 표정을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있는 모습이었다. 밥을 빨리 먹는 문 이야는 눈 깜짝할 새에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에 속도를 늦추고 모두를 둘러봤다. 너도 한마디, 나도 한마디 하며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는 세 사람과 끽소리 없이 술만 마시는 추미를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떠오르는 게 있는 듯 물었다.
“오늘 아침에 호주의 연말 물건이 도착했다고?”
“네, 아이고! 이야도 참…….”
소유는 문 이야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는데? 네 외사촌 오라비가 혼인하기 싫다던? 아니면 이미 정혼했다더냐?”
문 이야가 추미를 바라보며 묻자, 청국이 추미 대신 대답했다.
“정혼하지 않았고, 싫다고도 하지 않았어요. 영 노장궤 손자, 영해의 사촌 아우 영강이 물건을 가지고 왔어요. 추미의 외사촌 오라비 일을 이야기하려고 영 노장궤가 일부러 영강을 보낸 거예요. 영강과 오라비가 같이 글공부했거든요. 추미 오라비가 매우 열심히 공부한대요. 매일 책을 읽고 또 읽고, 현 학당 글선생이 그를 매우 좋아한대요. 진사는 장담하지 못해도 거인은 떼놓은 당상이라고요.”
“그럼 좋은 일 아니냐.”
문 이야는 입으로는 칭찬하면서 마음은 가라앉았다. 앞이 이렇게 좋을수록 뒷부분은 안 좋기 마련이다.
“중양절이 지난 다음, 호주에서 손꼽히는 부자 도(陶) 노야가 추미 오라비를 점찍었대요.”
청국은 추미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고 한숨을 내쉬고는 자기가 계속 말을 이었다.
“도 노야는 올해 쉰하나인데, 첫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아이와 함께 목숨을 잃었어요. 게다가 사내아이였는데 엉덩이부터 나왔대요. 도 노야는 매우 슬퍼하면서 아내와 아들 3년상을 치른 후에야 후실을 들였는데 4년 후에야 다시 아이를 가져서 지금 도 대낭자를 낳았어요. 도 대낭자를 낳은 다음 도가 태태는 다시 아이를 갖지 못했고, 도가 태태가 서른이 된 해 전후로 첩을 몇 명 들였는데 5, 6년이 흘러도 아직 소식이 없대요. 도 노야는 팔자에 아들이 없다고 포기하고, 첩 둘도 내보내고 태태랑 둘이서 채식하고 불경을 읽으며 도 대낭자와 함께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데릴사위를 들일 생각이었고요.”
추미는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를 듣다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중엔 추미 오라비가 마음에 들어서 데릴사위가 될 필요도 없다고 했대요. 데릴사위가 되면 앞날을 망칠 수 있다고요. 단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대요. 두 노인을 임종까지 모시고 장례를 치러줄 것, 또 하나는 아들이 하나면 됐고 둘이면 두 번째 아들은 도가의 대를 잇게 해달라고요. 낭자의 전언이 도착했을 때, 도 노야가 마침 영 노장궤에게 추미 오라비의 의중을 물어봐 달라고 했대요.”
문 이야는 추미를 바라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영 노장궤는 추미 오라비에게 도가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낭자가 강가와 의절했고, 추미도 다시 이가로 돌아온 이야기만 했대요. 태태께서 추미를 저택에서 내보내 줄 준비하고 있다고요. 추미 오라비는 영 노장궤에게 장원, 저택을 팔아달라고 부탁했대요. 경성에 와서 추미를 속량하겠다고요.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자기와 추미를 맺어줬고, 추미를 속량해서 혼인하고 싶다고요.”
얼굴을 가린 추미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영 노장궤는 장원, 저택을 팔아주지 않았고 경성으로 보내지도 않았어요. 영강이 마침 경성에 물건을 보내러 가야 하니까, 영강을 보내서 추미를 속량해 주실 건지 태태의 의중을 여쭙겠다고요. 허락하시면 영강이 돌아가는 길에 추미를 데리고 가고, 속량할 은자는 노장궤가 먼저 내주겠다고 했대요.”
“정과 의리가 있군.”
문 이야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낭자가 추미의 의중을 물었는데, 추미가 평생 낭자를 모시면서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잖아요. 혼인도 하지 않겠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