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사달 일으키기
“영 칠야십니까? 묵 칠야와 주 육소야시고요. 소생 진경해, 진왕비 진씨 친정 오라비입니다. 세 분, 안으로 드시지요.”
주육은 놀란 듯이 진경해를 위아래로 살폈다.
“진왕비의 오라비? 어디서 일하지? 처음 듣는데?”
영원은 고개를 틀고 옆을 바라봤다. 말 못 하기로 따지면 주육은 이 경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물론 수국공부 자제인 그가 말을 잘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소생 아직 임무를 받지 못해 집에서 한가로이 지냅니다. 실로 부끄럽습니다.”
부끄럽다는 진경해의 말은 겸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스물 넘어 곧 서른이 되어 가는데 아직 공밥을 얻어먹고 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진왕이 보낸 건가? 진왕도 참, 사람을 잘도 부리는군. 아무리 그래도 왕비의 오라비인데, 어떻게 아랫사람처럼 부릴 수 있지?”
주육이 대놓고 진왕을 질타했다.
“이런 아랫사람이 어디 있냐.”
묵칠의 의도는 진경해를 위해 한마디 해주려는 것이겠으나…….
영원은 이가 갈렸다. 차라리 입이나 다물고 있을 것이지.
“진왕이 아니라 왕비의 분부입니다. 양 구야 댁엔 나이 든 모친밖에 없어서 집안일을 맡을 사람이 없습니다. 왕야처럼 귀한 분이 이런 사소한 일을 맡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왕비께서 저와 아우를 보낸 겁니다. 친척끼리 돕는 것이니 부리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진경해는 성격이 참 좋았다. 물론, 경성 같은 곳에서 진경해 같은 사람이 성격이 좋지 않을 수가 없겠지만.
영원은 진경해를 똑바로 바라보며 위아래로 살피다가 문득 웃으며 물었다.
“무술을 수련했나? 바탕이 튼튼하군. 무술 솜씨가 꽤 괜찮을 것 같아. 마상 무술도 수련했었나?”
진경해는 영원의 물음에 두 눈을 빛내며 얼른 대답했다.
“칠야, 정말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조금 수련했었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마보(馬步)를 20여 년 동안 해왔습니다. 몸이 안 좋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을 제외하면 하루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마상 무술도 그럭저럭합니다.”
“이런 자의 무술이 어디 형님 눈에 들겠어?”
영원을 추켜세울 생각뿐인 주육은 제대로 추켜세우지는 못하고 진경해를 질끈 짓밟은 셈이 된 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진경해가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슬슬 안색이 변하려 했다.
“무술 실력이 제법일 거다.”
영원은 주육의 말을 못 들은 듯이 감탄한 얼굴로 진경해를 바라봤다.
“여기 일이 끝나면 우리 저택에 한 번 다녀가지. 후원 연무장에서 말을 달릴 수 있으니 둘이 한번 겨뤄보자고.”
“칠야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진경해는 기쁜 표정이었다. 영가는 대대로 무술을 수련한 집안으로, 영 칠야가 변변찮고 황당하기로 이름 났지만 무술 실력이 안 좋다는 소문은 없었다. 그런 영원과 대련할 수 있다니, 진경해는 벌써부터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주육이 뭐라고 더 하려는데 묵칠이 덜렁 끌고 갔고, 영원도 진경해와 더 이야기 나누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는 진왕부 관사들이 관장했고, 주인 신분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건 진경해와 아우 진경산뿐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영원은 당연히 이런 때에 진경해를 붙들고 늘어지지 않았다.
영원과 두 사람이 알아서 둘러보겠다고 하자 진경해는 인사치레 몇 마디 하고는 방향을 알려주곤 문 앞으로 물러났다.
영원은 매우 느리게 걸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저택의 장식과 배치를 보는 것 같아도 사실은 저택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있었다. 오늘 혼례에 참석한 사람은 대부분 진경해, 진경산과 가까운 사이 같았고 자기들끼리도 잘 아는 듯했다. 영원은 그들이 진왕비 친정 쪽 친지와 벗임을 딱 알아차렸다. 진왕비의 부친은 일개 5품 관리일 뿐이라 진가가 평소에 왕래하는 집안은 그와 주육, 묵칠이 왕래하는 집안과 거의 겹치지 않았다.
갈수록 떠들썩해지는 저택 분위기에 영원의 눈빛이 차츰 굳어졌다. 눈에 익은 5품에서 7품 관리를 벌써 여럿 봤는데, 각부 관리가 다 있었다. 진가가 참으로 폭넓게 교류하는 듯했다.
영원이 대영에게 손짓해서 나지막이 분부했다.
“오늘 온 사람들이 다 누구인지 가서 알아봐라. 이름은 무엇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예.”
대영은 조용히 물러나서 지극히 간단한 이 심부름을 할 기회를 살폈다.
구경할 생각으로 온 주육은 정말로 구경거리를 바라고 온 것이었다. 양가가 엉망진창이 되고, 양 구야가 신부를 맞이할 때 우스꽝스러워지는 걸 보고 싶었다. 신부가 남에게 내보일 수 없을 정도로 못난 데다가 멍청하기까지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보고 싶은 구경거리였다.
하지만 양가 대문 밖 붉은 천막 아래 서서 둘러보니, 곳곳이 모두 질서정연했다. 바쁘지만 어수선하지 않고, 다과도 좋은 건 아니지만 질이 떨어지진 않았다. 모든 것이 단정하고 깔끔해서 트집 잡을 곳이 없었다. 신방은……, 신부가 아직 오지 않아서 신방에 들어갈 수 없지만, 보아하니 웃음거리가 될 것은 없어 보였다.
흥이 깨진 주육은 이따 신부를 맞이할 때 구경거리가 생기길 바라기 시작했다. 양 구야 같은 인간이 이런 재미도 주지 않으면 너무하는 것 아닌가.
묵칠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다. 원래 축하하러 올 생각이 없었고 주육에게 끌려왔을 뿐이었다. 주육에게 붙들려서 남의 집 나뭇간까지 들여다보고는 따분해 보이는 주육의 모습에 하품하며 말했다.
“그러게 오지 않겠다니까 굳이 오자더니. 양 구야가 혼인하는데 구경거리가 뭐가 있겠냐. 어제 혼수 구경보다 더 시시하다.”
“있어 봐라. 신부를 맞이할 때 구경거리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냐. 신부가 오면 재미있어질 거다.”
주육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며 앞뜰로 다시 돌아왔을 때, 영원이 한 탁자를 다 차지하고 다리를 꼬고 차를 마시면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육이 털썩 영원 곁에 앉았다.
“이 저택, 손바닥만 해서 잠깐 사이에 안에서 밖까지 다 둘러봤네. 신방만 빼고 싹 다 둘러봤지.”
“나뭇간까지 봤다니까.”
묵칠이 하는 말에 영원이 피식 웃었다.
“너희 둘, 염탐하러 온 도둑이냐, 아니면 털러 온 것이냐?”
“구경하는 거니까 곳곳을 샅샅이 봐야지.”
뻔뻔한 주육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소육은 신부 맞이할 때 재미있을 거라는데, 난 아닐 것 같다. 칠 형, 형님 생각엔?”
묵칠은 어떻게든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무슨 재미가 있다고. 차는 질 떨어지고 간식은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의자도 몸이 뻐근해질 정도로 딱딱하기만 해서 차라리 연향루에 가서 편안하게 노는 게 나았다.
“소육, 무슨 구경을 하겠다는 것이냐.”
영원이 관심 없다는 듯 물었다.
“뻔하지. 지난번처럼 양 구야가 홀딱 벗는 거?”
묵칠이 먼저 대답하자 주육이 그를 흘겨봤다.
“넌 보고 싶지 않고?”
“난 싫다.”
묵칠은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듯이 등받이에 기댔다.
“지난번에 양 구야가 옷 벗은 바람에 얼마나 큰 사달이 났냐. 곧 섣달인데 일 생기는 거 싫다. 올해 한 해 내내 지쳤어.”
“그건 그래.”
묵칠이 그렇게 말하자 주육도 어깨를 늘어뜨렸다. 지난번 일로 주육 역시 좋은 일은 없었다.
“됐다. 괜히 보태지 말고 이만 가자.”
영원이 일어서자 묵칠이 곧바로 일어났고 주육도 일어섰으며, 세 사람은 혼란스러운 틈에 측문으로 나갔다.
주육이 말에 올라서 따분한 듯 하품했다.
“요즘 경성에 별 재미있는 일이 없군.”
세 사람이 각자 돌아가는데, 영원이 별안간 고삐를 잡고 목소리를 높여 주육을 불렀다.
“소육, 깜빡할 뻔했다. 세견이 오늘 새끼를 낳는데, 보러 갈 거냐?”
“가야지, 가야지! 새끼 낳을 때 꼭 알려달라고 대후에게 당부했었는데.”
“대후가 전하라고 한 것이다. 내가 깜빡할 뻔했다.”
영원은 주육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함께 정북후부로 들어가서 세견을 기르는 큰 뜨락으로 직행했다.
곧 새끼를 낳을 세견은 벌써 따듯하고 정갈한 실내로 옮겨졌고, 세견을 돌보는 시종 우두머리인 대후가 직접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낳으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아서 영원과 주육은 곁에 앉아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황친 중에 양 구야 나이가 되어서야 첫 혼인이면 꽤 늦은 셈이지?”
무료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원이 아까 일로 화제를 돌렸다.
“양 구야가 무슨 황친이야!”
주육은 무시부터 하고 말을 이었다.
“제일 늦은 게 맞지. 마흔도 넘었는데.”
“아, 맞다!”
영원은 문득 생각난 듯이 외쳤다.
“장공주도 한 분 있잖아. 아직 혼인하지 않은 장공주가 있지 않나?”
“복안 장공주!”
혼인하지 않은 장공주 이야기가 나오자 주육은 심란해 보이는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곧 서른이지. 새해가 되면 스물아홉! 성 밖 보림암에서 수행한다고 돌아오지도 않아. 혼인도 하지 않고. 무슨 생각인지!”
“할 일도 없으니 하는 말인데, 복안 장공주가 왜 혼인하지 않을까? 좋은 상대가 없어서?”
영원이 호기심 넘치는 듯이 주육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주육이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좋은 상대가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온 경성, 아니, 온 세상의 사내를 고를 수 있는걸? 태후께서 계실 때부터 마음대로 고르라고 하셨어. 태후께서 떠나면서 우리 할머님에게 부탁했고. 우리 할머님은 장공주가 혼인하기만 하면 누구랑 혼인해도 상관하지 않으신다. 형님, 정말로 온 세상 사내를 마음대로 고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아. 누구를 거론해도 무조건 트집을 잡아. 한 해엔 할머님이 모처럼 완벽한 사람을 골랐는데, 뭐라고 했는지 아나? 세상엔 완벽한 사람이 없대. 흠 하나 없는 걸 보면 성인이거나 아니면 대단히 간악한 사람이래. 우리 할머님, 기가 차서 기절할 뻔했지.”
그 말에 영원이 소리 내서 웃었다.
“일리 있는 말이군.”
“태후께서 그 일을 할머님에게 맡긴 후로 할머님의 가장 큰 걱정거리가 장공주 혼사야. 할머님뿐만 아니지, 우리 수국공부 위아래 가장 큰 걱정거리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찾았고, 설득할 말은 다 설득했는데 대체 무슨 난리인지, 혼인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작정했잖아.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주육은 할머니가 불평하는 걸 적잖게 들었는지 원망이 가득했다. 영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스물아홉이 넘으면……. 내년에 혼인하면 그래도 서른 전에 혼인하는 셈이다. 여인은 보통 열 일고여덟에 혼인하고 스물몇에 하는 것도 흔하니까. 내년에 혼인하지 않고 후년에 혼인하면 서른 넘어서 하게 되는 것 아니냐!”
그 말에 주육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게 말이야! 1년 차이인데 스물몇에 혼인하는 것과 서른몇에 혼인하는 것이 되네. 큰 차이잖아!”
“이 일이 네 할머님에게 달렸다니. 정말이지, 쯧쯧쯧. 나중에 사서에 한 마디 적힐 일이군. ‘태후 임종 전 복안 장공주 인생의 대사를 수국공부에 맡겼으나 결국 장공주는 서른 넘어서야 혼인했다.’ 너희 수국공부, 일을 어찌 하는 게냐!”
“형님이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할머님이 그 일로 얼마나 근심하는데. 하지만 장공주가 승낙하지 않는 걸 할머님이 뭘 어쩌겠어? 상대는 장공주다. 선황이 손수 기른 장공주. 황상이 선황 앞에서 절대로 눈물 흘리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까지 했는걸. 할머님이 뭘 어쩌겠어.”
주육은 조금 조바심이 났다.
“간단하지! 황상이 성지를 내리면 그만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