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근검한 살림
그때 난각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고씨의 등 뒤로 머리를 내밀고는 고씨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그림 그리는 법을 알려주었다. 손을 잡고 가르치다 보니 충동이 일었다.
해가 지나고 고씨가 강가로 들어왔고, 다음 달에 고씨가 바로 회임했다. 그는 매우 기쁜 가운데 그날 난각에서 잘 참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씨가 아이를 품은 채 강가로 들어올 뻔했지 않나. 그렇게 됐다면 고씨는 이씨 앞에서 부덕하단 이유로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고 자신은 평생 후회했을 테니까.
곡 대내내는 강환장과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긴장하고 수줍은 얼굴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혼이 빠진 듯이 선 강환장을 바라봤다. 자신의 부군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더 마른 듯하고 귀밑머리도 하얗게 셌다. 곡 대내내는 마음이 아팠다. 천자의 중신인 부군의 아직 여린 어깨에 짊어진 짐이 얼마나 무겁길래. 그 무게에 짓눌려서 나이가 다 들어 보이는 거지.
곡 대내내가 가서 예를 올려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는데, 강환장이 정신을 차리고 정원으로 향했다. 곡 대내내는 얼른 뒤를 쫓아가며 내내 갈등했다. 지금 가서 예를 올려야 할까, 아니면 시어머니를 만난 후 예를 올릴까.
효경을 배운 사람으로서, 부군이 밖에서 돌아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에게 문안 올리기 전에 자신을 만나면 불효라는 걸 알았다.
부군이 불효를 저지르게 하면 안 되지.
곡 대내내는 차분하게 강환장 뒤를 따라서 정원까지 들어갔다.
정원을 지키는 문지기 어멈은 오로지 강환장을 바라보며 뒤를 따르는 곡 대내내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주저하고 또 주저하다가 결국 막지 못했다.
대내내가 정원에 얼씬도 못 하게 하라고 부인이 명했지만, 오늘은 세자야가 돌아온 날이고 대내내는 세자야를 따라 들어왔다. 그러니 자신의 책임이 아니란 말이다!
오라버니가 돌아왔다는 말에 강 대낭자와 강 이낭자는 그다지 즐겁지 않은 얼굴로 마중 나왔다. 고개를 들자마자 오라버니 뒤를 바짝 따라 들어오는 올케를 보고는 강 대낭자는 놀라긴 했지만 감정을 잘 감췄지만, 강 이낭자는 겁에 질려 꺄악 고함치더니 돌아서서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어머니! 어머니! 왔어요! 왔어요!”
강환장은 휙 돌아서서 수줍음 가득한 얼굴로 낭창낭창 예를 갖추는 곡 대내내를 노려봤다. 곡 대내내는 깊이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추고는 수줍은 듯 고개를 들다가 강환장이 빤히 바라보는 걸 보고는 순간 두 뺨을 붉히며 손수건을 비틀어댔다.
강환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곡 대내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상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상방에 강완, 강녕은 딱 달라붙어 있고, 진 부인은 봉운의 손을 꼭 붙들고, 봉운은 진 부인에게 붙들린 채 다른 손에 효자손을 들고 있었다. 네 쌍의 눈엔 오로지 두려움뿐이었다. 네 사람은 그런 눈으로 강환장 뒤를 바짝 따라 들어오는 곡 대내내를 일제히 바라봤다. 강환장, 세자야가 돌아온 이 큰일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보내라!”
진 부인이 강환장의 경악한 시선을 마주하며 떨리는 목소리와 손가락으로 곡 대내내를 가리켰다.
“밖에서 기다려라.”
강환장이 즉시 곡 대내내에게 분부했다. 곡 대내내는 매우 내키지 않았지만, 강환장의 말을 적어도 지금은 들어야 했다.
곡 대내내는 미적미적 상방에서 나와서 뒷걸음질 치며 더 미적미적 수화문으로 향했다. 수화문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고 이낭과 청서 이낭 두 사람이 서로 부축하고 불룩 나온 배를 내밀고 상방 옆 월동문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을 본 곡 대내내는 뒷걸음질 치지 않고 두 손을 허리에 얹고는 매섭게 노려봤다.
강환장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다급하게 후조방에서 나오던 고 이낭과 청서 이낭은 상방에 들어가기 전에 흉신(凶神) 곡 대내내부터 마주쳤다. 고 이낭이 질겁하고 그대로 돌아서서 후조방으로 달아나려는데, 청서가 덥석 그녀를 잡았다.
“세자야가 계셔. 우릴 어쩌겠어. 얼른 들어가.”
겁에 질려 정신이 나갔던 고 이낭은 청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맞아. 오라버니가 돌아왔는데 곡씨 저 여편네를 두려워할 게 무어야.
고 이낭은 오라버니의 총애와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 금세 용기가 올라왔다. 아직 곡 대내내와 눈을 마주칠 자신은 없지만, 허리는 꼿꼿해져서 청서와 둘이서 불룩 나온 배와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으로 몇 걸음 만에 상방으로 달음박질쳤다.
곡 대내내는 상방으로 달려 들어가는 두 사람을 샛눈으로 바라보다가 허리에 올린 손을 내려놓고는 코웃음 치며 수화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사람을 불러 의자를 옮겨와서 수화문 밖에 앉아 강환장을 기다렸다.
그녀는 이 저택의 당당한 세자 부인이었다. 황상의 성지를 들고 들어왔는데 누가 무서우랴.
상방 안, 강환장은 기쁜 얼굴로 예를 갖추는 고 이낭과 청서를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봤다. 두 사람이 누군지 첫눈엔 알아보지 못했고, 두 번 봐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고 이낭과 청서는 똑같은 차림이었다. 뒤통수에 소똥처럼 틀어 올린 머리에 은비녀를 꽂았다. 보기 흉할 정도로 둔해 보이는 남색 솜 웃옷과 아래는 남색 솜 바지였다. 웃옷과 마찬가지로 둔해 보이는 추한 바지로, 다리엔 각반을 두르고, 각반 아랜 두껍고 육중한 남색 솜 신발을 신었다.
“이게…….”
강환장은 고 이낭과 청서를 가리켰다. 고 이낭과 청서가 예를 올리고 좌우 양옆으로 서서 눈이 그렁그렁해져서 ‘세자야’를 불러대도 고씨와 청서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네 처의 뜻이다.”
진 부인이 거북한 듯 헛기침하며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게 설명했다.
“네 처가 우리 같은 집안, 관리 출신 대가문, 서생 가문은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려야 한다는구나. 법도는 더 따져야 한단다. 네 처는 우리 저택의 첩, 통방이 요염하면 안 된단다. 이런 차림이어야 한단다. 근검하게 살림하고, 여우 같은 것들이 사내를 홀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 나는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진 부인이 고개를 들고 봉운에게 물었고, 봉운은 청서를 힐끔 보고는 내키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법도입니까? 아무리 검소해야 한다지만, 이런 식으로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강환장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저택 입구에 서서 몇십 년 동안 금빛으로 찬란하던 수녕백부 네 글자가 우중충한 남색으로 바뀐 걸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악몽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아니면 지옥에서 연출하는 귀신극에 객원으로 출연한 것 같기도 하고.
“네가 모르는 게 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 부인은 눈에 구멍이 뚫린 듯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네 예전 처, 그리고 이가, 얼마나 악랄한지 아느냐? 우리 가문의 점포, 장원 모두 저들 것이라고 한다. 그 오라비는 아직 거인인데 얼마나 악랄하고 독한지, 체면은 아예 없더구나. 저택에 쳐들어와서 물건을 가지고 갔다. 내 거처에 있던 몇 가지 물건도 싹 가져갔어. 그리고 네 누이 거처 것도. 불쌍한 우리 여인들이 뭘 어쩌겠느냐. 너도 집에 없는데.”
진 부인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팔자 타령이었다.
“다 내 팔자가 사나워서다! 내가 박복한 사람이다! 이러고 어찌 살겠느냐!”
진 부인은 눈물을 비처럼 흘리던 단계에서 팔자 타령하는 부분으로 넘어갔다.
“다 가지고 갔다고?”
강환장이 퍼렇게 뜬 얼굴로 강 대낭자에게 물었다. 강 대낭자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싹 다 가지고 갔어요. 저택에 와서 난리를 부렸는데, 아버지가 상대하지 않으니까 종친을 찾아갔어요. 종친들은 배은망덕하게 팔이 밖으로 굽지 뭐예요. 줄 건 줘야 한다고요. 우리 것인데, 왜 내줘야 해요? 나중엔 관아에까지 가서 난리를 부리는 바람에…….”
강 대낭자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자기들 것이 아님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들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다 우리 강가 건데!
“……다 가져갔고, 관아에서는 우리가 이가에 38만 냥을 빚졌대요. 우리 저택도요. 우리 저택 문서가 이가에 있다고, 1년 기한을 줬어요.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저택을 거둬가겠다고…….”
강 대낭자는 갈수록 얼굴이 퍼렇게 뜨는 오라비의 모습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강환장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그 여인과 평생을 보냈는데 이토록 악랄한 걸 몰랐다.
“올케도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입힌 거예요. 사실 나쁘지 않아요. 사람이 아름다우면 뭘 입어도 아름답다잖아요!”
강 이낭자는 고소해하며 고 이낭과 청서를 바라봤다. 매우 즐거웠다. 이런 게 너무 좋았다. 저택에 자신과 언니를 제외하고 모두 이렇게 입으면 더 좋고.
고 이낭은 서러운 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강환장을 빤히 바라보며 울먹울먹 입을 열었다.
“세자야, 새 대내내가 들어온 이래 나와 청서는 진맥도 못 했어요. 몇 번이나 배가 너무 아팠고, 청서도 심하게 아팠어요. 부인께서 몇 번이나 분부했는데도 의원을 불러주지 않았어요.”
“그래도 아무 일 없었잖아!”
강 이낭자가 날카롭게 말을 받았다. 언니와 안살림을 맡았을 때, 이 두 천것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의원을 부르지 않아도 이렇게 평안 무사하게 배가 불러오는 것도 모르고!
고 이낭은 강 이낭자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녀는 정원에서 반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이 정원에서 나가기만 하면 저 대내내가 배 속의 아이를 걷어차서 없앨 거라는 걸 똑똑히 안다.
이 정원에서 보호받으려면 강 이낭자 눈 밖에 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
강환장은 귓가가 윙윙 울리고 온몸이 터질 듯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손발은 차갑게 식었다. 강환장이 비틀비틀 일어섰다.
“어머니, 급하게 달려오느라 피곤합니다. 일단 좀 쉬어야겠습니다. 이런 일은…… 조금 쉰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시지요.”
강환장은 다리에 힘이 풀려 오로지 의지로만 수화문 밖으로 나갔다. 눈앞이 아른거려서, 의자를 놓고 떡하니 회랑에 앉은 곡 대내내를 아예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곡 대내내는 그를 똑똑히 봤다. 얼굴은 시퍼렇고 볼은 붉은 것이, 눈빛이 풀려서 비틀비틀 걷는 그의 모습에 서둘러 다가가 이마를 짚었다. 타는 듯이 뜨거운 이마에 곡 대내내는 제 심장이 오그라드는 듯 아팠다. 그녀는 서둘러 강환장을 부축하고 어멈을 불러 함께 강환장을 거처로 부축하면서 의원을 모셔오라고 분부했다.
강환장이 침상에 누워 고열에 시달리고 있을 때, 수녕백부와 그리 멀지 않은 양 구야 집엔 섣달이 오기 전 마지막 길일에 맞춰 떠들썩하게 징과 꽹과리를 치며 신부를 맞이했다.
양 구야가 혼인한다니 선물을 보내는 사람은 많았지만, 찾아와 축하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구경하는 사람은 매우 많아서 꽤 떠들썩했다.
경성에 자자한 양 구야의 명성, 그리고 연향루 아래서 홀딱 벗고 달리면서 일으킨 풍파만 해도 그의 혼인은 너무나 큰 구경거리였다.
영원, 주육과 묵칠이 이런 구경을 놓칠 리가 있나. 특히 주육은 양 구야가 혼인하는데 그 처가 고양이 사료를 파는 오가 낭자라는 이 일에 양 구야보다 더 들뜨고 기분이 좋았다. 꽤 후한 선물을 보냈을뿐더러, 가련할 정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혼수 행렬을 본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묵칠을 끄고 관아로 찾아가 영원을 데리고 함께 구경하러 양가로 향했다.
양가 저택은 꽤 넓은 편이었다. 오진 정원에 두 묘 크기의 화원이 달린 저택 앞에서 말에서 내린 세 사람이 매우 실용적이고 예쁘게 꾸며진 붉은 천막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대문에서 누군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눈이 크고 건장하고 튼실해 보이는 젊은 사내가 세 사람을 향해 깊이 장읍하며 예를 갖추고는 웃으며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