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돌아온 흠차 나리
대황자는 따듯한 가마 안에 온몸이 굳은 채 앉아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각이 없고 힘이 빠졌다. 부황 말의 속뜻을 모두 알아들었다. 부황은 넷째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황위를 넷째에게 넘기겠다고 암시하는 걸까? 넷째를 태자로 세우려는 걸까? 부황이 이미 결심한 걸까. 드디어 결심한 걸까?
부황은 자기가 눈 감은 후에 자신이 즉위하면 넷째를 사지로 몰고 모비에게 불효할 것으로 여기는 거다. 넷째가 즉위하면…… 넷째가 즉위하면 날 살려둘 것으로 생각하신단 말인가? 모비에게 효도하고? 하!
대황자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넷째가 즉위하면, 즉위할 것도 없이 태자가 되는 순간 첫 번째로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다. 부황은 어째서 넷째는 믿으면서 자신은 믿지 않는 것일까.
모비 때문이다!
장 선생이 말했다. 그와 넷째 중에 누가 효도하느냐고. 부황은 모비 말을 듣는다고. 부황이 말했다. 효도하는 사람이 대통을 잇는다고…….
모비는 언제나 넷째를 편애했다. 이렇게까지 기울었을 줄이야. 나를 사지로 몰 지경으로 기울었을 줄이야!
대황자는 지극히 침착했다가 또 지극히 혼란했다. 가는 내내 침착했다가 혼란스러워하다가, 마지막엔 모든 사고회로가 한 방향으로 흘렀다.
모비다. 다 모비 때문이다. 모비가 나를 해치려고 하는 것이다!
강남에서 출발한 강환장은 절반쯤 왔을 때 역관에서 보낸 탄핵 상주서를 길에서 받았다. 수녕백부가 정처를 두고 재취했다고, 혼인을 파괴한 파렴치한 짓을 했다는 탄핵 상주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상주서에 몇 줄마다 부친 강화원,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수시로 나오지 않았다면 상주서가 잘못 전해졌다고 여길 지경이었다.
언제 이런 혼약을 했단 말인가? 곡씨는 누구고.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게 황당무계한 일을 인정했다니. 이럴 수가…….
강환장은 화도 나고 초조해서 하룻밤 사이에 입술이 온통 부르텄다. 며칠 지나지 않아, 역관에서 또 탄핵 상주서를 잔뜩 끌어안고 나타났다. 이번엔 수녕백부가 곡가와의 혼인을 파기하고 이가를 속여 혼인하고는 헛소문을 터트려 모욕했다며, 지극히 파렴치한 것도 모자라 부덕하다는 탄핵 상주서였다.
강환장은 기가 차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어머니는 어떤 사람인지, 두 누이가 또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안다. 집안에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택 사람 중에 이런 모략을 꾸밀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고씨? 바로 고씨를 떠올린 강환장은 곧바로 부인했다. 고씨가 아니다. 고씨는 이런 술수를 부릴 줄 모른다. 이런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럼 누구?
강환장은 찬 바람이 부는 뱃머리에 앉아서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씨 말고 다른 사람은 없다. 이 상주서, 곡가, 그리고 모든 일이 이씨의 간계다. 이런 간계, 이런 수완을 부릴 만한 사람은 그녀뿐이다. 이렇게 악랄한 사람도.
강가를 떠날 생각인가?
강환장은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았지만 며칠 되지 않아 증거가 왔다. 역관에서 전한 예부의 판결서, 그 얇디얇은 문서 한 장을 강환장은 읽고 또 읽었다. 몇 번이나 읽어도 믿을 수 없었다. 강가의 최대 재산인 작위 세습이, 가장 중요한 세습 두 글자가 사라졌다.
강환장은 그 판결서를 들고 오후부터 저녁까지 선창에 앉아 있었고 저녁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나무 인형이 된 듯이 계속 앉아 있었다.
세습 수녕백이 수녕백이 되었다. 자신의 대 이후로 강가는 서민으로 돌아간다. 강이씨는 이씨가 되어 앞으로 강가와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이 된다. 수녕백부엔 강곡씨라는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이른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강환장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환장은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감각이 없던 몸과 의식이 그 빛에 조금씩 돌아오고, 그는 천천히 탑상에서 내려와 선창에서 나갔다.
어느새 바람이 이토록 매서워졌을까.
그는 매섭게 부는 강바람을 맞으며 강기슭의 메마른 겨울 풍경을 바라봤다. 처량한 기분이 몰려들었다. 어느새 겨울이 되었다.
돌아온 지 곧 1년이 되어간다.
지난 생에 이맘때쯤은 어땠더라?
강환장은 돛대에 기댄 채 힘겹게 과거를 떠올렸다.
생각났다. 지난 생 이맘때쯤엔 진왕과 왕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양 구야가 혼인했다. 이씨가 오 부인에게 혼수를 족히 여섯 대나 해주었다. 그 오씨 가문에서는 그 혼수 여섯 대를 맨 앞에 배치했고, 세월이 흐른 후에도 오 부인은 그때 일을 종종 입에 올렸다. 그때 이씨가 해준 혼수 덕분에 체면이 살았다고.
지금은 어떻게 됐지? 양 구야가 혼인했나?
강환장은 얼마나 시간이 오래 흘렀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선창 안으로 들어가서 종이를 깔고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러나 어디부터 변명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모든 상주서는 읽으라고만 되어 있지 반박하라는 말이 없었다. 설령 반박 상주를 써서 보낸다고 해도, 역관을 통해 상주서가 경성에 닿을 즈음엔 자신도 경성에 도착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상주를 더 빨리 보내려면 따로 사람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은 서신을 보낼 말과 사람이 없었다.
이번 생에 외지로 파견 나온 건 처음이었다. 경성에서 강남까지, 온갖 풍상과 고초를 겪어서, 이번에 다녀온 것만으로 10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지난 생엔…… 경성을 떠나는 임무를 맡았을 때 불편함이라고는 하나도 겪지 않았다. 지난 생엔, 죽을 때까지 지난 생이 좋은지 몰랐다.
그러나 현생에선 깨달았다.
이씨는 분명 자신과 함께 돌아왔다. 바로 넘어져서 머리가 깨진 다음 날.
소홀했다. 그때 그 여인이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눈빛이 지나치게 깊었고 지나치게 매섭다는 걸.
이제야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여인이 젊었을 때 눈빛이 매우 맑고 또렷했다. 한눈에 생각을 다 읽을 수 있었다. 그 여인을 바라보면, 그 여인의 눈빛엔 자기밖에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여인의 눈빛이 변했다. 누워서 일어나려 하지 않고 혼수도 다 내버렸다. 고씨 일을 설계하고 고가 부자를 종용해서 사달을 일으켰다. 강가와 고가의 체면을 먹칠하고 아무나 짓밟게 했다. 그 핑계로 친정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곡씨를 만들어내고, 수녕백 세습 작위를 없앴다. 그리고 강이씨 중에 ‘강’자를 지웠다.
이렇게 나를 원망하나? 강가를 이렇게까지 원망하나?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강가가 무엇을 잘못해서? 일개 상인 가문 여식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친정을 받아줬는데 뭘 더 바란단 말인가. 내가 뭘 더 잘해줘야 하나? 강가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강환장은 울분이 가득해서 속이 턱턱 막혔다. 울분 속에 어렴풋이, 이유 모를 두려움이 느껴져서 온몸이 서늘해졌다.
열흘 뒤, 긴 여정에 지친 강환장은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부부터 가서 보고하고 그길로 수녕백부로 다급하게 돌아갔다. 수녕백부 대문 앞에 서서 원래 검은 바탕에 금빛 글자였던 수녕백부 편액이 검은 바탕에 푸른 글자로 바뀐 것을 올려다봤다.
금빛 찬란한 큰 글자가 없어져서인지, 눈앞에 보이는 수녕백부는 자신이 경성을 떠날 때보다 훨씬 초라해 보였다. 황동이 촘촘하게 박힌 검은 칠 대문과 대문 양쪽의 흰색 호피 담장(虎皮墙: 크고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고 그 사이를 회반죽으로 메꾸어, 그 모양이 호랑이 무늬 같다 하여 호피 담장이라 부른다.)은 그가 혼인했을 때 새로 보수하고 칠한 것인데 칠이 벌써 벗겨져 있었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이제는 인적이 끊긴 것처럼 대문 옆 측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수녕백부의 변고를 모르는 독산은 새로 바뀐 편액을 놀라고 두려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멍하니 서서 편액을 올려다보고 있는 강환장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망설이다가 계단 위로 올라 힘껏 대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없나? 문 열어라! 세자야께서 돌아오셨다!”
대문 안은 끽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고, 독산의 두려움이 더 깊어졌다. 그는 빠르게 계단 아래로 내려가 측문 앞으로 달려가서 탁탁 두드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함쳤다
“아무도 없나? 어서 문 열어라! 세자야께서 돌아오셨다. 세자야께서 돌아오셨다고!”
“갑니다, 가요! 들었다. 소리 지르지 마라!”
어멈의 포악한 목소리가 문틈을 넘어 들려왔다. 독산은 그 포악한 목소리가 신선 목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기쁨에 겨워 울먹이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다.
저택에 사람이 있었구나!
강환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측문으로 들어가서 월동문을 지나 나뭇잎이 가득 떨어진 청석로에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서서 조금씩 주변을 살폈다.
지난 생 이맘때에는 수녕백부의 토목 공사가 일단락되고, 저택이 새로워지고 생기가 넘쳤던 것이 떠올랐다.
이맘때쯤, 이씨는 새해 준비를 시작했었다. 처음 준비하는 것이라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봐 괜히 나중에 시간에 쫓겨 부랴부랴 준비하지 않도록 조금 서둘러 준비하겠다고 했다. 이맘때쯤, 경성 장궤들이 보내온 연말 물건이 대문 영벽부터 중문까지 쭉 이어졌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보다 더 안쪽으로 멀리까지 물건이 쌓여 있었다. 새로 잔뜩 들인 어멈, 시녀들이 하나같이 새 옷을 입고 싱글벙글 웃으며 발에 땀 나게 뛰어다녔었다.
강환장의 시선을 따라 지난 생의 장면이 화폭처럼 펼쳐졌다. 메말라 죽은 화초, 칠이 얼룩덜룩 벗겨진 정자, 사방에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가련할 정도로 초라한 난각, 그리고 월동문 밖에 우뚝 선 영벽까지.
화폭 위 떠들썩한 예전 모습은 영벽에서 서서히 옅어져서 사라졌다. 화려한 색채, 금빛 찬란한 그림이 빠른 속도로 모든 색을 잃었고 눈앞에는 몰락하고 쇠퇴한 광경만 남았다. 강환장은 서글퍼졌다. 이 모든 것이 다 이씨 때문인가?
강환장은 얼마나 서 있었는지 모를 만큼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떨구고 기운 없는 걸음으로 진 부인 정원으로 향했다.
강환장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안살림을 맡은 곡 대내내가 먼저 들었다. 흥분해서 손에 쥔 찻잔을 떨어뜨린 바람에 찻물이 치마에 튀자, 곡 대내내는 서둘러 사람을 불러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분과 연지를 바르고 머리를 단장했다.
인간 세상의 용봉처럼 뛰어난 부군이, 밤낮없이 그리워한 부군이, 드디어 돌아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들여 세심히 단장한 곡 대내내는 문턱을 넘다가 다급하게 발을 움츠렸다. 춘연을 불러 큰 거울을 들게 하고 자기는 작은 거울을 들고 위아래, 앞뒤, 다시 꼼꼼히 살펴보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거울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심호흡하고 단정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문을 나서서 몇 번 훔쳐본 것밖에 없는 완벽한 부군을 만나러 다급하게 진 부인 정원으로 향했다.
강환장은 정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걸음을 멈추고 처마가 곧 무너질 듯이 불안한 난각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난각을 기억했다.
지난 생 이맘때, 이 난각을 새로 보수했다. 이씨는 난각 남쪽, 그리고 돌을 쌓아 만든 석가산 사이의 땅에 고아하고 세련된 홍매 나무를 심게 했다. 이맘때엔 꽃 피우는 시기가 가장 빠른 홍매화가 한창 활짝 피었고, 석가산엔 붉은 국화가 드넓게 피어 있었다. 난각에 서서 멀리 내다보면 활짝 핀 홍매화, 강렬하게 핀 붉은 국화가 풍성한 매화 가지와 그림 같은 석가산과 어우러져서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운 절경을 연출했다.
지난 생엔, 바로 이맘때, 바로 이 난각 안에 고씨가 있었다. 문이 활짝 열린 난각을 지나가다가 등진 채 열심히 홍매화와 국화를 그리는 고씨를 보고 걸음을 멈췄었다. 고씨의 뒷모습, 그림처럼 아름다운 절경과 어우러진 고씨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