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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239화 (239/463)

239화: 귀비는 보호막

“설사 그 증언을 인정한다고 해도 주렴을 산 것이 무슨 죄냐? 주렴을 사서 그 기녀에게 준 것은 또 무슨 잘못이냐? 누가 그 주렴을 대왕야가 선물한 것이라고 하더냐? 잡을 수도, 그림자도 없는 뜬소문이 무슨 소용 있다고.”

고서강은 심장이 쿡쿡 쑤시도록 화가 났다. 대왕야를 호되게 칠 수 있었던 좋은 국면이 이 두 덜렁쇠 무지렁이 때문에 날아가고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됐다.

“소육은 그저 주홍년을 잡을 생각밖에 없어서 그랬던 거네. 증인 아닌가. 증언을 받으면 다른 사람에겐 보일 필요 없고 주 귀비에게만 보이면 되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귀비 마마만 알면 되니까 말일세.”

주육은 넋이 나가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사황자는 얼떨떨한 것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를 상태라서 주 추밀부사가 눈 질끈 감고 두 사람 대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고서강은 혼이 빠진 주육과 얼떨떨하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황자를 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달리 고를 사람이 있다면 피를 흘리는 사람을 본 것만으로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이 무지렁이를 절대로 보좌하지 않을 텐데!

“이젠 어쩌지?”

주 추밀부사가 눈살을 단단히 찌푸리고 고서강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자네가 한 말이 맞네. 어떻게 된 건지 귀비 마마만 알면 되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네. 사왕야가 얼른 궁으로 들어가서 이 일을 직접 말씀드려야 하네. 사왕야!”

“사왕야!”

주 추밀부사는 어쩔 수 없이 일어서서 다가가 사황자를 밀었다. 사왕야는 으응,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놈 혼자, 네 말이 맞다. 그놈 혼자…….”

“사왕야!”

고서강이 목소리를 높여 버럭 고함치자 사황자는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렸다. 눈빛도 서서히 돌아왔다.

“내가…… 정신을 팔았군. 고 사사, 뭐라고 했지?”

“입궁하셔야 합니다. 지금 바로요. 귀비 마마를 만나서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말씀드리세요. 왜 주홍년을 잡으러 간 건지도 말씀드리고요. 있는 대로 말씀하세요. 다 말씀드리고 귀비 마마께 결정 내려달라고 하십시오.”

고서강이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알았네.”

사황자가 일어서자 고서강도 따라 일어나서 당부했다.

“사왕야, 사람 하나 죽었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니 마음을 다잡으십시오. 귀비 마마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가는 동안 잘 생각하시고요. 귀비 마마는 사왕야를 제일 아끼십니다. 모자 사이에 못 할 말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사황자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서서히 내뱉었다가 다시 들이마셨다.

“마음 놓게.”

사황자가 그렇게 말하고 나간 다음 주 추밀부사는 아직도 넋이 나가서 얼떨떨하게 앉은 주육을 잡아 일으켰다.

“가자. 두려워할 것 없다. 그냥 사람이 죽은 것일 뿐이다. 대단한 일이 아니다. 소육! 정신 차려라!”

주 추밀부사는 멍한 표정을 짓는 주육의 얼굴을 내리쳤다. 고서강은 그런 두 사람을 돌아봤다.

“영칠에게 사람을 보내 어쩌면 좋을지 물어보게. 처음으로 전장에 나가서 사람을 죽이면 소육처럼 이렇게 넋을 놓는 사람이 많다네. 영칠에겐 정신 차리게 할 방법이 분명 있을 걸세.”

경부 관아, 형 부윤은 대당에 누운 시신, 좌우에 각각 선 내시 두 명, 그리고 대당 안에 무릎 꿇은 증인 여남은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치가 너무나 아팠다.

죽은 사람은 무창 상행 대장궤라고 대황자가 친히 와서 당부했다. 대황자는 사황자가 거리에서 까닭 없이 사람을 죽였으니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율법에 따르라고, 대의를 위해서라면 친지도 기꺼이 죽이겠다는 듯이 정의롭게 굴면서, 법을 어기면 황자도 백성과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어찌 가능할까. 사황자가 아니라 진왕이라고 해도 그는 못 한다. 법을 어기면 황자도 백성과 같은 벌을 받는다는 건 그저 하는 소리지! 대부(大夫) 이상은 형을 가하지 않는다는 특권법도 있는걸!

하지만 대황자가 직접 입을 열었고 대리시로 올리지 말라고 명했다.

‘명백하고 단순 명료한 사건이다. 관아에서 처리하면 된다. 형부와 대리시에 올릴 것 없다!’

대황자의 당부를 떠올린 형 부윤은 울고 싶어졌다.

대황자의 당부를 거역하자니, 대황자 성격으로 채찍질 한바탕 하는 것도 가벼운 편이겠지. 아니면 사황자처럼 칼을 뽑아 찔러버리면 자기는 그 억울함을 어디에서 풀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억울함을 호소한들 무엇하랴. 황상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대황자를 죽이기라도 할까? 대황자의 악행을 없던 일로 만들려고 제 머리에 똥을 붓지만 않아도 다행인 것을.

설령 황상이 상을 내려 위로한들 무엇하랴. 이미 죽었는데.

형 부윤은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생각을 마구하고 있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르신?”

긴 서안 뒤에 앉아서 일각 가까이 넋 놓은 형 부윤의 모습에 곁에 있던 막료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어쩌지?”

형 부윤은 씁쓸하게 주름을 찌푸리고는 도와달라는 듯 막료를 바라봤다.

“어르신, 판결하면 안 될 사건입니다. 일단 미루고 검시부터 하십시오.”

형 부윤이 발뺌하더니 오작에게 검시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서반에게 건네 들은 영원은 웃느라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형 부윤은 역시나 두루뭉술의 대가로구나. 미루는 작전을 끝내주게 잘 쓰는군!

이번 사건은 경부 관아에서 판결하고 결정할 사안이 아예 아니지. 모두 궁의 힘겨루기이니. 안타깝게도 자신은 지금까지 궁 안의 일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언저리에 서서 사환을 보내고 불을 지르는 것뿐.

에효. 이런 국면이라니. 정말 속이 타는군!

영원은 일어서서 나른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검시부터 한다고 하니 하루 이틀 안엔 결론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여기엔 볼일이 없으니 나가서 돌아보기나 할까.

주 귀비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읍소하는 건 사황자가 가장 잘하는 몇 가지 일 중 하나였다. 사황자는 안신탕을 마시고 말에 올라 선덕문으로 직행해 궁으로 들어가 주 귀비를 만나길 청했다.

아직 주 귀비에게 이 큰일이 전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주 귀비는 원래 두 아들 일을 제외하면 소식이 어두웠다. 두 아들 일이 아닌 다른 일은 조정이든 경성 쪽에 벌어지는 일이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안으로 달려 들어간 사황자는 엎드리자마자 고개를 조아렸다.

“모비, 살려주세요!”

“무슨 일이냐? 어서 부축해라.”

주 귀비가 깜짝 놀라서 분부했고 시녀들이 몰려와 사황자를 일으켰다. 사황자는 눈물을 매단 채 자연스럽게 주 귀비 곁으로 다가가 앉아서 주육이 자기를 위해서 얼마나 화를 냈는지, 아라의 그 주렴의 내력을 어떤 식으로 조사했는지, 어떻게 전 장궤를 찾아냈는지 이야기했다.

전 장궤가 아비의 중병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간 대목을 이야기하려던 사황자는 머리를 굴린 다음 돌연 실종된 것으로 말을 바꿨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행히 사환이 튀어나왔고, 주육이 마침 마주쳤고, 전 장궤가 주렴을 무창 상행 주 대장궤 주홍년에게 팔았다는 걸 사환이 어떻게 주육에게 알려주었는지 말했다. 그 주렴은 사실 무창 상행이 큰형님 대신 샀다는 것과, 사환이 겁에 질려 달아났다는 것, 주홍년에게 물어보러 갔다가 함정에 빠졌고 주홍년이 호위의 칼에 엎어지면서 살인 사건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웠다는 등등 죄다 이야기했다.

유창하고 매끄럽게 전후 인과를 설명한 사황자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모비,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저와 큰형님, 모두 모비의 친자식입니다. 큰형님이 어떻게 저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주렴으로 모함하더니, 절 모함하자고 사람 목숨을 여럿 해쳤습니다. 모비는 매일 염불을 외우면서 우리 형제를 위해 복을 비는데, 형님은 오로지 모비가 절 미워하게 하려고 이런 일까지 했습니다!”

사황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모비, 말씀해보세요.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주렴에 이제 주홍년까지. 숨 쉬던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비, 말씀해보세요,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어째서 이런 일이!”

주 귀비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졌다.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그렇게 큰돈을 써서 주렴을 사서 까닭 없이 그 천것에게 선물한 것이, 사가아라고 여기게 하려고 한 것이라고? 사가아가 선물한들 뭐가 어떻다고? 사가아는 자신의 친아들인데, 사가아하고 멀어지기라도 할까 봐? 당당한 귀비가 미천한 기녀와 비교하기라도 할까 봐?

주 귀비는 원래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아침에 그렇게 화를 내고 뱃속 가득 억울해했던 건 지금 이 순간 몽땅 잊어버렸다.

“사가아, 네 형이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너희 둘 모두 내 배에서 나왔다. 네 형이 그럴 리가 없다.”

주 귀비는 두 아들이 사실은 매우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장난기가 심해서 수시로 쿡쿡 찌르면서 노는 것뿐이라고.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모비, 전 장궤는 경성에서 십여 년 동안 장사한 사람인데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주홍년은 호위의 칼에 달려들어서 제 눈앞에서 죽었습니다. 모비, 형님이 몰아세워서 죽은 겁니다. 벌써 둘이 죽었습니다. 아라의 주렴, 큰형님이 준 것이 맞습니다. 어머니, 큰형님은 절 죽이려고 합니다. 조금 전에, 경부 관아에서, 제가 보는 앞에서, 제가 주홍년을 죽였다고 부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봤습니다. 살인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죄라고 했습니다. 법을 어기면 황자도 백성과 죄가 같다고도 했습니다. 형 부윤에게 사형을 판결하라고 했습니다.”

“어딜 감히!”

주 귀비는 아들이 사형 판결을 받을 거라는 말에 순간 눈을 치켜뜨며 화를 냈다.

“모비, 형 부윤이야 그럴 리 없지요. 하지만 큰형님이라면 합니다. 모비, 모비와 부황이 절 아끼는 걸 큰형님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원망합니다. 전부터 절 죽이지 못해 이를 갈고 있었어요. 모비, 생각해 보세요. 제가 죽으면, 모비와 부황께는 큰형님 하나뿐입니다. 무슨 짓을 하든, 아무리 불효를 저질러도 보위를 큰형님에게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모비, 큰형님은 제가 태자 자리를 다툴까 봐 어떻게든 절 해치려는 겁니다.”

두 아들이 너 죽고 나 살자 하는 사이라는 걸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주 귀비를 상대로 사황자는 이를 악물고 모든 걸 까놓고 말했다.

주 귀비는 멍하니 사황자를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숨을 돌리며 말했다.

“선조의 업을 너에게 넘길지 아니면 네 형에게 넘길지, 네 부황이 매우 근심하는 건 맞다. 둘 다 너무나 훌륭하니까. 하지만 누구에게 넘기든, 너희 둘은 친형제다. 어미가 같은 친형제가 누가 선조의 업을 이을지 하는 일로 반목한단 말이냐? 이렇게…….”

주 귀비는 살인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가 싫었다.

“널 죽이려고 한다고? 네 형이…….”

“형님의 성격을 모르십니까? 어머니가 가장 잘 아시잖습니까. 어릴 때부터 포악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제가 다섯 살 때 부황이 고기를 하사하셨을 때, 형님은 없고 배가 고파서 제가 먼저 한 조각 먹었다고 그 자리에서 발로 걷어찼습니다. 모비, 기억하시지요? 그때 머리가 다 깨졌습니다. 모비, 형님 성격이 이렇습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형제도 없을뿐더러 모비, 하물며 부황도 없습니다. 모비를 어찌 대하는지 보십시오. 효심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사황자는 이왕 시작한 이상 모질게 마음먹고 끝까지 말했다. 지금 국면은 자기가 죽거나 형님이 망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형제의 정, 양심, 효도를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헛소리하지 말아라!”

주 귀비는 너무나 두려웠다. 제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 자랑스럽기 짝이 없는 두 아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대황자와 비교하면 사황자는 어떤 식으로 주 귀비와 이야기해야 하는지 알고 적당히 물러설 줄도 알았다.

“모비, 앞으로 잘 지켜보면 아실 겁니다. 모비, 살려주세요. 형님이 제 죄를 물으려고 합니다. 사람을 죽였으니 목숨을 내놓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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