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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238화 (238/463)

238화: 죽어야 하는

탕 이야의 매우 간단한 말에 고서강은 얼떨떨해졌다.

“떠나? 왜? 자세히 말해 보게!”

“예. 전 장궤의 맞은편 이웃, 그리고 친분이 깊던 장궤들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보름 전부터 전 장궤가 밤마다 아비 꿈을 꿨는데 그저께 새벽에 고향에서 아비가 중병에 걸렸으니 어서 돌아오라는 소식이 왔답니다. 전 장궤는 지극한 효자로, 소식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기절했답니다. 눈을 뜨고는 곧바로 짐을 챙겨 즉시 남으로 돌아갔고요. 해가 뜨기 전에 출발했고, 짐을 다 챙기지 못하고 갔답니다. 저택도 곽 장궤라고, 해산물 장사를 하는 다른 사람에게 맡겼답니다. 곽 장궤에게 빚이 2천 냥 있었는데 저택으로 갚은 셈 치고요. 그 저택이 5천 냥은 되는…….”

“됐네.”

탕 이야는 계속 이야기하려 했지만 고서강이 말을 잘랐다.

“전 장궤의 고향이 어딘가?”

“복건입니다.”

“그럼 됐네.”

고서강은 전 장궤의 고향에 사람을 보내 진위를 알아보려던 생각을 접었다. 복건은 너무나 멀었다.

“전 장궤 말고 경성에 사정을 아는 사람은 없고? 주 대장궤는 빼고.”

“전 장궤의 사환이 하나 있답니다. 전 장궤가 남으로 돌아가기 전날 명을 받고 보림사에 장수등을 켜러 갔다가 떠나는 걸 못 봤답니다.”

탕 이야는 말하다 말고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어떻게 안 건가? 그 사환은?”

“돌아와서 집이 텅 빈 걸 보고는 여기저기 무슨 일인지 물어봐서 다들 알게 되었답니다. 사환이 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

탕 이야는 할 수 있는 한 간결하게 말했다.

“그 사환을 찾게. 반드시 찾아야 하네! 서둘러야 해!”

고서강이 매섭게 분부하자 탕 이야는 연신 대답하고 고서강의 눈치를 살피며 물러났다.

“여봐라!”

주 대장궤를 몰래 잡아와 고문해서라도 자백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고 서강이 사람을 부르려고 하는데 종복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 들어왔다.

“고 노야, 노야! 소인이, 소인 주 육소야의 분부를 받고 왔습니다. 지금 사왕야와 함께 무창 상행에 주가를 잡으러 간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고서강이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사왕야? 너희 노야는 이 일을 아시냐? 주 추밀부사 말이다. 노야도 아느냐?”

“육소야가 사람을 보내셨으니 지금쯤 아실 겁니다.”

종복이 땀을 닦으며 대답하는 말에 고서강은 눈앞이 컴컴해졌다. 사왕야에 주육 그 얼뜨기가 나섰으니 무창 상행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주 대장궤가 멀리 달아날 것이다. 주 대장궤가 달아나버리면 다시는 찾지 못할 것이다.

“서둘러 말을 준비해라!”

고서강은 정신없이 말을 준비하라고 외친 다음에야 금세 정신을 차렸다. 내가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내가 가면 더 큰 사달이 나지!

“다섯째를 불러라! 어서! 즉시 오라고 해라!”

고자의는 마침 오늘 나가지 않고 저택에 있었다. 부친의 명을 받은 그는 다급하게 유능한 심복을 데리고 주 대장궤의 퇴로를 막으려고 다른 길을 골라 무창 상행으로 달려갔다.

주 대장궤에게 말을 전하러 간 대황자부 사환이 무창 상행으로 들어가자마자, 사황자가 주육과 내시, 사환, 종복을 거느리고 무창 상행에 나타나서 겹겹으로 포위했다.

무창 상행은 마행가가 아니지만 마행가와 그리 멀지 않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 포위하자 겁 많은 사람들은 얼른 달아났다. 그러나 마행가 일대, 그리고 온 경성은 교만한 백성이 살기로 유명한 곳이고 겁 많은 사람은 적고 간 큰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사황자가 무창 상행을 포위하자, 한가한 구경꾼들이 사황자의 시종들을 에워싸고 하나같이 목을 빼고 손가락질하며 무슨 일인지 추측해댔다.

대황자부 사환의 전언을 들은 주 대장궤는 서둘러 은표를 챙기고 장부를 모아서 궤짝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하지만 자물쇠를 다 채우기도 전에 사황자가 사람을 거느리고 곧장 뛰쳐 들어왔다. 두 호위가 그의 팔을 잡고 질질 끌 듯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주 대장궤는 인생의 마지막 일각에 오로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은표와 장부를 챙겨서 궤짝에 자물쇠를 채울 시간에 도망을 갔으면 살지 않았을까 하는.

“사왕야! 사왕야, 왜 이러십니까! 사왕야…….”

주 대장궤는 당황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공포에 사로잡혀서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입을 다물었다.

“왜 이래? 네가 한 짓이 있을 텐데, 왜 이러는지 내게 물어?”

순조롭게 주 대장궤를 잡은 사황자는 증언을 받아서 첫째의 얼굴에 힘껏 후려치면 첫째가 얼마나 낭패스러운 꼴이 될까를 상상하고 말로 다 못 할 정도로 통쾌해졌다.

“끌고 가자!”

“잠깐. 사왕야, 이 방에 증거가 있을지 모르잖습니까.”

주육이 실내를 두리번거리면서 쉴 새 없이 손을 비볐다.

이 방에 분명 은자가 많이 있겠지. 얼마나 돈이 많아야 사왕야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대번 10만 냥을 내놓을까. 무창 상행 전체가 금고일 텐데, 뒤지지 않으면 아깝지 않나.

“음. 맞는 말이다. 잘 귀띔했다. 뒤져라. 증거를 찾아내라!”

사황자는 주육을 칭찬한 다음 명령했다. 주 대장궤는 두 종복에게 팔을 붙들린 채, 우르르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종복들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를 사왕야를 멍하니 바라봤다. 사왕야가 뛰쳐 들어와서 자신을 붙잡은 그 순간, 장 선생이 전한 그 말이 폭죽처럼 귓가에 펑펑 울렸다. 다른 건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고 오로지 그 말뿐이었다.

혹시 붙잡히면 즉시 방법을 생각해서 자진해라! 대가족을 생각해라!

대가족……. 어린 내 손자…….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방법을. 자진. 무슨 방법을 어떻게 생각하라는 말인가. 죽어본 적도 없는데.

방 안엔 정말로 은자가 없었다. 사환, 종복이 온 방을 뒤집어엎어도 은표 한 장 찾아내지 못한 걸 방 한가운데 서서 지켜본 주육은 실망이 분노로 변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주 대장궤를 잡아챘다. 그러고 입을 열기도 전에 주 대장궤 품에 살짝 보이는 은표를 발견하고 품에 손을 찔러넣고 은표를 꺼내 보물처럼 사황자 앞에 바쳤다.

“사왕야, 이것 보십시오. 제가 말씀드렸지요?”

“네가 가지고 있어라.”

사왕야는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는 눈빛으로 얇디얇은 은표 더미를 바라봤다. 이 정도 은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사왕야, 감사합니다!”

그 말을 기다리던 주육은 얼른 은표를 품에 찔러넣고는 그제야 중요한 일이 떠올라서 종복과 사환을 돌아보며 매섭게 고함쳤다.

“증거는 찾았느냐?”

“장부밖에 없습니다.”

종복들은 품에 장부를 품고서 사황자를 바라보며 주육의 질문에 대답했다. 사황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손을 저었다.

“가지고 가라!”

장부에서 무언가 찾아낼지도 모른다.

사황자가 앞장서고 주육은 바짝 따랐고, 종복이 정신 나간 듯한 주 대장궤를 밀면서 그 뒤를 따라 나왔다. 무창 상행 대문을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고함치고 술렁였다.

“나왔다, 나왔어!”

“사왕야다! 사왕야야!”

“아이고, 주 대장궤를 잡아가네!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창 상행은 하가 점포 아닌가?”

“하가와 수국공부는 사돈인데. 아이고, 자기 편도 몰라보다니, 홍수가 용왕 묘를 씻어 내려가는 짝이군.”

“자기 편을 몰라보긴 무슨. 진작 반목한 지 언젠데. 이젠 아예 집을 터는군.”

“아이고, 다음엔 칼부림 나겠네!”

사방에서 온갖 소리가 들렸다. 경성의 한가한 사람들은 첫째 한가할 수 없을 정도로 한가하고, 둘째 간이 크며, 셋째 식견이 넓었다.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며 찧어대는 입방아 중에 진짜 뭘 좀 아는 소리도 들렸다.

이런 기세를 처음 겪는 사황자는 무심결에 움찔 물러났다. 주육은 겪어 봤지만, 보통 구경하는 쪽이었다. 이렇게 구경 당하는 쪽에 서 있으니 순간 당황해서 사황자 뒤로 몸을 숨겼다.

“흩어지라 해라! 어서 이놈들을 쫓아내!”

사황자는 당황한 가운데 호위들에게 분부했다. 사황자부에서 일하는 호위들은 위풍당당했고 하나면 둘이라고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쫓아내라는 말에 호위들은 일제히 스르륵 검을 뽑아서 매서운 기세로 사람을 쫓아냈다.

서슬 퍼런 검광에 주 대장궤는 눈이 부신 동시에 멍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자진! 그래. 자진해야지. 검이 있다. 저 매서운 검 좀 보라지. 자진해야 한다. 내 어린 손자가…….

주 대장궤는 눈빛을 빛내며 눈처럼 빛나는 장검을 향해서 힘껏 달려들었다. 호위 손에 들린 장검이 주 대장궤의 품을 파고들어 등을 찌르고 나왔다. 주 대장궤가 눈을 꼭 감고 부르르 떨더니 편안해진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호위가 무심결에 장검을 뽑자 주 대장궤가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주 대장궤는 주육 뒤에 있었고 주육은 사황자 바로 뒤에 있었는데 사황자가 뒷걸음질 치자 주육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물러서자 주 대장궤와 거의 달라붙은 상태가 되었다. 주 대장궤의 피가 그렇게 많이 튄 건 아니지만 주육이 놀라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몸, 얼굴에 따듯한 선혈이 가득 튀자 주육은 날카롭게 고함치다가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사황자는 계단 위에서 계속해서 피를 흘리는 주 대장궤와, 기절해서 주 대장궤 몸으로 쓰러진 주육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봤다. 빠르게 솟구쳐 흐르는 피가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혈이 빠른 속도로 흘러 내려와 두 다리를 에워싸더니 신발 바닥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기겁한 사황자는 넋이 나갔다.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인 것처럼 고요하더니, 이내 날카로운 비명에 그 정적이 깨지고 여기저기 비명이 들렸다. 공포에 사로잡힌 비명 사이에 흥분한 휘파람 소리가 섞여 있었다.

구경꾼 사이를 미친 듯이 파고들어 오던 고자의는 사람들이 돌연 조용해지는 걸 보고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

일 났다!

마음이 급해져서 무턱대고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간 그는 눈앞에 보이는 피가 낭자한 장면에 눈은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졌다.

대황자도 당도했다. 대황자는 고자의처럼 온화하지 않아서 호위들이 채찍을 휘둘러 몇 번 만에 길을 냈다. 대황자는 그 길을 따라 말을 타고 인파 속을 통과했다. 말 위에서, 계단 위에 쓰러져 죽은 주 대장궤와 피범벅이 되어 주 대장궤 몸에 엎드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주육을 보니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매우 통쾌해졌다.

이번엔 절대로 쉽게 봐주지 않을 것이다! 죽이진 못한대도 껍질은 벗겨 버리리라!

대황자는 악랄한 눈빛으로 사황자를 흘깃 봤다. 사람을 죽였으니 목숨으로 갚게 할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고 가장 아래쪽 의자에 움츠려 앉은 주육은 수시로 진저리쳤다. 사람이, 살아 숨 쉬던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코끝부터 온 얼굴에 피가 튀었다. 마치 입으로 사람의 피를 뿜어낸 것처럼! 주육은 입술을 핥다가 또 역겨워져서 속이 울렁거렸다.

주 추밀부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수시로 아들을 힐끔거렸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간이 작았는데 오늘 일로 식겁했을 것이다.

고서강은 얼굴이 시퍼렇게 되었다. 사황자를 직시하고 훈계할 수 없으니 주육을 빤히 보며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것! 거리에서 사람을 잡아가다니! 대왕야가 거리에서 진왕을 채찍질한 것과 뭐가 다르냐! 설사 주가 놈이 죽지 않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활개 치며 잡아 왔으니, 증언을 받았더라도 대왕야는 네가 사적으로 형을 가하고 증언을 받은 거라서 무효라고 주장할 것이다!”

주육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질어질한 것이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서 고서강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사황자 역시 검이 살아 있는 사람을 관통하는 걸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그의 무자비함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기가 보지 않는다면 사람을 죽이든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직접 봤다. 주육처럼 오줌을 싸서 바지를 적시진 않았지만, 무지하게 놀랐다.

놀란 것뿐만 아니라 후회도 됐다. 인파를 비집고 나온 첫째가 들뜨고 뿌듯해하는 걸 보고 자기가 어리석은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주가 놈이 무창 상행에서 자기가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눈앞에서 죽은 것 자체가 첫째가 판 함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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