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말하면 안 되는 일
이미 두 번이나 통곡한 주 귀비는 두 눈이 시뻘겋고 기운이 없었다. 대황자는 예를 올리고 일어서서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제 경성에 새로운 일이 생겼는데, 모비, 들으셨습니까?”
“응? 무슨 일이냐.”
주 귀비는 시름시름 기운 없이 물었다.
“어젯밤에 고서강의 아들 고자의가, 모비가 자주 칭찬하는 고자의 말입니다. 철없이 허튼짓이나 하는 소육과 다르다고 칭찬하시더니, 사실 그자도 대단한 헛짓을 하더군요. 연향루에서 연회를 열고 아라가 진주 주렴을 얻은 걸 축하했답니다.”
대황자는 한마디 만에 때릴 사람을 다 때렸다.
“고자의가 선물했단 말이냐? 고가에 그런 돈이 어디 있어서?”
주 귀비는 즉시 다시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모비도 참. 고가가 가문을 일으킨 게 몇 년 됐다고, 그럴 돈이 어디 있습니까. 고자의가 감당할 물건이 아닙니다. 고자의는 그저 연회를 열고 아라를 축하했을 뿐입니다. 넷째에게 아부를……. 크흠!”
대황자는 실수로 말을 흘린 듯이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고 입술을 툭툭 치면서 허허 웃었다.
“아라 그 계집, 대체 무엇이냐? 요물 같은 것. 지난번에 때려죽이려고 했을 때 다들 말리더니, 이런 요물을 봐주라고 하다니. 이 화근이 사람 몇 죽여야 속이 시원하다더냐?”
주 귀비는 서러운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지난번에 때려죽이라고 했더니 다들 찾아와 그녀를 설득했다. 사적으로 형을 가해 사람을 죽이는 건 망국의 징조라고 하면서.
아라 같은 요물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망국의 징조다!
“모비, 이 일은 아라와 상관없습니다.”
대황자는 주 귀비가 또 모든 잘못을 아라에게 떠넘기려고 하자 언짢아져서 얼른 다시 잡아끌었다. 그가 치려는 건 아라가 아니라 넷째였다.
“아라는 일개 미천한 기녀입니다. 모비 회랑에서 기르는 새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망국의 징조인 요물이요?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대황자의 말에 주 귀비의 기분이 훨씬 풀렸다. 그러게 말이다. 아라 같은 미천하고 미천한 기녀가 자신보다 좋은 주렴을 가지고 있으면 무얼 하나. 자신이 키우는 새에도 못 미치는 물건인데.
“아라 그것이 요사떠는 것도 다 뒤에서 떠받드는 사람이 있어서입니다. 참, 그런데 넷째가 모비에게 드린 생신 선물을 가장 뛰어난 것으로 고르지 않다니요. 주렴 두 개 중에 질 떨어지는 걸 모비에게 드리고 좋은 걸 아라에게 주다니. 넷째도 참. 넷째 마음엔 사랑하는 미인이 모비보다 중요하답니까?”
대황자는 마음 아파 죽겠다는 얼굴로 주 귀비를 빤히 바라봤다. 주 귀비의 얼굴이 시퍼레졌다.
“정말로 그 아이가 준 것이란 말이냐? 10만 냥이라면서. 그 아이가 그런 돈이 어디에 있어서.”
진주 주렴을 보자마자, 모비가 분명 좋아할 물건이라서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고 사가아가 말했었다. 그런데 실로 그걸 살 돈이 없어서 왕비의 지참금에서 6만 냥을 꺼내서 겨우 10만 냥을 맞췄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파서 주머닛돈 10만 냥을 사가아에게 주었다. 그런데 사가아는 아무리 말해도 왕비의 지참만 채우면 된다고 6만 냥만 받아서 갔었다.
대황자가 코웃음 쳤다.
“무슨 돈이 있냐고요? 모비는 그놈이 돈 없다고 우는 것만 보시지만, 돈 벌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라에게 그야말로 돈을 뿌린다고 합니다. 10만 냥도 아라 거처에서 이삼일 자고 나면 사라질 겁니다.”
주 귀비는 심장을 칼로 긁는 기분이 되어서 양손으로 옷깃을 부여잡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사가아가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모비는 넷째가 효성이 지극하다고 늘 말씀하시더니, 넷째의 효도라는 게 이런 것이었군요. 언제나 모비가 아라 뒷전이었어요. 모비가 키우는 새보다 미천한 기녀를요!”
적당히를 모르는 대황자는 어머니의 인내심을 너무 높게 쳤고, 모든 일을 이성이 아니라 성질로 판단하는 주 귀비는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넷째는 네 아우다! 어미가 같은 친아우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느냐? 넷째가 불효자면, 너는 효자냐? 형님은 아비와 같다는데, 넷째가 잘못했으면 네가 가르쳐야지. 무슨 염치로 아우가 잘못했다고 흉보는 것이냐? 무슨 염치로?”
대황자는 별안간 폭발한 주 귀비를 어안이 벙벙해져서 바라봤다.
“고얀 놈은 너다! 그러고도 무슨 염치로 아우를 욕하느냐?”
주 귀비는 욕할수록 화가 나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왜 가르치지 않은 것이냐?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해? 넷째보다 네가 더 나쁘다! 아들 둘을 키웠는데 둘 다 인간이 아니구나! 너희 둘 중에 이 어미를 안중에 두는 인간이 있느냐? 그런데도 낯짝을 들고 그런 말을 해? 너는 왜 가르치지 않은 것이냐? 내가 속 터져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것이냐? 내가 죽어서 네게 좋을 것이 뭐가 있어서?”
정신을 차린 대황자는 원망이 폭죽처럼 펑펑 터졌다. 벌떡 일어나서 주 귀비를 내려다보며 삿대질했다.
“미쳤군요! 넷째가 기녀를 총애하는 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가르쳐요? 말을 들어야 가르치지요! 내 말을 듣지 않은 건 왜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까? 형님은 아버지와 같다고요? 하!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내가 왜 아버지입니까? 나야 그러고 싶지요. 하지만 녀석이 나를 형님으로 모셔야 가능하지요. 그놈이 날 형님으로 여기지 않는 건 어째서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모비를 안중에 두지 않아요? 모비가 나를 안중에 두지 않는 겁니까, 내가 모비를 안중에 두지 않는 겁니까? 모비는 무슨 염치로 그런 말씀을 합니까?”
대황자의 분노에 주 귀비가 겁에 질려 넋이 나갔고, 대전 안의 모든 시녀도 겁에 질려 넋이 나갔다.
“압니다. 다 알아요. 모비 눈에, 마음에 넷째야말로 친아들이지요. 나는 아니고요! 암요, 나는 모비의 친아들이 아니지요! 한 번도 친아들로 여긴 적 없지요!”
고함치던 대황자는 울컥해서 목이 멨다.
“모비에겐 아들이 하나뿐입니다. 넷째 하나뿐이지요.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나는 고아입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어요!”
대황자는 그대로 돌아서서 나갔고, 주 귀비는 양손으로 옷깃을 부여잡고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화항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렇게 나무토막처럼 한참 앉아 있다가 한참 만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에 힘이 풀려 쓰러져서 목 놓아 울었다.
사황자가 들어왔을 때, 주 귀비는 화항에 앉아서 손수건을 쥐어짜며 애달프게 울고 있었다.
“너희들 어찌 시중드는 게냐? 마마께서 어찌 이렇게 울고 계셔?”
사황자는 아라의 진주 주렴 이야기를 해명하러 온 것이었다. 그 진주 주렴을 자신이 선물한 게 아니니까.
주 귀비가 이런 모습으로 우는 걸 본 사황자는 어머니가 벌써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었음을 짐작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묘하게 마음이 뜨끔해졌다.
시녀들은 모두 겁에 질려 무릎을 꿇었다. 귀비가 이렇게 우는 건 정말로 그녀들 탓이 아니잖은가.
사황자의 호통에 사람들이 온통 무릎을 꿇었지만, 주 귀비는 변함없이 울어댔다.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는 듯한 귀비의 모습에 사황자는 눈을 질끈 감고 다가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모비, 왜 이러십니까?”
“그걸 내게 묻느냐? 그럴 염치가 있어?”
주 귀비는 퉁퉁 부은 눈으로 사황자를 노려봤다. 분노보다 서러움이 더 큰 눈빛이었다.
“모비, 그게 무슨…….”
“말해 봐라!”
주 귀비는 서러움이 폭발했다.
“그런 진주 주렴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말했지? 그럼 말해 보아라. 그 천것, 그 아라의 주렴은 어디에서 난 것이냐?”
“저는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주 귀비의 물음에 요행을 바라던 사황자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사황자도 뱃속 가득 억울했다.
“제가 선물한 것이 아닙니다. 그 비싼 주렴을 무슨 돈으로 두 개나 사겠습니까. 그 진주 주렴이 어디에서 난 건지…….”
“네가 선물한 것이 아니야? 그럼 누가 선물한 것이냐? 그럴 사람이 어디 있어서?”
서러움의 바다에 푹 빠진 주 귀비는 원래 많지 않은 이성이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 알아보는 중입니다.”
“네가 선물한 것이 아니고? 그럼 누구인지 말해 보아라. 알아봐? 알아볼 필요가 있느냐? 말해라. 누구냐.”
주 귀비는 다시 사황자의 말을 잘랐고, 사황자는 초조해졌다.
“모비, 진짜 제가 아닙니다! 아라에게 물었는데, 북부의 상인이 준 거라고…….”
“아라에서 물어? 이것 좀 들어 봐라. 아라란다, 얼마나 친밀하냐. 하찮디하찮은 기녀를, 그런 기녀에게 물어봤다고? 더러워질까 두렵지도 않으냐?”
주 귀비는 이제 성질만 부리고 이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제가 준 것이 아니라니까요. 북부 상인이 줬답니다.”
사황자는 초조해서 땀이 다 흘렀다.
“상인이? 돌았다더냐? 10만 냥짜리 주렴을 천것에게? 그 주렴이 정말 10만 냥이냐? 그 주렴을 빌미로 내게 돈을 뜯어 간 게 아니라? 이 불효자식! 속 터져 죽겠다!”
주 귀비가 억지를 쓰고 있긴 하지만, 그중에 진상을 꿰뚫은 말이 있긴 했다.
“모비, 알아보는 중이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네가 하는 말이 무슨 소용이냐?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주렴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네가 가장 이 어미를 생각한다고 하지 않았어? 네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돌아서서는 시정에서 몸 파는 천것에게 똑같은 주렴을 선물하지 않았어! 이 어미에게 준 것보다 백 배는 좋은 물건으로. 양심이 있느냐? 이런 것을 열 달이나 품었다니.”
주 귀비는 말할수록 상심해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시 목 놓아 울었다. 사황자는 땀이 뻘뻘 났다.
“모비! 제가 아니라니까요!”
“이 불효자식, 어디서 소리를 질러! 아라 같은 천것을 모실망정 이 어미에게 효도할 생각이 없으면서 무슨 염치로 고함쳐! 그래, 그래. 난 모르겠다. 황상을 모셔라. 어서 황상을 모셔와라! 네 아버지에게 훈계하라고 하마. 네 아버지가 훈계할 것이다! 이 불효자식!”
주 귀비는 울며 욕했다. 정말 너무나 서러웠다. 서러움이 바다보다 더 깊었다. 사황자는 낭패스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그 주렴은 정말 자신이 선물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도 정말로 하나도 모른단 말이다!
주육은 말을 타고 사환 몇을 거느리고 성의 동쪽에 있는 전 장궤의 거처로 향했다.
지난번 주렴은 그가 사왕야에게 넘겼고, 사왕야는 주렴의 내력을 조사하는 일을 그에게 넘겼다. 영원에게 주렴을 넘겨받은 주육은 바로 영원을 찾아갔는데, 영원은 지극히 시원스럽게 그 주렴을 판 사람이 남양 장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전 장궤라고 알려주었다.
주육은 그 길로 전 장궤를 찾아갔다. 지난번 주렴이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이번에도 그가 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 산 것인지만 알아내면 모든 것이 밝혀진다.
주육은 영원이 알려준 주소를 찾아서 단숨에 오진 저택 앞에 들이닥쳤다. 저택 문은 굳게 닫혔고, 문 앞에 판매한다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주육은 넋이 나갔다. 주소는 맞는데,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저택까지 판다고?
사환이 맞은편에서 고개를 내밀고 구경하는 문지기를 붙잡아 끌고 오자, 주육이 전 장궤 저택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사는 사람은? 아무도 살지 않느냐?”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전 장궤가 줄곧 여기 살았습니다.”
문지기는 허리를 숙이고는 매우 싹싹하게 대답했다.
“그럼 전 장궤는?”
주육은 산다는 말에 바로 마음이 놓였다.
“떠났습니다. 남으로 돌아갔어요.”
수다스러운 문지기가 줄줄 말을 이었다.
“바로 엊그제, 아니 엊그제가 아니다……. 아니, 엊그제다. 야밤에 난리가 났습니다. 전 장궤 아비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밤에 바로 물건을 챙겨서 남으로 돌아갔습니다. 저택도 누구에게 맡겼는지, 바로 판다고 하더군요.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했습니다.”
주육은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주렴 일이 터지자마자 아비가 중병에 걸려서 야밤에 사라지다니!